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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6)화 (256/300)

달의 황홀경

256화

“이 늙은이가 듣고도 믿기 어려워 함께 안에 있던 호위군들을 붙잡아 물었는데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흑영은 안에 있습니까? 폐하께서는 깨어나셨고요?”

“새벽에 잠깐 정신이 드셨다가 태의가 올린 탕약을 드시고 다시 침수에 드셨습니다. 태의 말로는 독한 약을 썼으니 아마 저녁까지도 깨지 않으실 거랍니다. 흑영은 안에 있으니 들어가 보시지요.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십시오.”

궁에서 일어나는 일 중, 그것도 우찬에게 일어난 일 중에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는 게 참기 힘든 듯 윤 내관은 차란의 등을 떠밀었다.

태금궁의 수많은 침소 중 하필 이 구석진 위치의 작은 침소로 우찬을 모셔왔는지는 굳이 궁금해하지 않았다. 별채를 제외하고는 여기가 이설이 머물고 있는 침소와 가장 멀었다.

들어간다는 기별도 없이 불쑥 안으로 들어오는 차란을 보고도 흑영은 놀라는 기색 없이 한 번 흘끔 쳐다보고 말았다. 눈 밑이 퀭해진 흑영의 검은 의복에 얼룩덜룩한 피가 묻어 굳은 게 보였다. 저게 다 우찬의 피라고 생각하니 핏기 없는 얼굴로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한 우찬이 죽은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다행히 급소는 피했어.”

우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다가오는 차란에게 흑영이 말했다.

“옆구리를 빗겨 찌르셨나 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잘 회복하,”

“정말 소의 마마야?”

가까이 다가온 차란이 흑영의 어깨를 툭 건드려 돌려세우며 물었다. 우찬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흑영이 약하게 인상을 쓰며 제 어깨 위에 차란의 손을 털었다.

“뭐가.”

“정말 마마께서 폐하를,”

우찬을 직접 보니 윤 내관의 말을 더 믿을 수가 없었다. 마른침을 한번 삼켜 낸 뒤 가까스로 다시 입을 뗐다.

“이렇게 만드신 거야?”

“…….”

“대답해 얼른. 마마께서 폐하의 급소를 피해 칼을 찔러 넣으신 게 맞냐고.”

“목소리 낮춰. 폐하 깨시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러니까 대답하라고.”

흑영은 머리 쓸 줄을 모른다. 보고 들은 대로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고지식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으니 속이 타들어 갔다. 정말 우찬을 병상에 누워 있게 만든 게 이설일까 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설 님께서 폐하를 시해하려고 하셨어?”

“그건 아냐.”

차란의 극단적인 단어 선택에 인상을 찌푸린 흑영이 곧바로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불안한 기분이 겨우 한 근이나마 덜어졌다.

“역시 사고지? 뭔가 사고가 있었던 거지?”

다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흑영이 답답해 가슴을 두드렸다. 이번의 침묵은 부정이다. 사고는 아니었다는 거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폐하를 당장 깨워서라도 여쭤볼 생각이니까 그 전에 네가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혀만 나불거리는 협박이 아니라 차란은 정말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금의 황제가 다른 곳도 아니고 황궁의 제 침소에서 칼에 찔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의도적인 시해의 목적이 있었다면 이를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설령 그게 이설의 손에서부터 시작된 일이라 할지라도.

차란이 괜한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는 걸 흑영도 알았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을 망설이다 실토했다.

“폐하께서 자결을 시도하셨어.”

“뭐?”

“입 좀 다물어.”

벼락처럼 내리치는 고함을 들었는지 가만히 누워 있던 우찬이 낮은 신음을 내며 몸을 움직였다. 흑영이 차란의 팔을 잡아당겨 나직한 소리로 윽박질렀다.

흑영이 앉은 의자 발치에 털썩 주저앉은 차란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우찬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말이 되지 않는다.

“폐하께서 도대체 왜?”

“화가 나셨던 것 같아. 마마께서 먼저 폐하께 칼을 겨눴거든.”

“마마는 또 왜?”

“폐하를 피하시려다가.”

“칼은? 칼은 어디서 구하신 건데?”

“침상 아래 서랍에 유사시에 대비해서 초대 황제께서 쓰시던 검을 넣어 놨어.”

“스쳐도 중상이라는 그 명검을, 마마께서 폐하께 겨눴다고?”

언젠가 본 적이 있다. 우찬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물려받은 검이다. 초대 황제께서 그 검 하나로 적군 수십만을 베었다고 들었다. 검에 대한 지식이 보잘것없는 차란도 눈이 휘둥그레졌던 검을 우찬은 갖다 치우라며 짐짝 취급했다. 윤 내관이 알아서 어디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곳에 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한 것은 이설이었다. 침상 아래에 검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그걸 왜 우찬에게 겨눴느냔 말이다. 우찬을 피하기 위해 검으로 위협했다니. 너무 이설답지 않았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으면 모를까.

“정말 해를 입히실 생각은 없으셨을 거야. 마마께서도 반쯤 정신이 나가 보이셨거든. 검을 꺼내 드셨을 때 바로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머뭇거리는 사이에 폐하께서 검날을 맨손으로 붙잡으셨어.”

흑영의 말을 듣고서야 우찬의 손에 감긴 흰 천의 정체를 깨달았다. 바위도 가른다는 예리한 날이 양쪽으로 난 양날검을 맨손으로 붙잡았으니 손가락이 멀쩡히 붙어 있는 게 용할 노릇이었다. 아마 손에서만 난 피가 한 바가지는 넘쳐흘렀을 것이다. 흑영의 옷에 덕지덕지 붙은 핏자국이 그럴 만도 했다.

“폐하께서 너무 무모하셨어.”

어지간해선 우찬에게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는 흑영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마마를 힘으로 제압하셨으면 두 분 다 다치시는 일은 없었을 거야.”

“그럴 정신도, 기분도 아니셨을 거야. 마마께서 폐하께 칼을 겨눴잖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폐하의 심정은…….”

우찬이 느꼈을 그때의 감정을 통감하며 괴로운 듯 마른세수를 했다. 가뜩이나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서 평온히 잠들어 있는 모습에 거의 처음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연심의 형태가 무엇이든, 전하는 방법이 어떻든 우찬이 이설을 아끼는 마음은 진심이다. 이설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우찬은 이미 몇 번이나 이설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와중에 이설이 손에 든 검이 자신을 향했으니 우찬도 그때는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충동과는 거리가 먼 우찬이지만 이설이 개입된 일에는 항상 변수가 발생하니 이를 두고 우찬답지 않다 혀를 내두르는 것도 이제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마마께서도 많이 충격받으셨을 것 같은데.”

“바로 눈앞에서 자결하시려는 모습을 봤으니까. 마마께서 쥐고 있던 칼자루 위에 폐하께서 손을 겹쳐 배를 찌르셨어. 검이 살을 파고드는 그 느낌, 전부 다 느끼셨을 거야.”

우찬이 안쓰러운 한편 이설에게는 또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굴었어야 했나 하는 안타까움이 생겼다. 천만다행으로 우찬의 부상이 이 정도에 그쳤으니 다행이지 만에 하나 크게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이설은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찬이 이것을 노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의 우찬은 아마 여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슬프거나 괴로운 감정이 극에 달하면 깊고 넓은 사고를 하는 게 불가능했다.

“페하께서 완전히 회복하셔도 마마는 평생 자책하실 거야.”

“차라리 폐하께서 그걸 노리시고 일을 이리 크게 벌이신 거라면 좋겠네. 일부러 급소를 피해 옆구리를 찌르시고 말이야.”

“분명히 급소를 노리셨어.”

실낱같은 희망으로 바라봤지만 흑영이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고 끼어들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정확히 급소를 꿰뚫었을 거야.”

“늦다니, 뭐가.”

“폐하께서 자결을 시도하시기 바로 직전에 내가 목덜미 혈을 짚었어. 깨어나시면 난 더 이상 황궁에서 지내지 못하게 될지도 몰라. 운이 나쁘면 죽을 수도 있고.”

무덤덤하게 내뱉는 말이 진심인지 농인지 모르겠다. 차란도 싱숭생숭한 기분에 별생각 없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중 궁에서 쫓겨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첫 번째일 줄 알았는데.”

혼자 얼버무리며 중얼거린 말을 재주 좋게 들은 흑영이 무미건조한 시선을 차란에게 보냈다. 차란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흑영을 올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시답잖은 농담이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다.

“폐하께서 직접 몸에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아는 건?”

“나를 제외한 호위군 여섯 그리고 소의 마마.”

“일단 입단속들 단단히 해두고.”

“너도 들었겠지만 궁인들은 마마께서 폐하를 시해했다고 생각해. 난 궁 안팎 돌아가는 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것도 별로 좋은 소문은 아닌 것 같은데.”

흑영의 말이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우찬이 직접 배에 칼을 찔러 넣었다는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전쟁 이후 궁내 분위기가 많이 뒤숭숭해졌다. 금국에 큰 피해가 없었다고는 해도 이후 수습할 것들이 많아지며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한시가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와중에 우찬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을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궁 밖으로 우찬의 일이 새어 나가지는 않았으니 태금궁의 궁인들 입단속만 며칠 단단히 해 두면 됐다. 이건 윤 내관이 알아서 철저히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뒤 우찬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찬이 깨어난다고 해서 지금 상황에서 더 좋아질 게 있을까.

이설이 우찬에게 검을 겨눴던 일은 사실이었고 우찬은 그로 인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다시 깨어난 우찬의 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우리끼리 이렇게 얘기해 봐야 폐하께서 깨어나시면 다 소용없겠지.”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뭐가?”

“소의 마마께선 명백히 폐하를 위협하셨어. 시해가 목적이었든 단순한 충동이었든 상관없이.”

흑영이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여기까지만 듣고도 대충 이해한 차란이 물을 걸 물으라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궁에서 쫓겨나고 싶은 거 아니면 일단 모른 척 넘어가. 폐하께서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소의 마마 손끝 하나 대서는 안 돼. 알아들어?”

찜찜한 기색을 썩 감추지 못하고 억지로 고개만 끄덕이는 흑영이지만 못 미덥지는 않았다. 아무리 융통성 없고 앞뒤가 꽉 막힌 고지식한 인간이라고 해도 평생을 찜찜하게 살지언정 이설을 옥에 가두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우찬은 저녁때까지 숙면을 할 것이라고 하니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용건이 끝난 흑영과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소의 마마께 가?”

주제에 눈치가 좀 생긴 흑영이 물었다. 차란은 성의 없는 말투로 ‘어’ 하고 대답한 뒤 인사도 하지 않고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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