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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5)화 (255/300)

달의 황홀경

255화

“팔다리가 전부 잘려 나가도 나는 너를 안을 것이다. 내가 안고 있는 네가 나를 베고 찔러도 내가 먼저 너를 놓는 일은 절대 없어.”

신녀의 주술처럼 속삭이는 우찬의 말에 이설이 홀린 듯 시선을 허공에 댔다. 방금 우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소리를 지른 뒤 확장된 동공은 작아질 생각을 안 했다.

우찬과 이설의 대치 상황에 누구 하나 물러설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호위군이 서로 눈빛을 보내며 두 사람 주변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뜩이나 놀란 이설은 몰려오는 어두운 그림자들에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상의가 벗겨져 나간 맨몸의 하얀 살결에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모두 물러서.”

“그럴 수 없습니다.”

명령에 불복한 호위군들의 검 끝이 두 사람을, 정확히는 이설을 향했다. 아무리 이설이라 할지라도 조금만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저 검들은 망설임 없이 살을 베고 뼈를 가를 것이다.

“지금 누구에게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이냐!”

가까이 다가오려던 호위군이 우찬의 고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일찌감치 빼 든 검을 계속 들고 있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 채 서로들 간의 눈치를 봤다. 검은 복면에 뚫린 구멍으로 눈만 보이는 얼굴들이 다들 얼마나 사색이 되었는지 눈빛만 봐도 알 만했다.

“폐하 일단 손을, 그 손부터 놓으시면 저희 모두 물러나겠습니다.”

그나마 침착한 흑영이 천천히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뒤이어 나머지 호위군들도 흑영을 따라 검을 거뒀지만 이미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린 이설은 안도할 기미가 안 보였다. 눈만 보고 있자니 정말 뭐에 홀린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모두 자리로 돌아가.”

“폐하 제발 진정하시고 손부터 놓으십시오. 상처가 이미 깊습니다.”

보란 듯이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하자 검날이 더 깊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희번덕거리는 검날을 타고 흐르는 피가 중간에서 끊어져 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끊어지지 않은 핏줄기는 그대로 손잡이 부분까지 흘러 이설의 손으로 흘렀다.

이설은 육안으로 확인이 될 만큼 검을 쥔 손을 덜덜 떨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떨며 구석진 사이에 몸을 구겨 넣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우찬만 올려다봤다. 두려움이 기저에 깔린 온갖 감정들이 두 눈에 일렁였다.

우찬은 호위군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검날을 제 쪽으로 확 당겨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두 손으로 검을 꽉 쥐고 있던 이설은 상체가 앞으로 끌려 나와 우찬의 발치에 무릎 꿇듯 앉았다. 호위군들에게 신경을 거둔 우찬이 검날 반대편으로 가슴 위를 꾹 눌렀다.

“여기를 찌르면 사람은 죽어.”

검에 베인 손바닥을 꾹 누르자 아릿한 감각이 팔꿈치까지 번져 올라왔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설이 눈물로 범벅된 눈으로 올려다봤다. 벙긋거리는 입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없었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근데 넌 힘이 약해 끝까지 찌를 수가 없을 거야.”

우찬이 검을 옆으로 밀쳐 손에서 놓자 검과 함께 이설이 검과 함께 옆으로 휙 넘어졌다. 그리 무거운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설이 들기에는 버거운 무게였던 모양이다.

다시 금세 일어나서는 검을 손에 꼭 쥔 이설을 내려다보다 피 묻은 손으로 목을 쓰다듬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이 목을 어루만지며 피로 물들였다. 비릿한 피비린내를 맡으며 무릎을 접어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 여기를 베면 돼.”

“폐하!”

이설이 검을 어떻게 휘둘러도 목에 닿을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우찬이 목울대 아래를 가리키며 하는 소리에 흑영이 가장 먼저 반응하며 튀어나왔다.

“움직이지 마.”

옆으로 살짝 돌아선 고개가 흑영을 향했다 돌아왔다. 이설은 검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지 손목을 자꾸만 아래로 떨궜다. 하는 수 없이 우찬이 다시 검 끝을 들어 목 가까이에 가져다 댔다. 예리하게 벼린 날의 한 면이 목에 닿는 것만으로도 가느다란 실선으로 피가 맺혔다. 이 상태로 이설이 힘을 주고 검을 당기거나 밀기만 해도 목이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목뼈는 생각보다 단단해. 찌르는 것보다는 여길 베는 게 더 쉬울 거다.”

“…….”

“시키는 대로 만 해. 그럼 네가 바라는 대로 나는 완전히 숨통이 끊어질 거야. 피가 많이 날 테니 너무 당황하지는 말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가는 말에 이설이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겁을 먹고 우는 건지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아 우는 건지 영 알 수가 없었다.

이설이 정말 자신을 죽이기 위해 검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해도 살의를 품기란 어려웠다. 이설은 남을 죽이겠다는 마음 자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히 장담했다.

그렇다고 지금 이설에게 자신을 죽여 보라며 목을 들이미는 행위가 의미 없는 허풍인 것도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설이 죽기 살기로 자신을 거부한다면 어차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관계다.

“네가 그랬지? 너와 난 아무 운명도 나누지 않은 그저 남일 뿐이라고. 내가 죽어도 네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지 않을 테니 그것 또한 걱정하지 말거라.”

“왜, 왜……,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온몸을 다해 소리치는 이설의 팔이 요동치며 덩달아 손에 들린 검이 움직였다. 목을 위아래로 베는 날에 목에 상처가 점점 더 깊게 파였다.

벌써 몇 번이나 물었던 이설의 말에 이번에는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날을 따라 흐르는 핏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져 고이는 것을 가만 바라봤다. 이제 와 깊이 생각해 보면 왜 이렇게까지 이설을 곁에 잡아 두려 하는지 모르겠다.

늘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때그때 이설의 반응에 대응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자행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책임을 이설에게 돌렸다. 네가 그렇게만 하지 않았어도, 나 또한 이렇게까지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글쎄. 지금까지 무슨 이유를 다 말해도 너는 듣지 않았는데 이제 와 더 얘기할 필요가 있나.”

갑자기 모든 게 다 귀찮아졌다. 궁에 돌아온 이설과 마주칠 때면 끊임없이 오가는 고성과 서로를 향한 불신의 눈빛도 모두 지겹다. 생기 없이 죽은 눈이라 할지라도 저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어리석은 생각도 하찮게 사라졌다.

원망과 경멸로 얼룩진 저 눈을 과연 얼마나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까. 품에 안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고 죽기 살기로 도망치기 바쁜 이설을 어디까지 봐줄 수 있을까. 울고 애원하며 자신을 연모한다는 저 거짓말에 몇 번이나 더 속아 넘어가야 무뎌질 수 있을까.

“너는 정말 내가 죽기를 바라느냐?”

“폐하께서는 정녕 제가 그런 터무니없는 것을 바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내가 널 이만 놓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우물쭈물하는 입술이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물에 가린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낭패였다. 반대편 손으로 얼굴을 닦아 주려고 들었다가 피가 범벅이 된 걸 보고 도로 내렸다.

“결국 같은 것을 바라는구나.”

손에서 힘이 풀리며 쥐고 있던 검 끝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시름 놓기라도 하듯 이설 역시 힘 빠진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간신히 손에 쥐고 있기만 한 검은 손에 겨우 걸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우찬이 손을 뻗어 칼자루 위 이설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잡았다.

“폐하!”

가까이 얼굴을 맞댄 이설의 경악에 찬 눈이 우찬을 집어삼킬 듯 커졌다. 짧은 순간 우찬의 손에 들어간 검이 어떻게 사용될지 직감한 듯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원망하지 않으마.”

사방에서 자신을 부르며 동시다발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마지막 말을 이설이 들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손을 제 몸 쪽으로 당겨 힘을 주기 직전 뒷덜미 어딘가에 묵직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날카로운 검의 끝이 제 몸뚱이 어딘가를 깊이 관통하고 들어왔다는 것 또한 느꼈다. 생각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검이 관통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이설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들었고 그 상태로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

밖은 청명한 하늘에 햇살이 반짝이는 반면 태금궁은 온종일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어 있는 상태였다. 궁을 드나드는 궁인들은 하나 같이 얼굴이 까맣게 빛이 바래 죽을상을 짓고 다녔다. 웃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눌 때도 누가 들을세라 소곤소곤 목소리를 죽였다. 대낮에도 늘 켜놓던 등불이 모두 꺼져서 평소보다 어두워진 복도를 지났다.

“오셨습니까, 승상.”

태금궁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복도 끝 방에 다다른 차란을 맞으며 윤 내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침에 연통을 받고 급히 입궐하였습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게, 말도 마십시오. 어휴.”

여간해선 다른 궁인들 앞에서 크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윤 내관이 꼭 감은 눈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답답해진 차란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달라며 재촉하자 한참을 뜸을 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소의 마마께서 폐하를 검으로 찌르셨는데 그게…….”

“예?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좀 말씀해 보세요.”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입궐했다. 아침 일찍부터 우찬도 아닌 윤 내관이 사람을 보내 급히 입궐하라 일렀을 때 우찬에게 뭔가 일이 일어났다고 짐작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성정에 못 이겨 궁 몇 개를 부순다거나 사람 한둘을 불구로 만든다거나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골치 아픈 일이라면 우찬이 벌일 거라고 생각했지 이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간밤에 폐하께서 소의 마마와 다투신 모양인데 갑자기 흑영이 태의를 찾더랍니다. 궁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폐하는 온몸에 피칠갑을 하신 채 쓰러져 계셨는데 그, 마마께서……, 마마께서 피 묻은 검을 손에 쥐고 계시더랍니다.”

윤 내관도 직접 보지는 못했는지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면서도 스스로 말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직접 들은 윤 내관도 이 정도인데 두 번에 걸쳐 들은 차란은 더 믿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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