달의 황홀경
268화
“비은궁의 개축부터 조속히 시작하여라.”
“여부 있겠습니까. 황명 받들겠사옵니다.”
최삼흥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이로써 그 자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대전 회의에 참석한 결실을 맺은 셈이었다. 비에 홀딱 젖은 신을 신고서 가볍게 걸음을 떼는 최삼흥을 모두가 얄미운 눈으로 지켜봤다.
비은궁을 흔적도 없이 쓸어 버리고 남은 공터를 지켜보는 이설을 생각해 봤다. 서럽게 울어 재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이설에게 원망받을까 두려워 비은궁 궁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설이 환궁했을 때 그가 아끼는 것들은 가급적 있던 그대로 두려고 신경을 썼다. 그래서 비은궁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건 끝내 하지 못할 것 같다.
“비가 그치는 대로 각 구역의 피해 상황을 자체 관할로 보고하라. 복구는 황궁 주관으로 시급한 민가부터 시행할 것이며 관련 모든 부서들은 조세 감면을 검토하라.”
민가부터 복구한다는 것이야 그렇다 치지만 조세 감면이라는 말에 귀족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사나흘도 아니고 고작 하루 비가 온 것 가지고 조세 감면이라니 백성들에게 너무 너그러운 처사가 아닙니까?”
“가뜩이나 편국과의 전쟁으로 피해가 막심한데 세금까지 줄어들면 곤란할 것입니다.”
“조세율은 변동 없이 걷어 들이되 이번 일로 가장 피해를 입었을 농가를 추려 황궁 재정을 나누어 주심이 어떠하십니까?”
그간 대전에만 모여 회의를 하는 안건에 대개 편국과 이민족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기 마련이었다. 엇나가는 몇몇 대신들의 안건도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꽤 오랜만에 수면으로 올라온 조세 감면 얘기에 우찬이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귀족 대신 대부분이 백성들의 조세 감면에 얼마나 예민한지 잠깐 잊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대들이 하고 싶은 말은, 세금은 그대로 받고 구멍 난 백성들의 곳간은 황궁의 재산을 떼어 메꿔라, 이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오라…….”
“짐이 듣기에는 딱 그렇게 들렸네만. 안 그런가 승상?”
“예 신이 듣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차란이 태연한 얼굴로 단상 아래의 대신들을 훑어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들 못 먹을 거라도 먹은 얼굴로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연신 손부채를 했지만 대꾸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곡창지대가 많은 지역의 지방관들이 눈에 띄게 울상을 지었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당연히 피해가 막심했을 농가에서 세금을 거둬들이지 못하는 게 그들에게는 비보다 더 끔찍한 피해였다. 새된 표정으로 주안 밖의 지방에선 비가 금세 그쳤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얼굴이 풀리지 않는 대신들을 더 몰아붙일 수도 있었지만 우찬은 그쯤 해 두기로 했다. 능력도 없이 대물림받은 권세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버러지들이 황궁에 너무 많았다. 진작 솎아 냈어야 할 것들을 너무 오래 방치하고 있었다.
금국 전체를 혼비백산하게 만든 비는 아직 추적추적 그칠 줄을 몰랐지만 한자리에 모인 대신들이라고 이를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부랴부랴 황궁과 민가마다 조치를 취하고 있기는 하다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피해 상황도 다 알지 못하는데 복구에 관해 결정을 내리기도 어려울 터. 비에 대한 안건이 지지부진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찬이 자세를 고쳐 앉는 걸 보고 이만 회의가 끝났다고 생각한 대신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우찬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표정이 더 차갑게 식었는데 이제부터 꺼낼 이야기 때문인지 옆구리에 퍼지는 통증 때문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무암궁의 귀비에 대해 논의할 것이 있는데.”
“귀비 마마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신 것이옵니까?”
다들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우찬을 올려다봤다. 이민족 출신의 여인이 탐탁지 않기는 모두 매한가지였지만 우찬이 정인이라고 추켜세운 이상 떠받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 폐하 존체께서 편찮으신 게 귀비 마마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누군가 슬그머니 꺼낸 얘기에 대신들의 고개가 움직였다. 중추원 소속의 종2품 관직 판원사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피하며 몸을 움츠렸다.
판원사의 말이 그럴 듯했는지 대신들이 낮은 탄성을 터뜨리며 다시 우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의심 많은 작자들이 올려다보는 눈빛이 불쾌했다.
“이틀간 대전 회의를 미룬 것은 단지 짐이 고뿔을 심히 앓았을 뿐 귀비와는 관련이 없다.”
우찬이 자기 입으로 고뿔에 걸렸다고 인정한 것을 무척 이질적으로 느낀 대신들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조금 커진 것이니 빗소리가 커진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대충 묶어 올린 머리카락이 아래로 느슨하게 흘러내렸다. 이설 못지않게 많이 기른 머리카락 끝을 만지며 우찬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귀비는 본래 짐의 정인이 아니니까.”
이번에는 확실히 빗소리와 구별이 가능한 소음이 대전을 가득 메웠다. 화들짝 놀란 대신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냈다. 우찬은 무시하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귀비의 손목에 짐의 이름은 가짜다. 요즘은 돈만 주면 누구든 원하는 이름을 새길 수 있는 세상 아닌가? 돈에 눈먼 관리들이야 황궁에 널렸으니 그중 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를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래 봐야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심드렁한 말투로 우찬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내리깐 눈으로 왼손에 감긴 흰 천을 보다 뒤집어진 소매 아래로 이설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이제 보니 글씨가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귀비는 처음부터 짐에게 접근할 목적으로 입궁을 한 것이다. 동족들이 금국을 침략할 수 있는 궁의 내부 정보를 알아채기 위함이었지.”
“그렇다면 페하께선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런 셈일 수도.”
우찬은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탐탁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귀비 마마를, ……정인으로 추대하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와 밝혀진 귀비를 높여 부르고 싶지 않은 대신 하나가 아랫입술을 앞니로 꽉 깨물었다 물었다.
사실 귀비를 정인으로 공표할 때부터 대신들의 사소한 불만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귀비가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여느 타국의 평민이었다 해도 못마땅한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을 텐데 하필 이 시국에 이민족 출신이라니 다들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다만 정인은 천명이라 대신들은 물론 궁인 대부분은 거슬리는 기분을 감출 뿐 나서서 반발할 수는 없었다.
“그대들도 기억하겠지만 당시 궁 밖에서는 소의가 이민족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단지 짐의 정인이라는 이유로, 미천한 것들에게 목숨을 위협받았지. 그래서 잠시 그들의 눈을 돌릴 곳이 필요했네. 뭐, 결과적으로 모든 이민족이 속아 넘어간 건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따지자면 실패에 가까운 계책이 아니었나 싶다. 귀비가 한패를 먹은 이민족들은 이미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물론 이민족들 간에 정보 교환이 빠르지 않고, 붙잡아 들인 이민족 포로들을 심문한 결과 귀비가 거짓으로 궁에 들어온 것도 몇몇 측근들만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그 덕에 이설을 쫓는 추격자들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쨌든 이설은 그들 때문에 여러 번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계책으로 인해 이설은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도 모르는 오해를.
“귀비를 정인으로 공표하며 천명 제를 주관했던 무녀도 가짜다. 귀비가 오래전 심어 놓은 이민족 출신의 여인이었다. 무녀는 불에 타 죽었으니 살아생전 했던 언령도 무로 되돌아갔다. 짐의 정인은 처음 천명했던 그대로다.”
웅성거리는 말소리로 다들 놀라는 기색을 보였지만 귀비의 말로가 좋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미 만연한 탓에 아연실색할 정도로 티를 내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황궁 코앞이라지만 전시 중에 민심을 달랜다는 이유로 황궁 밖에 귀비를 내놓는 것부터가 아무리 봐도 정이 없어 보였다.
그 후로는 무암궁에 귀비를 보낸 것도 그게 보호하기 위함인지 가둬 두기 위함인지 대신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제 다들 그간 귀비가 무암궁에 강제로 갇혀 지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우찬은 대신들이 작금의 상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며 차란을 봤다. 차란은 정인에 관한 잦은 번복이 가져올 부정적인 상황을 걱정했다. 우찬은 적어도 대신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별 곤란함이 없지 않았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저 그런데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수군거리는 낮은 소음을 가르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우찬을 불렀다. 우찬이 느리게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차란은 괜한 말을 꺼내려는 대신에게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좌우로 짧게 저었다.
“소의 마마께옵서는 여전히 폐하의 이름을 갖지 못하신 게 맞사옵니까? 만약 그렇다면,”
흰 수염이 길게 난 저 학사는 천지명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작자다. 고지식하고 눈치가 없는 데다가 평생 학문 정진만 힘쓴 탓에 황궁에 피고 지는 소문에는 아는 바가 없었다.
학사는 우찬에게 질문을 던진 뒤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지레짐작으로 말을 계속했다.
“소의 마마 역시 폐하의 천명이 아니실 수도 있다는 소신의 미천한 소견을 들어주시옵소서.”
그 순간 장내에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할 위인이 없었다. 설마하니 그런 소리를 우찬의 면전에, 그것도 수십 대신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할 것을 예측하지 못한 차란이 사색이 되어 우찬을 쳐다봤다.
우찬은 이미 아까 전부터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다 못해 얼음장같이 서늘했는데 그 때문에 별 표정 없이도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만 크게 진노하지도 않았다.
“자네의 그 미천한 소견의 근거가 뭔가.”
“마마께서 입궁하신 지 벌써,”
“들을 가치가 없는 얘기입니다, 폐하.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차란이 허리를 숙여 우찬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학사가 잠시 말을 끊었고, 차란이 간절한 눈빛으로 가까이서 우찬을 마주했다. 좌우로 떨리는 눈동자가 고개를 대신하는 듯했다.
“계속해라.”
하지만 우찬은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학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입궁하신 지 벌써 달포가 지나셨다 들었습니다. 그간 두 분께서 함께 지내신 시간도 길었을 테고요.”
학사는 우찬이 그렇다, 아니다, 하며 대답해 주길 기다리는 듯했지만 우찬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학사는 그것 역시 자기 짐작이 맞는다고 가정하기로 하고 말했다.
“만약 두 분이 정말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신 한 쌍의 반려가 맞으시다면 지금쯤 마마께서도 폐하의 이름을 받으셨어야 합니다.”
“굳이 이름을 나눠 가지지 않은 연인들도 많다고, 비상한 학자들과 오랜 고문서들은 그리 말하던데.”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모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입니다.”
학사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마디면 그 뒤에 무슨 말이 뒤따라 붙어도 용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놓고 기함을 토하는 대신들은 우찬이 터지기 전에 한시바삐 대전을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이설의 우찬의 진짜 정인이 맞고 틀리고 간에 우찬이 이설을 어여삐 여긴다는 것은 황궁 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여삐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궁에 가둬 제 눈 밖에 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사람을 지금 누구 앞에서 정인이 아니니 뭐니 하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학사 본인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이설의 존재 자체를 모욕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우찬이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정인은 소의가 맞다, 라고 천명한 이상 그게 맞든 아니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당연지사였는데 학사만 혼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명의 징표는 서로 간의 나눈 이름 하나뿐이온데, 한쪽만 징표를 가진다면 그 어찌 두 사람을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