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45화
“이제 정신이 좀 드시옵니까?”
“…….”
“아직 머리가 많이 아프실 테니 무리하지 마십시오.”
무겁게 내려와 감기는 눈꺼풀을 여러 차례 깜빡인 끝에 흐리멍텅한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졌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 이미 익숙한 목소리에 안도하던 참이었다. 손아래 부드럽게 감기는 비단 포단이 포근했다.
주름진 얼굴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보일 정도로 늙은 태의가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손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맥박도 이제 정상으로 돌아왔네. 너무 염려치 말게나.”
“내내 아무런 조짐도 없으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중독 후유증으로 병환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염려됩니다.”
“그런 것 같지는 않네. 마비 증상이 강할 뿐, 후유증이 지독한 향초는 아니야.”
심각한 얼굴로 걱정하는 상궁을 올려다보며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이설에게 말했다.
“식후마다 드시는 마마의 탕약은 화(化)의 기운을 높여 주는 약들을 고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체질상 찬 기운을 타고나신 마마께서는 몸에 담기 힘든 화기였나 봅니다. 온탕에서 목욕까지 하셨으니 몸에 열이 많이 오른 상태이셨을 겁니다. 게다가 목욕 중 냉수를 드셨다고요?”
이미 상궁에게 들은 바가 있을 터. 다 알면서도 꾸짖기 위해 일부러 다시 묻는 노인네의 속내가 음흉했다.
이설 역시 태의의 의도를 다 알면서도 홀린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자다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정신이 약간 몽롱했다. 태의의 말을 듣고 보니 그간 태금궁에 있는 동안 몸이 후끈거렸던 일이 자주 있었던 것 같다. 찬바람에 추위를 타는 것과는 별개로 뜨거운 차를 마시면 배 속이 뜨듯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더운 속을 식히기 위해 냉수를 마시는 것은 안 좋은 습관이십니다. 허허, 어찌 이런 건 또 폐하를 꼭 닮으셨는지 원.”
태의는 굳어진 이설의 표정을 살피지 못하고 연신 사람 좋은 얼굴로 웃어 댔다.
“냉수보다는 미지근한 차를 드시는 게 좋습니다. 너무 뜨거운 차도 좋지 않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더 조심해야 할 건 없는 겁니까?”
태의는 미처 살피지 못한 이설의 기분을 눈치챈 상궁이 끼어들었다. 태의가 앞으로 다른 탕약을 지어 올리겠다며 복약법을 설명하는 사이 이설은 발목을 옆으로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순간 전신에 퍼지는 아찔한 고통에 머리털이 쭈뼛 서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마마? 안색이 갑자기 안 좋아지셨습니다.”
“머리가, ……머리가 좀 아픕니다.”
고통의 한숨을 간신히 뱉어 내며 이설이 이마를 쓸어 넘기다 이마 위에 올려져 있던 젖은 수파를 떨어뜨렸다. 상궁이 주워 찬물에 한 번 헹군 뒤 물기를 꽉 짜서 다시 이마에 올려 주었다. 이마에 닿은 찬기만으로 긴장이 한결 풀린 기분이었다.
“본래 몸에 열이 오르면 머리앓이가 심해지는 법입니다.”
“이를 완화하는 향초나 약은 없습니까?”
“몸에 열기가 식으면 머리가 아프신 것은 차츰 나아질 것입니다. 탕약을 지어 올릴 테니 걱정 마시옵소서. 그리고 지금 마마의 상태에 환각이나 마비를 일으키는 향초는 독이나 다름없습니다. 태의로서의 소견뿐만 아니라 폐하께서도 허락지 않으실 겁니다.”
황궁에 오래 남은 인사치고는 눈치도 없고 겁만 많은 편인 태의가 쓸데없이 단호했다. 구슬리고 설득한다고 황명을 거스르고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픈 건 혼자 참는 수밖에 없었다.
“한숨 푹 주무시면 이따 저녁 탕약을 들일 때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지금은 급히 진찰을 다녀올 곳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태의가 진찰을 하며 사용했던 것들을 챙겨 일어섰다. 그러자 상궁이 불쾌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마마께서 당장 누워 계신데 이보다 급한 진찰이 무엇입니까, 태의?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상궁의 위세에 눌린 태의가 어색하게 웃으며 턱에 수염을 매만졌다.
“거, 봐주게 좀. 무암궁의 귀비 마마께서 어젯밤부터 사경을 헤맨다 하시니 나라고 별수 있겠나? 이 또한 황명이라네.”
상궁이 이만큼 당황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입술만 달싹이는 상궁을 내버려 두고 태의는 분위기가 어떻게 이상해진 줄도 모른 채 이설에게 인사한 뒤 침소를 나갔다.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상궁은 새 물로 갈아 오겠다며 대야를 들고 나갔다.
겨우 혼자가 된 이설이 눈을 감았다. 금세 미적지근해진 젖은 수파를 옆으로 치우고 몸을 돌려 모로 세워 누웠다. 작은 움직임에도 발목이 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수백 개의 칼이 동시에 발목을 베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 태의와 상궁에게는 들키지 않은 것 같다. 목간 바닥에 쓰러진 이후로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목간에서 막 나온 몸에 열이 펄펄 오른 것을 보고 태의는 그 때문에 혼절한 것이라고 짐작하는 듯해 천만다행이었다.
인기척에 몸을 다시 돌리느라 통증이 한 번 더 찌릿하게 발목을 울렸다. 등이며 이마에 식은땀 맺히는 걸 들킬까 걱정될 정도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상궁이 새 대야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로 누워 보십시오. 몸을 닦아 드리겠습니다.”
상궁이 물에 적신 수파를 꽉 짜며 말했다. 당황한 이설이 포단을 목 끝까지 올려 덮으며 몸을 가렸다.
“싫습니다.”
“팔다리만 닦아 드리겠습니다. 몸의 열을 식히려면 이 방법이 좋습니다.”
“그럼 거기 두고 나가세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
“상궁이 억지로 제 옷을 벗겨 몸을 닦았다고 폐하께 고하길 바랍니까?”
젖은 수파를 포개어 접던 상궁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비겁한 줄은 알고 있지만, 상궁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이것만큼 적절한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맨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이설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우찬에게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까닭은 상세히 알지 못하나 아무튼 우찬은 이설의 몸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까탈스러울 만큼 엄격했다.
“그것은…….”
눈에 띄게 당황한 상궁이 이설의 눈길을 피했다.
“두고 나가세요. 제가 직접 닦겠습니다.”
강경하게 나가는 이설과 대치하던 상궁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수파를 내려놓고 뒤를 돌았다. 일각쯤 후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나가는 상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이설이 몸을 일으켰다.
발목이 아픈 것과는 별개로 몸에 화기가 많이 쌓였다는 말은 진짜인지 여름날 땡볕에 서 있는 것처럼 몸이 더워졌다. 일부러 포단도 얇은 것으로 바꾼 모양인데 맘 같아선 이마저도 치워 버리고 싶었다.
일각쯤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포단을 치우고 모든 번민과 고통의 화근을 확인해 보려던 이설이 손을 멈칫했다.
이내 이설이 옷고름을 확 풀어 헤쳤다. 얇은 야장만 하나 걸치고 있던 탓에 옷고름이 풀어지자 맨가슴이 드러났다. 단기간에 살이 확 빠져 갈비뼈가 희미하게 드러난 앙상한 몸뚱이를 힐끗 내려다본 뒤 이설이 어깨에 걸린 웃옷을 뒤로 젖혀 내리며 말했다.
“보고 있는 줄 압니다. 상궁이 들어올 때까지 물러가 있으세요.”
호위군이 분명 어딘가에서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다시 확인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 이 일을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적막한 분위기 속에 잠시 머뭇거리던 이설이 팔 한쪽을 뺐다. 그러자 문갑 뒤에 그림자가 반으로 나뉘며 시커먼 형체가 다급하게 움직였다.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목소리가 낯익었다. 그나마 얼굴을 좀 봤던 흑영은 아닌 듯싶다. 호위군이 천장을 쳐다보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자 위에서 아주 미세하게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천장을 봤다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는 이미 침소가 텅 비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활짝 열려 있던 창도 닫혔다.
온전히 혼자가 된 곳에서 이설이 다급히 포단을 걷었다. 헐렁한 바짓단을 거두자 시뻘겋게 흉이 진 살갗이 보였다. 태의가 다녀간 이후로 점점 더 고통의 무게가 더해지는 발목은 가볍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도드라지게 튀어나온 복사뼈 옆으로 살을 지진 흔적이 인두 모양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그리고 붉게 흉이 진 상처 위로 더 붉고 선명한 이름이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름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붉은색이 든 종이나 천에 붉은 염료로 글자를 쓴 것과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하.”
무척 아프다는 사실도 잊은 이설이 허망함에 발목을 꽉 잡았다. 너무 아파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고통까지 감수하였는데도 아직 보란 듯이 남아 있는 세 글자에 정신이 완전히 나갈 것만 같았다.
살을 녹일 만큼 인두가 충분히 뜨겁지 않아서였을까? 불에 달군 인두였다면 좀 다를까? 인두가 안 된다면 칼로 살을 도려내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다. 생살을 칼로 도려낸다면 얼마나 아플까?
참을 수…… 있을까?
“마마, 아직이십니까?”
“아직입니다.”
나간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은 상궁이 재촉했다. 이설은 상궁이 두고 간 젖은 수파로 가장 먼저 얼굴을 문질러 닦아 정신을 차리고 대충 몸에 물기가 보일 정도만 닦은 뒤 옷을 여몄다.
아직 화끈한 열감이 남아 있는 발목도 닦으려고 했지만 바람만 스쳐도 아직 경기가 날 만큼 아파서 내버려 두었다. 대신 바짓단을 헐렁하게 풀어 가린 뒤 포단 안으로 숨겼다. 생각해 볼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들어오십시오.”
이설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 상궁이 들어왔다. 창문을 열어 달라는 말에 자신이 창문을 닫고 나갔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열은 좀 내린 것 같으십니까?”
“글쎄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사의시에서 머리앓이에 좋다는 환약을 보내왔습니다. 드시고 한잠 푹 주무세요.”
까만 종이에 쌓인 환약을 건네받아 물과 함께 삼켰다. 씹지 않았는데도 쓰고 떫은 환약 맛이 혀 위로 녹아들었다. 얼굴을 찌푸리는 이설에게 상궁이 과일 향이 나는 차를 건넸다. 역시나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밍숭맹숭한 온도였다. 이설은 한 입 맛만 본 뒤 물렸다.
“얼굴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마마. 태의를 다시 불러올까요?”
상궁이 포단을 정리하며 이설의 얼굴을 살폈다. 모르긴 몰라도 이설은 제 얼굴이 지금 하얗게 질려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고개를 저었다.
“귀비께서 사경을 헤맨다 하시니 더 급한 곳에 계시는 게 맞겠지요.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런데 상궁.”
“예.”
“혹시 폐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계십니다.”
뭘 알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건만 차분하게 대답하는 상궁은 새로 가져온 수파를 적셔 이설의 이마에 올려놔 주었다. 이설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자 덧붙인다.
“마마께서 쓰러진 직후 대전에 사람을 보내 알려드렸습니다.”
“그럼 혹시 폐하께서는 지금 무암궁에…….”
“마마.”
말끝을 흐리는 이설의 이마를 수파 위로 살짝 덧누른 뒤 상궁이 일어섰다. 단호한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꾸짖음을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괜한 걱정 마시고 푹 쉬기만 하세요. 너무 깊은 생각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시고 들리는 것만 들으세요. 곁에 있는 사람을 믿고 의지하셔야 마음이 편해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