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60)화 (260/300)

달의 황홀경

260화

탕약 달인 냄새와 약초 따위를 찧고 빻으며 나는 냄새가 한데 뒤섞여 코를 찔렀다. 당장 이것들을 멀리 치우라고 한소리를 하려던 찰나 옆구리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얼굴을 찡그리기부터 하자 갑자기 옆에서 요란하게 인기척이 났다.

“정신이 드십니까, 폐하!”

흐릿하게 채워지는 시야에 새카만 인영이 아른거렸다. 안도하는 한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강해지는 사이 정신이 서서히 또렷해졌다.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 누워 있는지를 가장 먼저 떠올린 뒤 아득히 먼 곳에 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 머릿속에 펼쳐 놓고 하나하나 살폈다. 하필 기억은 또 왜 이리 선명한지, 정신을 잃기 전 강렬하게 경험했던 감정들이 끼얹은 물처럼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디 불편하신 곳 없으십니까? 태의를 불러오겠습니다.”

조용히 누워 기억을 되씹는 우찬을 보고 흑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우찬이 옆으로 길게 눈동자를 움직이며 흑영을 붙잡았다.

“소란 떨지 말고 가만히 있어.”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 것이 아닌 듯 쩍쩍 갈라졌다. 느껴지기로는 일이 있은 뒤로 길어야 하루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몸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메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흑영이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말렸다.

“옆구리에 상처가 깊어 아직 앉으시면 안 됩니다.”

어깨를 부축하려고 뻗은 팔을 단칼에 쳐 내다가 손의 상태도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칼을 맨손으로 붙잡았던가. 칼날을 타고 길게 흐르던 피가 떠올랐다. 그걸 보며 놀라 까무러치기 직전의 얼굴로 덜덜 떨던 이와 함께.

“상처가 덧나실 겁니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지만, 완전히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미리미리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검을 꽤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살을 가르는 감각이 아직 손에 남아있었다. 힘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손을 다쳤던 바람에 검의 각도가 바라던 것보다 옆으로 삐뚤어진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이설이 그 짧은 순간 무슨 수라도 썼든가.

그런데 아마 아닐 것이다. 이미 그 전부터 이설인 반쯤 넋이 나간 상태라 계산을 하고 수를 쓰고 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우찬과 가까이 마주 앉아서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쫓아가지 못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깨진 백자 조각처럼 창백하게 질린 이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갑자기 극도로 쌓이는 피로감에 온몸이 짓눌려 지그시 눈을 감고 머리를 뒤로 기울였다. 단단한 나무 벽에 닿은 머리에 한기가 스며들었다.

“밖에 태의가 온 것 같습니다. 돌려보낼까요?”

심기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흑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돌려보내겠습니다.”

우찬이 대답이 없자 차란이 내키지 않는 태도로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안을 둘러보니 대충 태금궁이긴 한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곳이다. 알 바가 아니라 곧 신경을 거두고 다시 벽 뒤로 머리를 기댔다.

허리가 접히자 눌린 옆구리가 칼로 쑤시는 것처럼 아프긴 했지만 그런 대로 참을 수는 있었다.

깊게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눈을 감자 칼을 든 이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칼자루를 손에 쥔 자세가 다시 생각해 봐도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어쭙잖게 위협을 하던 그 볼품없는 꼬락서니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지만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웃지 않으면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다시 이설을 찾아가 같잖은 변명이라도 듣고 싶어질 것 같았다.

오죽 싫었으면 주제에 칼을 집어들 생각을 했을까. 울다 쓰러지는 거야 백번도 더 예상한 일이었지만 거기까지는 감히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동요하지 않겠다 백번 마음을 달리 먹어도 이설은 언제나 한발 앞서 행동했다.

그랬던 이설 앞에서 배를 찌른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우찬은 여전히 이설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줄 용의가 있었고, 그것이 고작해야 자신의 죽음이라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만 새벽쯤 잠깐 깨어났을 때 혼자 남은 이설이 다른 이의 손을 타게 될까 하는 생각에 이를 좀 갈았다.

“깨어나셨습니까?”

고요한 정적을 가르고 차란이 불쑥 들어오는 동시에 물었다. 열린 문 뒤로 안절부절못하는 윤 내관과 태의가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봤지만 흑영이 가차 없이 그 앞에서 문을 닫았다.

“허리를 다치셨는데 그리 앉아 계시면 어떡하십니까? 태의가 환부를 좀 봐야겠다 하는데 잠깐이라도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거기다 손은 또 어쩌자고 그렇게 막 쓰신 건지, 원.”

아직 대답 한 번 하지도 않았는데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 내는 차란의 혀를 확 뽑아 버리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 분이 안 풀리는 참인데 검을 한번 제대로 써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만사가 다 귀찮았다. 새벽에 잠깐 일어났을 때 태의가 급히 가져온 환약을 먹었는데 단순히 심신을 안정시키는 것 이상으로 몸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놓고 성가시게 구는 차란을 눈앞에 두고도 우찬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흑영이 흘끔거리며 눈치를 봤다. 차란도 아직 입 한 번 벙긋하지 않는 우찬이 새삼스러웠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렇게 말씀이 없으십니까?”

“내가 다쳐 누워 있는 꼴이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무척 기뻐 보여.”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신이 오늘 새벽 연통을 받고 얼마나 놀랐으면 망건을 뒤집어쓰고 달려왔겠습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차란은 오히려 평소보다 좀 더 목소리 음이 높았는데 그게 꼭 뭔가를 감추는 사람처럼 과장됐다.

“다친 곳은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이제까지 물은 안부는 다소 농이 섞여 든 것처럼 이제야 한껏 심각해진 얼굴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차란과 얘기를 나눴던 것이 기억났다.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득달같이 달려와 연심의 옳고 그름을 운운하며 저를 가르치려 들었다. 주제에 감히, 라며 다시 경을 치기에는 너무 이제 너무 하찮은 일이라 구태여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태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큰 일 날 뻔하셨다 합니다.”

옆구리에 감긴 천을 들여다보며 차란이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급소를 피해 찌르신 것을 훌륭하셨다 감격해야 할지 무모하셨다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슬쩍 눈을 돌린 차란이 제 눈치 보는 것이 느껴졌다. 흑영에게 듣기는 들었는데 제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믿을 수가 없어 괜히 한번 떠보는 것이다.

우찬이 대수롭지 않게 웃음기도 없는 표정으로 태연히 대꾸했다.

“분명 급소를 노려 찔렀는데 헛손질을 한 모양이야.”

의문을 한 번에 해소시켜 주는 대답에 차란이 안도하며 가슴에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사실 그게 마냥 안심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들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정말 큰 일 날 뻔하셨습니다. 황궁이 큰일을 치를 뻔하였다고요.”

“목소리 낮춰.”

흑영이 차란의 팔을 잡아끌며 말렸다. 곧바로 뿌리치는 팔에 흑영은 물러섰지만 한 번만 더 목소리를 높였다가는 무력으로라도 쫓아내겠다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슬슬 차란이 성가시기 시작했다. 이딴 소리를 들으려고 안으로 들인 것은 아니었는데.

우찬이 허리를 좀 더 곧추세워 앉으며 마뜩잖은 듯 차란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이 자꾸만 흘러내렸지만 양손에 천이 감겨 있어 쓸어 넘기는 것도 불편해 점점 짜증이 났다. 보다 못한 흑영이 도와주려고 슬그머니 손을 뻗었지만 고개를 흔들어 거절했다.

“연이설은.”

결국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히 물었다. 차란은 뭔가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좌우로 왔다 갔다 움직이다 대답했다.

“계시던 곳에 얌전히 잘 계십니다.”

“다친 곳은 없는지 물은 것이다.”

“없습니다. 기운이 빠지셨는지 몸져누워 계신데, 충격을 꽤 받으신 모양이긴 합니다.”

그 새가슴이 그 꼴을 보고도 정신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할 노릇이다.

기억하기로는 둘이 함께 있던 사방에 피가 흘러넘쳤다. 누구의 피인 줄도 몰랐다. 이설이 다치지 않았다면 모두 제 것이었을 테고,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설은 이제 몸이 하도 말라서 그 안에 피가 있기는 할까 싶을 정도였고, 한 잔 분량의 피만 쏟아도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여하간 폐하께서 마마를 걱정하실 때는 아닙니다. 이 몸을 하시고선 지금…….”

차란이 대놓고 우찬을 위아래로 훑어 내리며 말했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

“얘기랄 것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많이 위독하신지 걱정하시기에 치료를 잘 맞췄으니 곧 회복하신다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걱정?”

헛바람이 터지는 바람에 어깨가 들썩이자 덩달아 옆구리 통증이 심해졌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우찬은 서너 번 더 같잖은 듯 헛바람을 뱉으며 웃었다.

바람대로 죽지 않고 숨이 붙었는지를 걱정한 것이었을까. 이설이 칼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해서 자신을 정말 죽일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기를 바라지 않았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죽음에 직접 가담하는 것과 방관하는 것은 엄연히 다를 테니까.

“내가 곧 회복한다 하니 기뻐했느냐 아니면 실망했느냐?”

“최선을 다해 객관적으로 말씀드리지만, 적어도 절대 실망하시는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차란이 애를 쓰는 건지 이설이 연기를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찬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설은 생각보다 훨씬 영악한 사람이었다. 하마터면 순진무구한 얼굴로 저를 연모한다는 그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어차피 이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평생을 옆에 붙잡아 두고 있을 생각이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종종 이설이 자신을 정말 연모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지만 잘 상상이 되지도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