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46화
상궁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 줄은 알고 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나아질 줄을 몰랐다. 초조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비볐다. 문득 어깨 통증이 며칠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의의 의술이 좋아 다행이었다. 발도 못 쓰는데 팔까지 쓰기 불편하면 정말 우울할 것 같았다.
“한숨 주무시면 저녁때쯤 깨워 드리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습니다.”
“서책이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그건 싫습니다.”
서책을 읽을 정신이 아니었다. 포단을 목 위까지 잘 덮어 준 상궁이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고는 창밖 날씨를 확인했다. 늘 그렇듯 쾌청하고 맑게 갠 늦은 오후다. 공기가 조금 서늘해진 것만 빼고는 여느 날과 다를 게 없었다.
“마마께서 너무 답답해하시거든 금원까지는 외출을 허락하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말입니까?”
“예. 정 지루하시거든 금원에 한번 나가 보시겠습니까?”
귀가 쫑긋 서는 제안에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포단을 박차고 일어날 뻔했다. 발을 움찔거린 것만으로도 전신이 찌르르 울렸다. 이 발로는 한 걸음도 발을 뗄 수가 없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반색을 하고 반길 거라 생각했는지 상궁은 조용히 있는 이설이 이상한 눈치였다. 외출 준비를 할까요, 하고 확인차 묻기에 누운 채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기에는 좀 피곤한 듯합니다.”
잠은 오지 않는데 피곤은 하다 하니 상궁도 영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지만 구태여 토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수파를 가져가 대야에서 물을 적시며 한마디 덧붙였다.
“마마께서 키우시던 하얀 토끼 말입니다. 그 토끼도 지금 금원에 살고 있습니다.”
“삼설이가요?”
수파의 물기를 꽉 짜내던 상궁이 순간 헛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누가 봐도 삼설의 이름을 듣고 웃었다고밖에 볼 수가 없었다.
삼설이의 이름을 처음 짓고 비은궁 궁인들에게 알린 뒤 모두가 보인 반응과 너무 똑같아서 괜스레 민망해졌다. 이름은 그저 이름인데 웃기는 이름은 뭐고 또 촌스러운 이름은 뭔지 사람들의 생각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웃음을 참은 상궁이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대답했다.
“예 그 작은 토끼요.”
“궁을 떠날 때 분명 소야원으로 데려온 것 같은데. 제가 금원에 두고 갔었던 건가요?”
“아닙니다. 떠나시고 며칠 안 되어 폐하께서 직접 비은궁에 가셔서 데려오셨습니다. 그 후에도 가끔씩 금원에 나가 먹을 것도 챙겨 주셨고요. 부족함 없이 돌보라 하시어 저희 궁인들도 수시로 나가 살펴보고 있습니다. 탈 없이 크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직접 데려오셨다고요?”
삼설이가 잘 지내는 것보다 우찬이 직접 데려와 살펴본다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평소 삼설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우찬이 아니었던가. 우찬과 단둘이 있을 때 삼설이가 다가와 쪼르르 안기면 그걸 그렇게 괘씸하게 여겼다. 말 못 하는 작은 짐승에게 왜 그리 화를 내시냐고 물으면 비난의 화살은 이설에게로 향하기도 했다.
혀를 쯧쯧 차는 우찬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주눅이 든다거나 속이 상하지는 않았다. 얼른 삼설이를 소야원 밖으로 내보낸 뒤 맞은편에 앉으면 우찬이 다시 웃을 거라는 걸 이전의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비은궁 궁인들의 목숨 줄을 담보로 잡아 저를 위협하는 우찬이기에 삼설이에게도 해를 끼칠까 염려했다. 어쩌면 벌써 무슨 사달이 일어났어도 일어났겠구나 하는 마음까지 들었던 적도 있다. 기우였을 뿐만 아니라 배은망덕한 생각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폐하께서 왜……, 왜 제가 키우는 토끼를?”
지금의 우찬이 제게 하는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목 잘린 삼설이의 사체를 가져와 궁 밖으로 달아난 이유를 말하라 윽박을 질러도 몇 번이나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안 하는 것은 물론 이따금 금원에 나가 밥까지 챙겨 주고 있다 하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마께서 궁을 비우신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시름시름 앓은 모양입니다. 원래 사람 손에 길든 산짐승들은 먹이를 챙겨 주는 사람이 바뀌면 잘 믿지 못하니까요.”
나긋한 목소리가 옛날얘기 해 주듯 다정하게 귀에 감겼다. 차게 젖은 수파가 이마에 닿자 얼굴의 열기가 다시 한풀 꺾이며 나른한 기분이 찾아왔다. 눈을 감아도 상궁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그게 참 희한하게도 폐하께서 주신 먹이는 잘 먹더랍니다. 비은궁 궁인들은 발소리만 들려도 도망가기 일쑤인데 폐하는 따르기도 잘 따르고요. 하여 폐하께서 걱정하시다 결국 태금궁으로 데려와 금원에 풀어두셨습니다.”
사의시에서 주고 간 환약이 약효가 제법 좋은지 그새 머리 아프던 것이 나아지고 잠이 쏟아졌다. 해가 질 때쯤이 되니 창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선선해진 덕분인 것도 같았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상궁이 얘기를 들을수록 기분이 편안해졌다.
“하찮은 짐승 따위가 밥도 못 먹고 굶어 죽으면 궁에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울 사람이 있다 하시면서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보시고 들리는 것만 들으세요, 마마.”
“예에…….”
마마, 소리에 이설이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으니 닫지 말아 달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다행히 시원한 공기가 볼에 닿는 걸 보니 창을 완전히 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설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잠결에 발을 다친 것도 잊고 생각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밖에 나가 삼설이를 한 번 봐야겠다고. 기분 좋은 생각에 서서히 잠이 들었다.
*
궁인 한 명 없는 넓은 복도가 익숙한 듯 낯설었다. 옅게 흩어지는 향냄새는 이곳에서는 처음 맡아 보는 것이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무암궁에서는 그 어떤 향초를 금한다 명했는데 태의는 아직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 깨어나셨습니다.”
복도 끝의 방. 문 앞에 서 있던 차란이 우찬을 보고 딱딱하게 말했다. 눈은 마주하고 있되 전처럼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어쩔 수 없다는 듯, 우찬과 함께 있는데 마뜩잖은 얼굴이었다.
“태의와 함께 있으니 들어가 보시지요.”
문을 열어 주려는 손을 치고 직접 문을 연 뒤 안으로 들어섰다.
한때 정신을 잃다시피 잠을 청하곤 했던 낯익은 침상 위에 송장 같은 몰골의 여인이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흐리게 풀린 동공에 초점이 없어서 눈을 뜬 채로 죽은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는 우찬을 보고 태의가 일어나 맞았다. 그리고 자리를 양보한 뒤 옆으로 물러났다.
“저건 뭐지?”
우찬이 귀비의 얼굴에 턱짓을 하며 물었다. 귀비의 입에 하얀 무명천이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져 있었다. 태의가 제 입으로는 말하기 껄끄러운 듯 망설이며 수염 난 턱을 긁었다. 옆에 서 있던 금군이 대신 대답했다.
“정신이 들자마자 혀를 깨물고 다시 자결을 시도하였습니다. 맥을 짚던 태의가 놀라 자기 수파를 입에 넣었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우찬이 경멸의 시선을 아끼지 않고 귀비를 내려다봤다. 풀린 동공이 이내 초점을 맞추더니 우찬을 향했다. 원한과 분노에 휩싸인 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 귀비가 자결을 시도했다. 금군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세안을 하라 떠 놓은 대야 물에 얼굴을 처박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생존은 본능이기에 자결에 탁월한 방법은 아니었다. 제 의지로 직접 물에 코를 박고 죽을 시도를 했다니 그 독기만큼은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지난밤 또 잠들지 못하고 밤을 새우고 있던 우찬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둘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이미 퇴궐한 태의를 불러들여 팔다리가 어찌 되든 목숨만은 살려 놓으라 명한 지 거의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귀비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쯤 우찬은 고민 중이었다. 앞서 이설을 감시하고 있던 호위군이 다녀간 참이었다. 이설이 목욕을 하러 들어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대전에서 대신들과 정무를 보던 우찬은 당장에라도 태금궁으로 찾아가려 했지만 이설은 무사하며 욕탕에 뜨거운 열기에 잠시 혼절하신 것이라는 호위군의 다급한 말에 생각을 고쳤다.
아픈 이설을 본다고 좋은 말이 나가지도 않을 것이며 이설이 반기지도 않을 거란 걸, 굳이 실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래서야 왜 자결을 하려고 했는지 듣기도 어렵잖아.”
다행히 탈 없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귀비를 확인하러 왔다. 오는 내내 이설의 걱정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어 걸음을 돌려 태금궁으로 먼저 찾아가 볼까 생각했던 것도 여러 번이었다.
우찬은 계획에 없던 귀비의 자결 소식에 이를 갈았다. 오늘에 와서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한껏 들었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죽기나 하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군.”
귀비가 욱욱거리는 소리를 입 밖으로 냈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튼 좋은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분해 마지않아 결국 눈물까지 흘리는 눈동자에 비치던 자신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문득 이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태의.”
“예, 예 폐하.”
“소의는 무탈한가?”
“예, 아주 무탈하십니다. 찬 기운을 타고난 사람이 몸에 급히 열이 오르면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 늙은이가 앞으로 더 신경 써서 탕약을 달여 올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그래야 할 거야. 낙향해서 고손자까지 보려면 오래 살아야 하잖아.”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우찬의 말에 태의가 사색이 되어 숨을 히끅거렸다. 말을 더듬으며 당장 숨넘어갈 것 같은 호흡으로 대답하며 뒤로 물러서자 이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금군이 조용히 물 잔을 건넸다.
태의가 겨우 숨을 진정시키는 사이 우찬은 귀비와 눈을 마주치고 대치 중이었다. 귀비는 손이 머리 위로 묶여 고정된 상태라 눈물을 훔칠 수가 없었는데, 움푹 파인 볼이 흠뻑 젖은 꼴이 참 볼품없었다.
어째 저 모습을 보니 다시 이설의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