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67화
“폐하 너무 빨리 걸으시면 빗물에 옷이 다 젖습니다. 걸음을 조금만 늦추시옵소서.”
다시 걷는 속도를 높여 평소대로 걸었는데 뒤따라오는 궁인들이 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앞서 나간 발은 이미 빗물에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금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우찬도 비 오는 날 걷는 것을 무척 꺼렸지만, 오늘은 딱히 거슬리는 게 없었다.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다른 일들은 차치하고 이설 하나만 두고도 골치 아픈 것투성이다. 옆구리에 상처를 봉합해 둔 것이 터졌는지 통증이 유달리 심해졌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연이설은 뭘 하고 있더냐.”
“의술에 관련한 서책을 보고 계셨습니다. 폐하께서 준비해 두셨던 서책들 중 한 권입니다.”
“다리는 아직 불편해 보였느냐?”
“왼쪽 다리를 아직 절고 계시긴 하셨습니다. 거동도 불편하신 분이 비 구경을 하러 나가고 싶으시다 하여 그것은 늙은이가 잘 말렸습니다.”
“비 구경?”
“예. 금원에서 혼자 조용히 비 구경을 하고 싶으시다 합니다.”
이와 중에 비 구경을 하고 싶다 하니 달라진 게 없다 흡족해야 할지, 혼자만 저리 태평하다 억울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함께 긴 시간을 보냈던 우장절부터 특이하기는 했다.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창문을 열고 내다보는지. 금국의 여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수신의 괴담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는 것은커녕 창문을 열어 두는 것도 꺼리는데 이설은 그게 뭐 좋은 것이라고 늘 밖을 내다보고 싶어 했다.
우찬 역시 그런 되지도 않는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우장절에 창문을 닫아 두는 것은 빗소리가 시끄럽고 물 먹은 풀 비린내 냄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수신이 잡아가도 모르겠구나.’
고집에 못 이겨 잠깐 창문을 열게 해 준 때가 있었다. 이설은 창문턱에 팔을 걸치고 비가 내리는 자신의 후원 풍경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우찬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이설의 정취를 감상했다.
‘아니면 수신이 잡아가길 네가 기다리고 있거나.’
일부러 면박을 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그날은 기분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이설 때문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설은 사색이 된 얼굴로 뒤를 돌아 우찬을 봤다. 그리고는 허둥지둥 창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앉혀 놓으면 서책을 든 채로 꾸벅꾸벅 잠들기 일쑤였던 우찬의 앞자리였다.
‘왜? 더 구경하지 않고?’
가만 놔두면 그 앞에서 밤이라도 셀 것 같던 이설이 먼저 자리로 돌아오기에 의아해 물었더니 도리질을 쳤다. 목소리가 없던 시절의 이설은 남들이 보면 기함을 토할 행동을 곧잘 했다.
물끄러미 이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우찬은 별생각 없이 뱉은 가벼운 농담을 이설이 무겁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설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 말고는 농담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찬의 말 한마디조차 그냥 흘려듣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이설이 이제 와 유독 안쓰러웠다.
시무룩해진 얼굴로 다시 지루한 서책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설을 달래 주었어야 했다. 찬바람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살펴보며 고뿔이라도 걸린 것은 아닌지 혀를 차는 그 마음이 뭔지도 모르고 이설을 너무 오랫동안 아무렇게나 방치했다.
“그럼 폐하의 침소에서 창문을 열어 놔도 되냐고 여쭤보시기에 그것은 허락해 드렸습니다. 괜찮으시지요?”
쓸데없이 소심하기는.
우찬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윤 내관은 그게 허락인 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귀만 따가운 장대비 떨어지는 소리를 왜 그리 좋아하시는지 참.”
너털웃음을 털어 내는 윤 내관의 혼잣말을 듣다가 문득 뭔가 거슬렸다.
“그런데 왼쪽 다리를 절었다고?”
“예. 걱정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아직 거동이 불편하신 듯합니다.”
“원래 다쳤던 게 왼쪽 발이었나? 오른쪽이 아니라?”
“송구하오나 거기까진 잘……. 발을 다치셨고 늘상 누워 계셨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제 옆에나 붙어 있는 윤 내관이 이설이 어느 쪽 발을 다쳤었는지 알고 있기는 어렵다.
우찬 역시 이설이 다친 것을 본 적은 없다. 상궁과 태의의 얘기를 전해 들었을 뿐이다. 어떻게 하다 다쳤는지도 정황이 가물가물했다. 깨진 사기 물 잔을 맨발로 밟아 다치기도 했고, 목욕을 하다 쓰러지며 접질리기도 했다. 며칠 전 밤중에 난 소동으로 다쳤을 수도 있다. 이설만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신경을 쓰긴 했지만 이설은 좀처럼 제 몸 돌볼 줄을 몰랐으니까.
아무튼 하도 사고가 많았던지라 언제 어떻게 다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의 말로는 항상 오른쪽 발을 치료해 주었다던데.”
의심스러운 우찬의 말에 윤 내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까? 신이 보기에는 분명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셨는데요. 뒤꿈치를 들고 이렇게요.”
윤 내관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시늉을 보이며 왼쪽 다리를 절뚝거렸다. 고인 빗물이 옆으로 크게 튀는 바람에 신에 흙탕물을 옴팡 뒤집어쓴 차란이 윤 내관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태의가 말하기를 분명 오른발이라고 했습니다. 오른발 복사뼈 안쪽이라고요.”
“암만 이 늙은이 눈이 오늘내일해도 오른쪽 왼쪽 구별을 못 하겠습니까? 왼쪽이 맞습니다.”
단호하게 부정한 윤 내관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차란을 등졌다.
태의는 며칠 동안 퇴궐도 하지 못하고 우찬과 이설의 침소를 드나들며 상태를 보고 있다. 늙기도 많이 늙은 데다 무리하게 진찰을 보고 있으니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 해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좌우지간 침상에 누워만 있던 이설이 절뚝거릴지언정 걷기 시작했다니 다행이다.
우찬은 이미 상처가 터져 벌어진 것 같은 자기 옆구리 언저리를 무심결에 만지며 생각했다.
갑작스레 내린 비로 인해 입궁하지 못한 대신들도 있다더니 그 수가 눈에 띄게 많았다. 대전 자리마다 듬성듬성 생긴 공석을 하나하나 눈으로 살피며 자리에 앉았다.
“험한 길 오느라 다들 수고 많았네.”
순전히 겉치레로 하는 말이었지만 실제로 대신들 제각각 모습마다 수고 많은 길을 온 고생의 흔적이 역력했다. 먼지 하나 없이 매끈하던 대전 바닥이 흙탕물로 지저분했다.
“고뿔을 심히 앓아 태금궁에 정양 중이신 줄로 들었습니다, 폐하. 존체 무탈하시옵니까?”
사마 육추명이 조심스레 묻자 다들 곁눈질로 우찬의 안색을 살폈다. 하루 이틀 사이 낯빛이 안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홀쭉해진 얼굴이 멀리서 봐도 좋아 보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였다.
우찬이 몸이 안 좋아 며칠 본궁에서 요양을 한다 했을 때 다들 긴가민가한 분위기였다. 차라리 다쳤다고 하면 모를까 몸이 안 좋다는 말은 우찬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찬을 확인한 직후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신경 쓸 것 없다. 그보다 긴히 논의할 사안들이 많을 텐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아니면서 실속 없이 물어보는 안부를 단번에 잘랐다. 육추명은 무안한 듯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옆에 서 있던 상서령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상서령이 좌우 눈치를 살피며 한걸음 나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은 사이 민가에서 입은 피해를 구구절절이 읊었다. 뭐가 그리 많은지 우찬이 그만하라 손을 들었을 정도였다.
“인명 피해는 어느 정도지?”
“야밤에 하천에서 그물을 치던 부자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 종적을 잃은 게 전부입니다. 비가 쏟아지기도 전에 다들 집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했으니 다행이지요.”
“그것보다 황궁 내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폐하.”
바로 옆에서 잠자코 있던 사공(司空:국가의 대사를 관장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수리와 토목을 담당) 최삼흥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상서령은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새로 조축을 하려고 쌓아 둔 토산이 무너져 내려 주변 담장들을 죄다 덮쳤습니다. 조축은 둘째 치고 올해 안에 무너진 담장을 재축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습니다. 비은궁 후원이 흙더미에 깔린 것만 생각하면…….”
최삼흥이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별 감흥 없이 얘기를 듣던 우찬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비은궁 담장도 무너졌느냐?”
“예 후원 담벼락이 아주 폭삭 무너져 내렸습니다. 마마께서 궁을 비우셨으니 다행이지 정말 큰일 날 뻔하지 않았겠습니까?”
비은궁 얘기가 나오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마른기침을 하며 우찬의 눈을 피했지만 무슨 속셈인지 최삼흥만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마마께서 그 꼴을 보신다면 아마 놀라 까무러치실 만큼 엉망입니다.”
“소의는 비은궁으로 돌아갈 일이 없으니 상관없겠는데.”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몸을 기울인 우찬이 슬며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긋한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를 또렷하게 들은 것은 바로 옆에 서있던 차란과 윤 내관 그리고 호위군 몇 명이 전부였다. 차란이 고개를 정면을 향해 고정한 채 눈동자만 옆으로 밀어 우찬을 봤다.
애지중지 가꾼 후원이 무너진 담벼락과 쏟아진 흙들에 엉망이 됐다니 이 소식을 듣는다면 이설이 무척 슬퍼할 것이다. 이참에 비를 핑계로 비은궁을 허물어 버릴까 생각을 했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더는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겠지. 효과가 있다면 굳이 연국 역시 남겨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치지 못하는 이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뜨거워졌다. 오갈 데 없는 이설이 결국 기대 의지할 곳은 자신밖에 없는 세상이라니.
“하여 비가 그치면 비은궁을 우선적으로 재축할 계획인데 폐하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제야 최삼흥의 속내를 눈치챈 대신들이 아차 싶은 얼굴에 고까운 표정을 애써 감췄다. 본격적으로 이설의 편에 붙어 설지 말지를 한 걸음 멀리 뒤에서 간을 재고 있던 차에 한발 늦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와중에 아직 귀비에게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몇몇 대신들만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찬이 팔걸이에 양각된 봉황의 깃털을 따라 손가락을 그었다.
어떻게 할까.
연이설의 궁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그 발목을 영원히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