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63화
타닥거리며 타들어 가는 숯의 온기가 금세 침소를 데웠다. 춥지 않아 괜찮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서늘한 공기가 훈훈해지니 몸이 노곤 노곤해져서 금방 잠이 들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잠깐 선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 한 정신에 눈꺼풀이 무겁게 움직였다. 정신이 금방 돌아오는 걸 보니 깊은 잠은 아니었나 보다. 어둑한 방에 아직 꺼지지 않은 화롯불이 희미한 불빛을 내며 타들어 갔다.
“아이고 이를 어째! 기름병도 다 날아갔네!”
“상궁 마마님, 밖에 매달아 놓은 등이 다 젖어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이를 어쩔까요?”
“쉿. 목소리 낮추거라.”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밤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문밖을 쩌렁쩌렁 울렸다. 상궁의 일갈에 목소리는 잦아졌지만 여러 사람의 발소리는 여전히 요란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좀처럼 야단법석을 떨지 않는 태금궁 궁인들이 밤늦게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이상했다.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걱정스레 일어나 바닥에 발을 댄 순간 뭔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크, 야밤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얘 이리 와서 불 좀 가까이 비춰 봐. 이 많은 걸 어느 세월에 안으로 다 들여놓는다니?”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창밖으로 불빛 하나가 일렁이고 있었다. 투덜거리는 궁녀들의 목소리 너머로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잠결에 뭘 잘못 들었나 싶은 이설이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아픈 척 태의에게 보여 주었던 오른쪽 발목으로 몸을 지탱하고 선 뒤 절뚝이며 창가에 기대섰다. 문고리를 잡아 열자 밖에 삼삼오오 모여 있던 궁녀들이 까무러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희가 너무 소란을 피운 바람에 마마께서 잠이 깨신 것 같은데, 송구하옵니다.”
들고 있던 우산을 내팽개치고 바닥에 넘어진 궁녀가 젖은 흙을 털어내며 황급히 일어났다. 우산과 등불을 든 궁녀 한 명과 화살을 잔뜩 짊어진 궁녀 한 명이 한 조처럼 우산 아래 서 있었다.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우산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모두 막는 건 무리였는지 다들 어깨 아래가 빗물이 푹 젖어 있었다.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이 시간에 비라니.”
“저희도 통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부터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처마 밑에 말려 놓은 폐하의 화살들을 거두러 나왔습니다. 침수 드시는 데에 방해되지 않게 할 테니 마마께선 어서 창을 닦고 들어가 쉬지요.”
“우장절도 아닌데 비가 오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일인가?”
이설이 처마 끝에서 줄줄 흐르는 빗물을 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사실 대답은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요. 스무 해 제 평생에 처음 보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원.”
모두들 같은 생각인지 한 몸처럼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얼굴들을 보며 새삼 금국 사람들이 비가 내리는 것을 얼마나 부정하게 여기는지 깨달았다.
궁녀들과 달리 간만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상쾌해진 이설이 창밖으로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처마에 가려진 탓에 비가 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비를 먹은 풀냄새가 진동해 좋았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 마당에 금원에 나가 비 구경이라도 할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남들이 보면 자신을 얼마나 손가락질할까? 멀쩡한 황제를 병상 위에 저 사달을 내놓고 태평하다 얼마나 욕을 할는지 눈에 선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다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쯤 민가도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겁니다.”
궁녀들이 하나둘 걱정 어린 목소리를 하며 울상을 지었다.
“가뜩이나 폐하께서 앓아누우신 것도 모자라 비까지 내리다니, 이제 이 나라도 국운이 다했다고 다들 푸념이 많습니다. 뭔가 들여서는 안 될 것을 궁에 들인 게 틀림없다고…….”
그러다 갑자기 한숨과 함께 토로하는 목소리에 놀란 궁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한 궁녀를 바라봤다. 가장 앳되어 보이는 궁녀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타 어린 눈빛을 알아채고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소, 송구하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라, …이, 이 년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팔을 거두며 이설이 무감정하게 어린 궁녀를 바라봤다. 신경 쓸 것 없다며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찰나에 한 조로 서 있던 옆에 궁녀가 손바닥으로 뺨을 세게 내리쳤다.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버틴 어린 궁녀가 훌쩍이며 눈물을 훔쳤다.
“송구하옵니다. 입궁한 지 얼마 안 된 계집이라 윗분들 앞에서 말조심하는 법을 모르나 봅니다. 다시는 마마 눈에 띄지 않을 테니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 주시옵소서.”
오가며 얼굴을 가장 자주 봤던 낯익은 궁녀가 침착하게 사과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비에 젖은 몸이 추워 그러는 것인지 뭔가 겁을 내기 때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어지간하면 괜찮다 말했을 이설이었지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시선만 아래로 떨궜다. 궁녀들이 제각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로 눈치를 봤다.
“비는 곧 그칠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이만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맞습니다, 마마. 비 오는 날 밤에 창을 열어 두면 수신이 몰래 데려간다는 얘기 들으셨지요? 얼른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이설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손을 내저은 궁녀들이 창을 닫아 버렸다.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화살을 걷어 챙기는 궁녀들의 자잘한 말소리가 들렸지만 빗소리 때문에 정확히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잠깐 창을 열어 놓았다고 몸이 금세 차가워졌다. 창문을 닫고 나서야 약간의 한기를 느낀 이설이 화로 앞에 둔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절뚝이는 걸음이 아직 불편했지만, 첫날만큼 아프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통증을 마비시켜 주는 향초나 약초라도 준비해 일을 치렀을 텐데 앞뒤 분간 않고 무작정 실행에 옮긴 자신을 한탄했다.
이설은 왼쪽 발을 올려 반대쪽 허벅다리 위에 척 걸쳤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뒤 발목을 덧댄 천을 풀었다.
하.
불에 댄 것처럼 흉이 진 살갗 위로 붉은 이름이 아직 선명했다.
멍하니 그 이름을 쳐다보던 이설이 눈물방울을 굵게 뚝 흘려냈다. 처음 한 방울을 시작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발목의 움푹 팬 곳에 고여도 이름은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힘이 빠진 다리가 스르륵 풀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번쩍 깨우는 고통도 크게 충격적이지는 못했다.
흐느껴 우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도 제 귀에는 다 들렸다.
‘폐하께서는, 마마를 진심으로 연모하십니다.’
애써 지우려고 노력하던 차란의 말이 귀를 울렸다. 괴로워하던 목소리가, 자신을 원망하는 눈빛이 아직 선명했다. 아직 모르는 것이냐고 질타하는 듯한 그때의 숨 막히는 분위기가 다시금 이설의 목을 옥죄였다.
애써 모른 척했지만 이제 와 어쩔 수 없이 후회한다. 우찬의 연심을 그렇게 매정하게 부정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설령 우찬의 감정이 가짜일지라도, 제가 아닌 어떤 ‘연이설’을 연모했을지라도 그래서는 안 됐다.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앞뒤로 꽉꽉 막힌 제 사정만 둘러보다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었다. 이깟 이름, 발목을 잘라 내서라도 없애면 그만인 것을 우찬에게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품에 안아 달라 떼를 쓰고 애원해도 모자를 판에 왜 그런 주제넘은 짓을 벌였을까.
‘그래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마.’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우찬은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우찬이 웃었던가? 새빨간 입술로 긴 호선을 그리며 우찬은 분명 웃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 괜찮을 거라는 듯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웃으며 제 어깨에 쓰러졌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도 우찬은 따뜻하게 웃어 주는 법이 없었다.
‘잘 모르시겠지만, 폐하께선 마마 앞에서만 웃음이 헤퍼지십니다.’
장난스레 말하던 차란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이설은 그런가요,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렸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우찬이 자신과 눈이 마주칠 때면 얼마나 환하게 웃어 주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했다. 불완전한 둘의 사이를 믿지 못했고,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 같은 우찬이 늘 불안했다.
폐하께서 나를 진심으로 연모하신다.
갑자기 벅차오르는 가슴이 뜨거워지며 온몸에 열기가 달아올랐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생각에 모든 감정이 훅 가라앉았다. 우찬이 눈물과 함께 고백했던 때에도 느껴 보지 못했던 경이로운 설렘이 갑자기 모든 감정을 압도했다.
세차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뒤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우찬을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이설은 물끄러미 제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화롯불 안쪽을 들여다봤다. 불붙은 숯 사이로 기다란 쇠꼬챙이가 꽂혀 있었다.
“마마, 아직 안 주무시고 거기서 뭘 하십니까?”
그때 기별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침소로 들어온 상궁이 화롯불 앞에 앉아 있는 이설을 보고 깜짝 놀라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손에 든 걸 보니 화로에 숯을 채우기 위해 들어온 모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아 생각 중이었다며 이설이 두루뭉술하게 변명을 했다. 상궁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설을 일으켜 세워 부축해 자리에 눕혔다.
“시간이 한참 늦었습니다.”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습니까?”
빗줄기 소리가 더 세차진 걸 뻔히 들으면서도 괜히 질문을 하며 상궁의 시선을 끌었다. 포단을 위를 정리하던 상궁이 고개를 돌리자 재빨리 발을 포단 안으로 감췄다.
“예, 아직입니다. 기세로 봐선 내일 아침까지도 내릴 것 같은데, 뭐. 내일이 되어 봐야 알겠지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상궁이지만 내심 걱정이 많은 눈치였다. 오랜 세월을 산 상궁이 보기에도 이맘때 장대비가 쏟아지는 게 예삿일은 아닌가 싶었다.
“금국에선 비가 내리는 것이 흉사 중 하나라지요?”
“그저 오래된 미신일 뿐입니다. 뭣 모르는 아랫것이 괜한 소리를 한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 아이는 앞으로 마마 눈에 띌 일 없으실 겁니다.”
방금 전의 일이 상궁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협탁을 가리켰다.
“나가는 길에 저 향초에 불 좀 붙여 주십시오.”
“아직 발목이 낫지 않으셨습니까? 약효는 좋지만 오래 사용하면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태의가 주의하라 하였습니다.”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발목이 욱신거려 잠이 잘 오지 않아 그럽니다.”
어둠에 그늘진 얼굴이 애처롭게 부탁하자 상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초에 불을 붙였다. 깊이 들어오는 향냄새가 벌써부터 머리를 매운 듯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만 나갈 채비를 하는 상궁을 이설이 다시 불렀다. 말씀하시라는 말에 어물쩍거리는 이설의 모습을 보고 상궁이 조용히 대답했다.
“저녁 늦게 깨어나신 뒤 한참 후에 태의의 진료를 받으시고 지금은 다시 침수 드셨습니다. 특별히 위험한 고비는 없을 거라 합니다. 걱정 마시고 마마께서도 푹 쉬십시오.”
그리고는 휙 몸을 돌려 나갔다. 텅 빈 침소에 이설이 희미한 미소로 안도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