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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8)화 (258/300)

달의 황홀경

258화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제 죄를 감형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감형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제가 폐하를 위협했다 자백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함께 있던 호위군들의 증언이 있을 테지만요.”

“예 그렇긴 합니다만 감형이라니…….”

일부러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차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이고 귓불 아래를 긁었다. 그리고는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들었다. 좁혀진 미간 사이에 그새 주름이 더 늘었다.

“제가 마마를 문초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저지른 소행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니까요. 금위대장이 아니라 승상이 먼저 찾아와 놀란 참이었습니다.”

포단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누워 있는 동안 몇 번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발소리를 들었다. 이설은 그게 금군일 거라고 생각했다. 천인공노할 이 소행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머리도, 몸도 온통 무거워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신이 벌인 짓에 대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끌려가 고신을 당한다거나 위압적인 심문을 받게 되는 일이 두렵지는 않았다. 우찬이 무사한 게 급선무라 그런 걸 겁낼 정신이 없었다. 우찬이 직접 고신하며 문초를 한다면 모를까. 그건 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도 생각하고 걱정하느라 온몸의 진이 다 빠졌다. 덤덤하게 말을 잇는 이설을 보고 차란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찾아온 것은 단지 마마의 상태가 걱정되었을 뿐입니다. 제가 마마를 문초하다니 당치도 않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대체 누가 마마께 그런 불경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불경한 짓을 한 것은 접니다. 제가 폐하께 칼을,”

“그 얘기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서글서글하긴 해도 예의 없이 선을 넘은 적은 없던 차란이 칼같이 말을 끊었다.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마마께서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아십니까?”

알 턱이 없는 이설은 대답 대신 눈꺼풀을 서너 번 연달아 깜빡였다. 차란은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저 때문에 다치셨습니다.”

단어를 조금 바꿔 말했을 뿐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이설에게 차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칼자루를 잡으셨던 건 폐하십니다.”

“그렇지만 그 칼을 겨눈 게 저였습니다.”

“제 말은, 폐하께서 다치신 일이 마마의 책임은 아니라 이 뜻입니다.”

순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곧이어 떠오르는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애초에 자신이 칼을 꺼내지 않았다면 우찬이 배를 찌르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듭 생각해 봐도 우찬이 다친 것은 자신의 책임이었다.

애써 생각해 위로하는 차란의 말이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오히려 죄책감이 들어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헛구역질이 자꾸만 올라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향초 때문인 것 같았다.

이민족 무리들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들이마셨던 독한 향초가 체질을 바꾸기라도 했는지 적당한 양의 향에도 몸이 예민하게 반응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태의를 부를까요?”

“별거 아닙니다. 저기 뒤에 있는 향초에 불을 좀 꺼 주시겠습니까. 머리가 좀 아프네요.”

이설의 부탁대로 차란이 뒤쪽에 놓인 향초의 불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끼쳐 들어오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송구하나 침소 밖으로 벗어나시는 것은 아직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제가 아직 여기에 있는 이유요. 만약 다른 사람이, 가령 승상이나 윤 내관 아니면 후궁들 중 한 명이 폐하께 칼을 겨눴더라도 그냥 넘어갔을 건가요?”

말이 끝나자마자 차란이 질색을 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럴 리가요. 황궁의 법도가 그리 너그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째서…….”

이설을 말끝을 흐리면서 자기가 생각해도 무척 쓸데없는 것을 물고 늘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어서 옥에 가두고 고신하여 본때를 보여 주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 같다. 못 들은 셈 넘어가 준다는 듯한 차란을 오히려 질책하고 있지 않은가.

차란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귓불 아래를 긁었다.

“오늘 저녁이면 깨어나실 폐하께서 가장 먼저 물어보실 질문에, 마마께서는 지금 금의위로 끌려가 문초 중에 있다 대답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곤란해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때에 어울리지 않게 말투가 약간 농담조인 것 같긴 한데 얼굴은 한껏 심각하다. 이설은 그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몇 번을 곱씹고 나서야 대답했다.

“제가 이렇게 멀쩡히 있다는 걸 들으시는 것도 썩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금의위는 더 말이 안 됩니다.”

“저는 승상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침소 안 공기가 찬바람에 환기되며 헛구역질은 조금 나아졌지만 관자놀이가 아픈 건 더 심해진 기분이었다. 여태껏 차란이 알려 줄 듯 말 듯하며 모호하게 말을 하는 방식이 싫었던 적은 없지만, 오늘은 다소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웃음기 없이 메마른 눈동자를 위로 올려 떴다. 눈치가 빠른 차란은 이제 이설이 더 이상 이런 에두른 화법을 듣고 싶어 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심각해진 얼굴과는 다른, 어딘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어디까지 폐하의 의중을 대변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아마 이번 일로 마마가 곤경에 처하시길 바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을 하죠?”

“마마를 무척 아끼시니까요.”

미리 생각해 놓은 대답인 듯 차란이 간결하게 말했다.

싱거운 대답에 이설은 감흥 없이 고개를 돌렸다. 우찬은 친우이며 충신인 차란에게 조차 천명에 속아 넘어간 마음을 털어놓은 듯했다.

감정 같은 건 일절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이설이 뒤이어 혼잣말했다.

“그리고 저를 은애하시기도 하고요.”

“예?”

뜻밖에 얘기에 차란이 질겁을 하며 눈을 크게 떴다 했다. 이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가슴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만졌다. 끝이 갈라져 보기 싫게 너저분해진 머리카락을 언제쯤에나 자를 수 있을지 속 편한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당황한 티가 역력하던 차란은 금세 평정심을 찾고 헛기침으로 마른 목을 풀었다. 그리고는 빤히 이설을 들여다봤다. 평소에 얘기를 나누며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과는 달랐다. 속마음을 간파하여 읽어내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차란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응시만 하던 차란이 신음처럼 숨을 뱉었다. 얼굴에 퍼지는 낭패감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먼저 눈치채셨을 리는 없을 테니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걸 테고요.”

차란이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두 분께서 이런 복잡한 상태라는 건…….”

끝내 이마를 짚은 차란이 뒤로 물러나 걷다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푹푹 내쉬는 한숨 소리가 귓가에 크게 들렸다. 이설은 갑자기 차란이 축 늘어진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한편 차란 역시 우찬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은애한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찬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차란이다. 우찬이 그리 쉽게 타인에게 연심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쩌면 차란도 천명에 속아 넘어갔을 수도 있다. 아무리 우찬이라 할지라도 천명이 정해준 정인에게는 마음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라고. 그래서 우찬의 마음은 거짓되거나 만들어진 게 절대 아니라고.

“짐작이긴 합니다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여쭤보겠습니다. 마마, 혹시 폐하의 연심을 부정하셨습니까?”

“연심이라면 무엇을 향한 연심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입니까 아니면 폐하의 손목에 새겨진 이름입니까?”

이설의 삐딱한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낮은 탄성으로 차란이 반응했다. 가슴께까지 올라왔던 꽉 쥔 주먹이 차마 탁자를 내리치지 못하고 허공 위에 떠 있다 내려왔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니 이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

“폐하께서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이고 망설인 뒤에야 차란이 눈을 맞췄다.

“마마를 진심으로 연모하십니다.”

어렵게 꺼낸 말이라기에는 이설에게 별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물론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자극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무뎌진 뒤라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겠죠. 폐하께선 연이설을 연모하실 테니까. ……꼭 제가 아니어도 이 자리의 연이설이라면 누구든 그러셨을 겁니다.”

차란이 끼어들려는 찰나 황급히 말을 더했다.

향을 끈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뭉개져 있던 감정이 조금씩 예민하게 반응하자 실망과 비참함 같은 기분들이 수면으로 올라온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길게 했다.

차란은 다소 심각했던 표정에 놀라움과 경악 등의 감정을 섞어 낸 눈으로 이설을 바라봤다. 마치 차란에게 속마음 하나하나가 재단되는 기분이 들었다.

“폐하의 연심은 마마의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말씀은 그리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연심이 정말 온전히 저를 향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놀라 눈을 번쩍 뜨는 차란이 처음으로 이설을 책망하는 눈빛으로 봤다. 흔들리지 않는 까만 눈동자가 말없이 이설을 비난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 같다고, 이설은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차란이 완전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폐하께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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