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65화
“밤공기가 점점 차가워지는 것 같아 들인 것인데 비까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다들 많이 당황한 모양입니다. 새벽 내내 궁인들이 많이 분주했습니다.”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
“그냥 좀 일찍 눈이 떠진 것 같습니다. 비는 아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까?”
밤새 자지 않고 뭘 하고 있었느냐고 추궁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설은 곤란해진 시선을 피하며 화제를 돌렸다. 속 편히 잘 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 벌어진 상황들은 생각하면 그렇게 태평하게 잠이 올 수가 없었다.
“예.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빗줄기가 어제보다 더 거세진 것 같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 탓은 확실히 아니었다. 빗속에 있으면 눈앞에 사람이 있어도 빗줄기에 가려져 얼굴 구별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졌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주안 온 거리에 물이 넘쳐 범람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대전에서 있을 귀비에 대한 논의는 그렇다 치고 빗발치듯 올라올 다급한 상소들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찔해졌다.
“큰일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비가 쏟아지다니요.”
굳게 닫힌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설이 걱정스레 말했다. 물끄러미 이설을 바라보던 차란은 묘한 이질감을 콕 집어 구분해 내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뭔가 상당히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폭우가 쏟아지는 걸 이설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은 저 태도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이상했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승상도 고생 꽤나 하셨겠습니다.”
“말도 마십시오. 여기 눈코입 말고 물에 안 젖은 곳이 하나 없습니다.”
“퇴궐하는 길에는 부디 비가 그쳐야 할 텐데요.”
“그러길 바라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신당의 무녀가 급히 하늘 제를 올릴 준비를 한다 하니 거기에 기대를 걸어 보는 중입니다. 이 기세로 하룻밤만 더 비가 왔다 간 황궁은 물론 주안 전체가 떠내려가게 생겼습니다.”
우스갯소리로 과장을 하며 차란이 화로 가까이 다가갔다. 새로 불을 넣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열기가 상당했다. 쇠꼬챙이를 잡아 숯을 한 번 잘 섞은 뒤 손에 불을 쬐었다. 몸 안에 차오르는 따뜻한 공기에 갑자기 노곤하게 잠이 오는 기분이 들었다. 체온 좀 올라갔다고 갑자기 몸이 나른해질 리가 없을 텐데, 생각하며 무의식중에 주변을 둘러보자 한쪽에 반쯤 탄 향초가 보였다.
“아직 향초를 피우시나 봅니다?”
“그게 없으면 발목이 욱신거려 잠들기가 어렵습니다.”
이설이 발목을 다쳤었던가. 욕탕에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발목을 접질리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살짝 가물가물했다. 하여간 이설은 궁에 돌아온 뒤로 걸핏하면 쓰러지고 아프고 앓아눕는 통에 몸 성할 날이 없었다.
향초를 흘끔 쳐다보며 이설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차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미 독성이 강한 향초에 몸이 많이 상하신 상태라 폐하께서 마비 작용이 있는 향초의 사용을 자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의가 잔소리를 한소끔 쏟아 내고 갔습니다.”
이설이 어색한 웃음을 억지로 지어 보이며 이마를 쓸었다. 그리고는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샐쭉 웃어 보였다.
“딱 그 향초가 다 닳을 때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얀빛처럼 부서지는 웃음에 티끌만큼의 더러운 것도 묻어 있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맞닥뜨린 웃음에 순간 할 말을 잃은 차란은 화로 안에 꽂아 둔 쇠꼬챙이를 집으려다 말고 이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단단한 오해로 중무장을 한 뒤 고집스럽게 억지를 부리던 어제와는 달리 완전히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태의는 제가 잘 말해 놓았으니 승상이 폐하께 말씀만 드리지 않으면 됩니다. 아시겠죠?”
다시 샐쭉 웃는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화사했다. 비록 피골이 상접한 몰골에 머리가 다 헝클어지고 기운 없이 앉아 있는 모양새였지만 본래 단정하고 아담한 자태는 그대로였다. 처연한 분위기가 더해져 웃는 모습이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은 것만 빼면 이설은 그대로였다.
갑자기 무겁게 짓눌리던 어깨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명치를 꽉 막고 있던 돌 하나가 빠지며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 같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내일부터는 절대 피우시면 안 됩니다. 아셨죠?”
“명심하겠습니다.”
태의와 차란, 두 사람의 허락을 받고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이설이 고개를 돌려 숨을 길게 내쉬어 안도했다. 차란은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웃으며 쇠꼬챙이로 화로 안에 숯을 뒤적였다. 쇠꼬챙이인 줄 알았는데 끝이 납작한 인두였다. 이설의 포단 안을 데우려고 사용했던 걸 그대로 화로에 꽂은 모양이었다.
필요한 건 없느냐는 물음에 이설은 망설인 끝에 상궁이 자꾸 들락날락하여 신경이 쓰인다고 몰래 귀띔해 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기분이나 몸 상태를 살피는 것 같은데 조용히 서책을 읽는 데 방해가 된단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어지간하면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무척 미안해하는 것이 다분히 이설다웠다.
“상궁에게는 제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넌지시, 마마께서 시키신 것 같지 않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게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공손히 청을 하는 이설을 보는 게 퍽도 오랜만이다. 마주 웃던 중 아까 금위대장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말을 전해 줄까 말까 하다가 티는 내지 않아도 아직 걱정이 많을 이설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한 가지 마마께도 전해 드릴 말씀이 있는데, 비은궁 궁인들 말입니다.”
“제 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순식간에 낯빛이 파리해진 이설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저러다 그대로 졸도라도 할까 싶은 차란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신은 그저 궁인들 모두 무사히 잘 지내고 있다 말씀드리려고 하였습니다. 마마께서는 다른 일에 너무 심려치 마시고 건강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하셨으면 합니다.”
“그렇습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요.”
다시 고상하게 웃는 이설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정말 우찬이 비은궁에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던 걸까. 차란은 궁금증이 일었지만 말을 아꼈다.
안부 정도는 알았으니 슬슬 자리를 비켜야 할 것 같다. 내색하지 않는 이설이지만 어쩐지 자신이 있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비도 오고 울적하니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화롯불에 건조하게 마른 손을 털었다.
이설이 책장 한 칸에 있는 서책을 모두 꺼내 달라 부탁을 하기에 들어주었다. 협탁에 쌓아 놓은 서책들 중 맨 위의 것을 펼치며 이설이 의연하게 물었다.
“이제 폐하를 뵈러 가십니까?”
“예, 갑작스런 비로 전해 드릴 말씀도 많고 안부도 여쭙고 겸사겸사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선 순조롭게 회복 중이시랍니다.”
“그러시군요. ……안부 전해 주십시오.”
잠시 망설이던 이설이 짧게 부탁했다. 그 안에 집약된 오만 감정들이 어떤 것인지 차란은 다 알아차리지도 못했지만 미움과 원망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그러겠습니다.”
활짝 개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고 나온 차란이 상궁을 찾았다. 이설의 부탁대로 적당히 얘기를 둘러대 상궁이 침소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게 말을 전한 뒤 우찬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먹은 덧신이 점점 말라 가기 때문인지 괜스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간밤에 코를 찌르던 물비린내가 착각은 아니었다. 막연히 밖이 시끄럽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게 빗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 누웠던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자 바람과 함께 빗줄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침 윤 내관이 안으로 들어왔다가 질겁을 하고 창문을 닫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며, 오래 가지 않을 거라던 윤 내관의 말이 무색하게 비는 한밤중 그리고 새벽을 지나 아침까지 이어졌다. 기세로 봐서는 쉬이 물러날 게 아닌 것 같았다.
궁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진 것이 들리지는 않았지만 눈에는 선했다. 갑작스러운 비에 대비가 되어있었을 리 만무했다. 우장절 동안 어디든 벽과 지붕이 있는 곳에 꽁꽁 숨어 있기 바빴던 사람들이 지금쯤 혼비백산하여 정신없을 게 우스웠다.
“신당 앞에 급히 제단을 쌓는 중입니다. 새로 신을 받은 무녀가 첫 제를 올릴 예정인가 봅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흑영이 돌아왔다. 밖이라도 나갔다가 왔는지 여기저기 물이 튀어 젖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탁자에 팔을 걸치고 상소문들을 읽던 우찬은 슬쩍 눈을 돌려 봤다. 혼자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누워 계시지 않고 뭘 하시는 겁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게 구는 차란을 한 번 노려본 뒤 읽던 상소문을 발치에 던졌다. 화들짝 놀란 차란이 뒤로 물러나며 수선을 떨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상소문을 들어 읽은 뒤 찜찜한 듯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주안의 하천이라는 하천은 죄다 물이 불어 나룻배 하나도 띄우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날아오지 않는 이상 오늘 내로 입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인생 말년에 운도 좋지. 황궁을 코앞에 두고 하천이 넘쳐 건너오지 못한다는 손조익의 소식이 그리 언짢을 수가 없었다. 시간을 오래 끌어 봤자 손해 보는 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직 우찬이 자신을 왜 이렇게 황궁으로 불러들이려는 건지 눈치를 못 챈 것 같다.
우연히 찾아낸 밀서의 존재를 알지 못하니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그러고 보니 그날 이설이 암어를 해독해서 새로 써 준 서신을 잊고 있었다. 입고 있던 장포 소매에 넣어 놓은 것 같은데 기억이 흐릿하다. 확실히 별로 뇌리에 남아 있는 기억은 아니다.
“연이설이 밀서의 암어를 해독해 줬었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탁자에 펼쳐진 상소문들을 빼꼼히 쳐다보던 차란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럴 여유가 없으셨을 텐데요?”
“소운에게 밀서를 받은 다음 날 이미 끝냈던데.”
“읽어 보셨습니까? 해독한 밀서는 어디에 있습니까?”
“모르겠군.”
그렇게 궁금하던 내용의 밀서였는데 이설에게 건네받은 당시에는 읽어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그게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우찬을 보고 차란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마마를 뵈었을 때 여쭤보는 건데 그랬습니다.”
다른 상소문의 끈을 막 풀던 우찬이 차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연이설에게 다녀오는 길이냐?”
“잠깐 뵈었습니다, 잠깐.”
차란이 유독 잠깐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대답했다. 눈치 보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애초에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었던 듯하다. 흑영이 왜 쓸데없는 얘기를 꺼냈냐는 듯 불만스러운 눈길로 흘겨봤다.
“마마께선 잘 지내고 계십니다. 오늘은 아침 식사도 거르시지 않은 것 같았고요.”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이후로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막상 잘 지낸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동시에 이깟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변덕과는 거리가 먼 자신이었는데 이설만 생각하면 기분이 위아래로 솟구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