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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9)화 (249/300)

달의 황홀경

249화

“조금 전 탕약을 드시고 맥을 짚어 보던 중이었습니다.”

우찬과 이설 사이에 냉랭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태의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우찬은 이설의 발치쯤 되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나무 기둥처럼 미동도 않던 이설의 발이 꿈틀꿈틀 움직여 피하는 게 봉긋 솟은 포단 위로 다 보였다. 그런데 멀리 피하기는 힘든지 그냥 자리에서 몇 번 버둥거리는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열은 더 오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뜨거운 차를 피하시고 목욕물도 가급적 미지근하게 데워 사용하시면 오늘처럼 또 쓰러지시는 일은 없으실 겁니다. 궁인들에게 환기를 자주하여 마마께서 시원한 바람을 쐬실 수 있게 하라 일러두겠습니다.”

태의가 뭐라 떠들거나 말거나 눈길도 주지 않고 우찬은 이설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설도 태의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태도로 눈만 깜빡였다.

비쩍 마른 것이야 진작 알았는데 이제 보니 윤기 나던 은회색 머리카락이 부쩍 푸석푸석해졌다. 손으로 쓸어내리면 사르르 흘러내리는 은사는 사라진 지 오래다.

바스라질 듯 푸석해진 머리카락도 아직 달밤에 아스라이 빛날지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도 달밤에 이설을 봤던 것이 절벽 위에서였다.

문득 납치당했던 촌락에서 이설을 안아 데려 나오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도 이설이 지난밤들과 같이 아스름 빛났던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그런 기억이 없었다.

불과 오래 지나지도 않은 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우찬이 물었다.

“직접 밖에 나가 바람을 쐬는 것도 괜찮은가?”

스치는 시선으로도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는 이설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태의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태의가 한층 더 경직된 얼굴로 부자연스럽게 손짓을 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몸이 안 좋다고 하여 안에서만 계시다간 골병 나기 십상이니, ……아니, 마마께서 골병이 드실 거란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절대 아니었사옵니다!”

주절거리던 태의가 손을 훠이 저으며 말을 반복했다. 우찬이 별말 없이 쳐다만 보자 안도하며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윤 내관이 봤으면 다 늙은 노인네가 경박하기 짝이 없다며 혀를 찼을 법한 모습이었다.

“해가 좋은 날에는 가금씩 밖을 산책하시는 것도 기분 전환 겸 회복에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다만 마마께서 지금 발목이 안 좋다 하시니 너무 무리하시지는 마시옵소서.”

“부상은 심각한 건가? 걷기 힘들 정도로?”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이 늙은이의 소견으로는 사실 발목에는 크게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태의가 슬그머니 이설의 눈치를 보며 눈동자를 굴렸다가 냉큼 옆으로 피했다. 태연하게 두 사람 얘기를 듣던 이설은 태의가 제 눈치를 보거나 말거나 생기 없이 마른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였다.

“뼈가 상한 것도 아니고 살이 부어오른 것도 아닌데 아프다고만 하시니 일단 처치는 해 놓았습니다. 소인이 아침저녁으로 경과를 지켜볼 테니 너무 염려치는 마시옵소서.”

얼굴로만 보자면 셋 중 이설의 부상을 가장 염려하는 것은 태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겁을 먹고 있었다.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데 이설은 아파서 걷지도 못하겠다 하니 환장하기 딱 직전의 표정이었다.

이만 나가 봐도 좋다는 손짓을 하자 태의가 반색을 하며 가져온 물건들을 빠르게 챙겨 나갔다. 내일 아침까지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읊어 주는데 이설은 하나도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태의는 끝까지 본분을 다한 뒤 머리를 수도 없이 조아렸다.

태의가 문을 닫고 나자 한동안 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물기가 하나도 없는 버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귀비의 궁에 다녀오셨습니까?”

생각지 못한 질문에 의아했던 것도 잠깐. 우찬은 미세하게 굳었던 얼굴 근육을 풀었다. 의술은 훌륭하지만 겁이 많고 눈치를 많이 보는 것에 비해 눈치가 없는 편인 태의가 괜한 헛소리를 지껄인 것임이 틀림없었다.

우찬은 소리 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귀비는 살아 있습니까?”

“거기까진 태의가 알려 주지 않더냐?”

“제가 물어도 되는 것인 줄 몰라 묻지 않았습니다.”

“귀비의 생사가 왜 궁금하지?”

“…….”

“귀비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냐 아니면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이냐?”

이설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생각에 잠겼다기보다는 몸에 기운이 빠져 한쪽으로 힘이 쏠린 것 같았다. 모습을 보면 눈을 뜨고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온몸에 생기가 없었다.

“귀비의 생사 여부가 저와 하등 상관이 있습니까?”

“없다.”

우찬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귀비가 죽든 살든 너는 여기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테니까.”

“…….”

“아, 어차피 지금은 걷지 못한다 했던가?”

우찬이 설핏 미소 같은 걸 입에 띄웠다가 지웠다. 포단 아래 발로 추정되는 부분을 내려다보자 후다닥 옆으로 움직였다.

“발을 자르면 보기 흉할까 걱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된 것도 나쁘지는 않지.”

“정녕 제 발을 자르실 생각이셨습니까?”

색이 흐릿한 눈동자에 담긴 깊고도 고요한 원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시에 혼란한 마음을 대변하듯 흔들리는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 와중에 우찬과는 마주하기 싫은 듯 내리깐 눈은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다.

우찬 역시 이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했다. 이설은 두 번 묻는 대신 고개를 돌려 우찬을 완전히 회피했다.

팔을 부산히 움직이기에 자리에 도로 누우려는 줄 알았는데 옆에 베개 아래에서 반으로 접은 종이를 꺼냈다. 포단 위에 두고 쓱 밀어 건네주기에 받아 펼쳤다.

“낮에 보여 주셨던 서신의 해독 전문입니다. 원본은 원래 있던 곳에 두었습니다.”

펼쳐 보자 빼곡한 글자들이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익숙한 이설의 필체였다. 서문의 서너 문장만 읽어 내려간 우찬이 다 읽기도 전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건 언제 해 둔 것이냐?”

“좀 전에 낮잠에 깬 직후 해 둔 것입니다.”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그리 복잡한 암어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서문을 읽어 보니 시간을 더 끌어서도 안 될 것 같았고요.”

짐짓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설이 피곤한 듯 이마를 쓸어 올리며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자다 일어났다더니 아직 졸린 듯, 부어 있는 눈덩이를 손으로 비비다가 우찬이 아직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고 손을 내렸다. 괜스레 잠을 깨 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읽어 보지 않으십니까?”

“이따 보도록 하지.”

“지금 보셔야 합니다.”

“이제는 별걸로 다 고집을 부리는군.”

핏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우찬과 달리 이설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했다. 마침내 우찬과 눈을 마주친 이설의 눈썹 사이에 미세하게 주름을 잡혔다. 나랏일이야 어찌 되든 상관 말고 제 앞일이나 잘 처신할 것이지 어쩐지 비웃음이 났지만 굳이 티 내지는 않았다.

달이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는 떠날 생각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이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 어려워졌다. 달빛 아래에 연이설은 무슨 요사한 힘이라도 생기는 것처럼 자꾸만 사람을 곁으로 끌어들였다.

보고만 있어도 홀린 듯 옷을 벗기고 싶고 몸을 만지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은 욕정을 참는 일이란 맨정신으로도 쉽지가 않았다. 억지로라도 품으려면 몇 번이든 품었겠지만, 그것만큼은 범하고 싶지 않았다. 우찬 자신을 위한 것인지, 이설을 위한 것인지도 알 수는 없었지만.

“비은궁에서 제 토끼를 데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흐트러진 앞섬을 벗겨 어깨 아래로 내리는 상상에 잠겼던 우찬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자 움직이는 목울대가 이전보다 도드라졌다. 온몸의 살이 다 빠지다 못해 그나마 목에 붙은 살까지 다 떨어져 나간 탓이었다.

살결이 희고 체구가 여리여리 해도 계집처럼 보이는 일은 없었는데 목울대가 선명해진 걸 보니 새삼 이설이 사내라는 걸 실감했다. 포단 밑에 숨겨진 아랫도리의 모양도 자신과 다른 게 없는 사내다. 그런 이의 앞섬을 벗겨 강제로 범할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제는 그다지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별안간 토끼 얘기를 던져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설을 대신해 우찬이 수긍으로 답했다.

“제가 황송해도 되는 것입니까?”

이어진 말이란 게 황당하기 짝이 없어 우찬이 잠깐 할 말을 잃고 이설을 바라봤다. 하지만 여간 심각한 게 아닌 이설의 얼굴에는 농담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지?”

“폐하께서 혹 다른 의도가 있으신 게 아닐까 싶어서요.”

“다른 의도?”

“사람의 목숨도 한없이 가볍게 여기시는 페하께서 한낱 미물을 직접 거두셨다니 송구하오나 저는 마냥 황송하게만 생각되지 않습니다.”

몇 차례 혼절을 한 탓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설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화조차 나지 않아 그냥 한 번 웃고 말았다.

이설이 연국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비은궁 후원인 소야원에서 키우던 토끼를 데려왔다. 별일 아닌 목적으로 비은궁에 들렸을 때 토끼가 밥을 통 먹지 않는다며 궁인들이 푸념하던 것을 듣고 괜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한낱 짐승 따위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쓸 게 아니었지만 ‘삼설이 죽으면 마마께서도 상심이 크실 거야’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어느 궁녀의 말이 하필 마음에 걸렸다.

무슨 수작인지 토끼는 그간 밥을 챙겨 주던 궁인들보다 우찬을 더 잘 따랐다. 작은 짐승답게 하루 이틀쯤만 지나고 나니 살도 토실하게 올라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어 보였다. 지금은 이설이 없는 금원에도 잘 적응한 모양인지 먹이를 챙겨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크는 중이다. 사실 근래에는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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