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47)화 (247/300)

달의 황홀경

247화

“꼴 한번 우습군.”

작게 조롱하며 우찬이 태의와 금군을 번갈아 봤다.

“이만 나가 봐. 귀비와 긴히 나눌 얘기가 있으니. ……태의는 태금궁으로 가서 소의를 살펴보아라.”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떠나려던 태의는 그럴 생각이었다며 허리를 굽신거리면서 사라졌다. 금군은 우찬을 혼자 남겨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게 내키지 않는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 침소를 나갔다. 잠시 열린 문틈으로 차란이 아직 굳은 표정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들어오라 할까 하다가 아직 불쾌했던 것이 가시지 않아 마음을 접었다.

목이 마른 듯하여 일어나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빈 잔을 다시 가득 채워 자리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아직도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귀비의 얼굴에 잔을 기울여 물을 부었다. 쏟아지는 물을 피하려 귀비가 미친 듯이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다.

“괴로워?”

귀비가 막힌 입으로 욱욱거리며 소리쳤다.

“네놈들은 적당히라는 걸 몰라. 얌전히만 있으면 살길을 다 봐 주는데 왜 그렇게들 못 기어올라 야단인 거지? 너나 네 형제들이나 야만한 것들이란.”

“…….”

“다시 자결을 시도하면 자진 항복한 북의 백성들 중 사내들은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화전민 노예로 만들겠다. 알아들었느냐?”

눈물인지 우찬이 부은 물인지 알 길 없는 액체에 젖은 얼굴이 고요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이만하면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한 우찬은 귀비의 입을 틀어막은 수파를 배려 없이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귀비는 몇 차례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고 난 뒤 겨우 진정됐다. 붉게 충혈된 눈이 우찬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됐다.

“……비열하고 더러운 금의 황제야. 네까짓 게 그런 협박으로 나를 묶어 둘 수 있을 것 같으냐?”

처음 봤을 때와는 영 딴판으로 구는 귀비가 쉰 목소리로 표독스럽게 말했다. 까만 동공에 독기가 어찌나 가득한지 가만두면 피눈물이라도 철철 흘러넘칠 것 같았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작 버린 듯싶다.

“동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별로 애틋하지는 않은가 보군.”

“네 놈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남아 있는 동족들 역시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테니 그들도 미련은 없을 거다. 내 저승길 길동무로 삼아도 좋지.”

“역시 단단히 미쳤어.”

자리에 앉자 귀비의 시선이 따라왔다. 허풍을 떠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혀를 깨물고 자결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눈앞의 우찬이 너무 싫어서, 너무 분하고 원통해서 그럴 마음은 잠시 접어 둔 눈빛이었다. 온갖 저주의 말을 다 쏟아부어도 모자란 듯 귀비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생살을 불로 지져 이름을 새길 때부터 내 알아봤지.”

귀비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찬이 혀를 차며 공연히 허리춤에 찬 검을 만졌다. 철그덕거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여러 번 같은 행동을 반복하던 우찬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계획이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는 건 진작 알았을 텐데 이제야 자결을 시도했다?”

혼잣말을 하며 사색에 잠긴 듯 읊조리는 우찬을 보고 귀비가 온갖 상스러운 저주를 뱉어 대던 입을 다물었다.

“하필 증좌도 여의치 않아 날로 몸값이 오르는 역모 주동자 중 한 사람이?”

“…….”

“억측이라 우기지 않는 걸 보니 찔리는 구석이 있기는 한가 본데.”

“……기회가 있을 때 죽으려는 것뿐이야. 가만 있는다고 네 놈이 날 죽여 줄 것 같지는 않으니.”

“죽이는 건 어렵지 않지.”

우찬이 검을 반 뼘쯤 뽑았다가 손을 놓았다. 다시 아래로 떨어지며 검집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주변의 적적함을 일깨웠다.

아닌 척했지만 귀비가 깜짝 놀라 손을 움찔 떨었다.

“나도 네가 필요 없어진다면 언제든 죽여 줄 생각이야. 문제는 방법일 뿐.”

“사지를 찢어 죽이든 산 채로 배를 가르든 끓는 물에 삶아 죽이든 네 놈 원하는 대로 해! 그냥 죽여! 죽게만 해 달란 말이야!”

아까는 마른 송장처럼 맥없이 누워 있더니 슬슬 살 만해지기 시작했는지 귀비가 악다구니를 쓰며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손을 묶은 끈을 연결해 둔 침상 기둥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흔들렸다.

침상의 천장을 무너뜨린 뒤 깔려 죽을 셈인가. 귀비의 발작을 감흥 없이 지켜보던 우찬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손목을 감싸 만지며 귀비의 손목을 봤다. 처음 봤을 때는 제법 붉은색으로 선명했던 제 이름이 이제는 거뭇한 상흔처럼 보기 흉하게 번져 있었다.

굳이 우겨 보자면 ‘금우찬’이라는 글자라고 우겨 볼 수도 있겠다만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한낱 화상 상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이름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날 죽이기 전까지는 편히 눈감을 수 없다 발악하던 것도 한낱 객기였구나.”

“…….”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한 네가 그 몰골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주지.”

우찬의 여유 가득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선율처럼 흘렀다. 귀비에게서는 아무런 증좌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게 제법 반가웠다. 성가신 일을 벌였다고, 차라리 죽어 버리길 바라던 귀비였지만, 저 욕망 덕분에 필요한 걸 얻게 될 것이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우찬이 날카롭게 눈빛을 갈았다.

“역모에 가담하여 너와 내통하고 금을 배역했던 사람들을 모두 실토하여라.”

“내 가는 길이 더럽고 비참할지언정 네게 한 톨 도움이라도 줄까 싶으냐?”

예상한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답이라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시간을 더 끌고 싶지도 않았다. 슬슬 귀비와 독대하는 것이 지겨워질 참이었고 이설의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중이었다.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란 본래 천하고 야만한 것에서 시작된 종족이라 불을 아주 무서워한다지?”

“무슨 소리야!”

귀비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 지르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불에 타 죽은 시체는 재수가 없어 땅에도 묻지 않고 절벽에 던져 버린다고 하던데. 그리 흉하게 죽은 넋은 흙으로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구천을 떠돈다고도 하고.”

이제야 질겁하는 반응을 보이는 귀비를 보자 슬슬 말이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설을 찾으러 간 산에서 잠시 독대를 가졌던 우 미인이 참고하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양화성의 부족들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타지인들과 섞여 살아온 이민족들은 이제 개의치 않아 하는 미신이었다.

미신에 따르면, 불에 타 죽은 시체의 넋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다. 또한 이미 죽은 시체라 할지라도 화장으로 아주 불명예스러운 매장 방법이라고 했다. 화형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우 미인은 긴 세월 교류 없이 똘똘 뭉쳐 살던 다른 부족들에게는 어쩌면 사는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죽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끝내 실토하지 않겠다면 너를 산 채로 태워 한 줌은 돼지우리에 한 줌은 마구간에 남은 한 줌은 측간에 뿌려 주마. 온갖 오물에 뒤섞인 너는 죽어서도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이…… 이 비열한 새끼! 사내새끼와 더러운 비역질이나 하는 너 같은 놈이 무슨 권능으로 하늘을 다스리고 땅을 다스리는 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거의 달려들 기세로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러 대는 통에 밖에서 놀란 차란과 금군이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뛰쳐 들어왔다. 금군이 귀비의 어깨를 눌러 겨우 진정시키는 사이 차란이 우찬을 살폈다.

귀비가 머리를 흔들면서 얼굴에 튀긴 물을 닦아 내며, 우찬은 신경 쓸 것 없으니 두 사람 모두 나가 있으라 일렀다. 차란은 내키지 않는 듯 한 번 더 함께 있겠다 고집을 부렸지만, 완강히 거절하는 우찬에게 전처럼 능글맞게 두 번 반복하지는 않았다.

금군이 침상 기둥에 끈을 더 짧고 단단하게 묶었다. 팔을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된 귀비는 이제 좀 진정이 되어 우찬을 맹렬하게 노려봤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런 더러운 방법으로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다른 선택지를 주지.”

“…….”

“역모에 가담하고 너와 내통한 자를 실토해.”

“……어차피.”

악다구니를 쓰느라 한층 더 쉬어버린 목소리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짐작하는 자가 있는데 내 증언이 왜 필요한 거지?”

“증좌가 없어.”

이설이 내일쯤 전부 해독하게 될 서신이 떠오르긴 했지만 아직 어떤 내용의 글일지는 알지 못했다. 단순히 이민족이 꾀한 모의를 편국이 지지한다 따위의 성명서라면 애당초 아무 쓸모가 없다.

“증좌?”

귀비가 쉰 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천하의 금황제가 증좌가 없어서 죄지은 자를 잡지 못한다니 우습네.”

“이쪽도 그럴 사정이 있어서.”

대놓고 야유하는 조롱에도 우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었다. 잠을 자지 않고 버티는 것도 슬슬 몸에 무리가 오는 듯싶다.

비웃음으로 응수한 귀비지만 우찬의 제안을 다시 대번에 거절하기는 어려운지 한참을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자결에 실패하고 원통한 마음이었는데, 우찬을 맞닥뜨린 뒤 감정이 격해져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대범한 것은 물론 아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니 이 시점에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지가 무엇일지는 슬슬 파악하고 있을 거다.

한참 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귀비가 대답했다.

“나와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은 황궁과 깊이 연관된 자였어. 이름은 몰라.”

“이름도 모르는 이와 손을 잡고 이 정도 거사를 세웠다?”

“황궁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놈이었어. 내가 궁에 있는 동안에도 어렵지 않게 밀서를 보낼 수 있을 만큼.”

“밀서는 모두 어디에 뒀지?”

“읽자마자 모두 태웠어.”

우찬이 그럴 줄 알았다며 싱겁게 웃었다. 역시 아둔하지 않은 여인이다. 무암궁 전체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은 문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귀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우찬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귀비가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