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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2)화 (252/300)

달의 황홀경

252화

“……차피……, 것도 아닌데…….”

“방금 뭐라 하였느냐?”

흐느끼는 소리에 파묻힌 목소리를 듣기 위해 다시 귀 기울였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혼자 중얼댔다.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재차 묻자 이설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경련하듯 떨리는 입꼬리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우는 듯 웃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기대하지도 않았다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서 제 마음 따위를 안중에 두셨을 리가 없죠. 폐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것은 제가 폐하의 정인이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이깟 마음 하나 헤아리는 게 폐하께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연심은 네 이름과 아무 상관 없어. 대체 몇 번을 더 반복해야 알아듣겠느냐!”

결국 터지고야 마는 감정에 우찬이 바닥으로 내려와 소리쳤다. 그에 질세라 이설도 자리에서 허리를 곧추세우며 우찬을 맹렬하게 쏘아봤다.

“연이설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진 저를 우연히 만나셨더라도 폐하께서는 저를 은애하셨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으십니까?”

“어느 순간에 어떤 너를 만났더라도 결국 나는 너를 탐하였을 것이다.”

“송구하오나 폐하.”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한 것도 모자라 비웃기까지 하는 이설이 낯설어 보였다.

“저는 그 마음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알려도 돌아오는 것은 부정과 신랄한 조롱이었다. 가련하게 떨리는 어깨를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지며 체온이 차게 식어 내려갔다.

“제가 믿을 수 있는 마음은 오직 제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는 알 필요도 없다 하찮게 버리신 그 마음이요.”

“네가 궁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했던 그 마음 말이냐?”

“제게는 오직 그것만이 진짜입니다.”

“그래? 그럼 그 대단한 마음 한번 들어나 보지.”

우찬이 장포를 펄럭이며 의자에 앉았다. 들으나 마나 하등 쓸모도 없는 것일 거다. 영문도 모른 채 남겨져 있을 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 따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돌아와야 했다는 얘기는 듣지 않아도 뻔했다.

보고 싶어 찾아왔고 아프다기에 걱정했던 것이 역시 부질없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차츰 들기 시작했다. 이설은 혼자 있는 동안 어떻게든 우찬을 멀리 쫓아낼 궁리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달아날 수 없으니 우찬을 쫓아내는 방법으로.

“대체 궁은 왜 돌아오려고 하였느냐?”

적대심을 가득 담은 두 눈이 조용히 우찬을 응시했다. 두 손 꽉 쥔 주먹에 핏기가 가시고 손가락뼈만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갑자기 입을 꽉 다문 이설에게 고함을 쳤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열린 창문 밖으로도 튀어 나갔다.

“반드시 궁을 돌아오겠다던 그 이유가 뭐였는지 대답해 보거라!”

“…….”

“대답해 어서!”

“제가 연모하는 폐하께서 계신 곳이니까요!”

재촉하는 우찬의 말과 이설이 대답이 거의 동시에 허공에 맞부딪혔다. 우찬 못지않게 언성을 높인 이설은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지 숨을 헐떡였다.

반대로 우찬은 순간 숨이 멎은 채로 미간을 좁혔다.

“방금 그 말, ……뭐라 하였지?”

제 목소리에 가려지긴 했지만 아주 못 듣지는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아예 못 들었으면 이렇게 당혹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우찬은 조금 전 자신이 얼핏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는 듯 재차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제가 연모하는 폐하께서 계신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폐하께서 계신 곳으로 저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곳은 제게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요.”

“……네가 누구를,”

“제가 폐하를 연모합니다.”

순식간에 사그라진 목소리가 다시 울음을 머금고 답했다. 차분한 척 애써도 솟아오르는 감정은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은 어느새 힘이 풀려 허벅지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이설은 울듯 말듯 미묘한 표정을 지나 입술을 경련했다.

의자에서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우찬은 별안간 들은 충격적인 얘기에 간헐적으로 숨을 뱉었다. 적막함만 무겁게 깔린 가운데 이설의 젖은 숨소리와 바람 부는 소리만 뒤섞였다.

“제가 폐하께 드린 것은 제 이름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폐하께서 가지신 이름은 제 것이 아니지만 드린 마음은 온전히 제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연심만이 제가 믿을 수 있는 진짜 마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이설의 얘기가 귀에 닿지 않는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울며 뱉어 내긴 했지만 이설이 털어놓은 것은 분명 연심이었다. 이설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얘기였는데 너무 쉽고 간단하게, 하필 지금에 이르러 듣게 됐다.

실감은 나지 않았다. 이설은 연심을 고백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벼랑 끝에 내몰린 도망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 봤던 바로 그 처절한 순간의 얼굴이었다.

그때의 얼굴이 겹쳐지며 이설의 얼굴이 조금 전과 달리 보였다. 동요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를 연모한다는 너는 내 앞에서 왜 그렇게 괴로운 표정일까.”

음산한 목소리로 묻는 우찬이 느리게 감았다 뜬 눈에 눈빛을 달리했다. 서서히 가시는 충격이 완전히 사라지자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달밤의 수면처럼 고요해졌다.

“내 손만 닿아도 치를 떠는 네가 날 연모한다니 믿을 수가 없잖아.”

“저는 그저…….”

“네가 나를 속이고 있거나 아니면 네 마음이 너를 속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소린데.”

“…….”

“넌 둘 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네.”

우찬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이설을 관망하듯 바라봤다. 정곡을 찔려 드러난 표정인지 억울해 마지않는 표정인지 일그러진 얼굴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거짓말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못 본 사이 제법 재주가 늘었다. 퍽 쓸데없는 재주를 배워 왔다고 생각했다.

이설에게 연심을 고백받았다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감정은 가슴 밑바닥 아래로 그 아래로 깊숙이 침잠했다. 기뻐할 새도 없었다. 절규에 가까웠던 이설의 말은 그간 보여 준 행동을 전혀 설명하지 못했다. 눈만 마주쳐도 치가 떨려 하는 것은 물론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하게 몸부림쳤던 며칠의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빠져나가려나 두고 봤는데 이리 맹랑한 짓을 할 줄이야.”

예상치 못한 이설의 임기응변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이설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줄.

돌이켜 보면 이보다 더 말이 안 될 수가 없다.

멋대로 데려와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궁에 가둔 게 자신이었다. 우연히 마주쳤을 때는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 폭언을 하였고 아래 후궁이 다 보는 앞에서 갖은 망신을 줬다.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을 죄다 끄집어내 싫은 소리를 하기도 여러 번이었고 관련 없는 일인 걸 알면서도 이설을 걸고넘어지며 일부러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애지중지 여겼던 잠깐의 시간으로 보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모였다. 이설의 입장에서는 연심이 싹 틀 틈도 없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이설을 강경하게 붙잡아 놓은 것이었다. 마음이 약하고 무르디무른 이설이지만 연심만은 멋대로 휘두를 수 없기에 이곳에 발을 묶어 놓았다. 이미 감정에 호소하여 매달렸던 것도 전부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남은 방법은 이거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이설도 결국 감정에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저를 기만하는 감정이었으니 죄질이 나빠도 한참 나빴다.

“하마터면 믿을 뻔했어. 연이설 네가 날 연모한다는 그 말.”

“…….”

“그 말이면 내가 뭐든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훌륭해. 아주 그럴듯했어.”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너 역시 탄영당의 여느 후궁들처럼 미려한 악귀가 되려는 모양이구나. 세 치 혀로 나불거리는 거짓말쯤이야 이제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무슨 증좌로 그런 억측을 하십니까?”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목소리를 높이는 이설을 한 번 크게 비웃어줬다. 면경이라도 눈앞에 옮겨 줘야 저따위 소리를 하지 못하지.

“네 눈빛, 표정, 말투, 목소리 전부 다.”

“…….”

“네가 지금 나를 경멸하고 있잖느냐.”

“저는 지금 폐하께 화가 났을 뿐 경멸 같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닐걸.”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젓는 우찬을 노려보며 이설이 포단을 두 손으로 쥐어뜯었다. 손톱에 긁혀 나간 비단 표면에 보풀이 올라왔지만 아랑곳 않고 이설은 손이 떨릴 만큼 더 세게 힘을 줬다.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구깃해진 장포를 벗어 의자에 던지듯 걸친 뒤 침상에 올라가자 이설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한 뼘도 피하지 못하고 벽 사이에 등이 닿아 더는 갈 곳이 없었다.

“확인해 보자. 네가 날 연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경멸하는 것인지.”

“하, 하지 마세요!”

“네가 날 연모하는 것이 맞는다면 그간의 모든 잘못을 사죄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해 주마.”

“……시, 싫습,”

“허나 네가 날 경멸하는 게 맞는다면……, 어차피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겠지.”

포단 위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잡아 아래로 당겼다. 어느 쪽 발목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친 부위를 건드렸는지 이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래로 끌려 내려왔다. 순식간에 자리에 눕혀진 이설은 당혹감과 고통에 뒤범벅이 된 눈을 비벼 눈물에 뿌옇게 된 시야를 걷어냈다.

“싫습니다! 이거, 이거 놓으세, 으읏!”

발버둥 치는 이설의 위로 올라타 허벅지를 누르며 앉았다. 살집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허벅다리는 마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뼈가 그대로 눌리는 압박을 참지 못하고 이설이 신음으로 꺽꺽 울었다. 우찬은 하는 수 없이 무게 중심을 손에 놓고 침상을 짚어 이설에게 몸을 기울였다.

정신없이 도리질을 치는 고개를 잡아 고정해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봐, 이 눈빛.”

“으으……,”

“이게 어찌 지아비를 연모하는 처첩의 눈빛이란 말이냐.”

“놓으, ……놓아 주세으읏,”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지. 이번에도 그 뻔한 얼굴로 울다 지쳐 쓰러졌어야지. 그랬으면 내가 또 물러났을 텐데. 나는 평생을 그렇게 너한테 다 져 줄 수밖에 없었을 텐데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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