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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4)화 (244/300)

달의 황홀경

244화

지금 와서 후회한다 한들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변명을 하는 것도 우습다. 분명 제 입으로 우찬을 원망한다고 했다.

가끔씩 우찬이 물었다. 나를 원망하느냐, 하고. 농을 치느라 웃으며 물었던 적도 있고 서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찬 소리로 물은 적도 있었다. 우찬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같은 것을 물었지만 이설은 항상 똑같은 답을 했다. 폐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이설은 정말로 우찬을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겪고 있는 이 문제와 닥친 상황을 원망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우찬의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졌다. 정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은애하는 우찬 때문에 이제 제 발로 황궁을 떠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은애한다는 말로 사람 마음을 움켜쥐고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어 놓은 뒤 행하는 일들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한없이 체감하면서도 결국 우찬의 옆에 남기를 선택한 자신을 이해하는 게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이게 맞는 거야.”

맞는 일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혼잣말을 했다. 문득 누군가 지켜본다는 사실이 떠올라 민망함에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들고 있던 서신에 시선을 댔다.

글자라고도 하기 힘든 뒤죽박죽 문자들이 흰 종이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흙 따위의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긴 하지만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이미 소운이 있을 때 대강 훑어보고 이해했다.

지금 바로 해독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해독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풀이하기 쉬웠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서신은 금국의 황궁과 연이 깊은 누군가가 편국에 군 원조를 부탁하며 그 대가로 금의 서쪽 지방 영토를 넘겨주겠다 약조하는 밀서였다. 서신을 심부름하는 자들은 몰락한 북방의 부족민들로, 많은 이민족이 금황제를 몰아내려는 거사에 힘을 더하고 있다는 내용이 제법 비장했다.

황궁과 연이 깊은 누군가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대로 손조익일 게 분명했다. 정황상 손조익이 확실했고, 그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찬은 그를 역모 주동자로 처리할 것이다.

이설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접힌 선대로 종이를 깔끔하게 접은 이설이 일어나 책장 옆에 문갑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아까 차란이 문갑 서랍에서 꺼내 간 것이 이게 아닌가 싶다. 서신은 돌고 돌아 다시 문갑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누구 있습니까.”

아직 목이 막힌 소리로 밖을 향해 큰소리를 냈다. 곧바로 상궁이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목욕을 좀 하고 싶습니다. 목간에 물을 데워 주세요.”

“곧 준비하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상궁이 뒷걸음질로 침소를 나가려고 했다. 이설이 잠깐, 하고 붙잡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목욕 시중은 필요 없습니다.”

“예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소인은 문밖에서 기다릴 것입니다.”

그렇게 싫다 몇 번을 말했을 때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상궁이 황명에는 대단히 순종적이었다.

“목욕 중 몸에 자꾸 열이 올라 어지러우니 차가운 냉수도 준비해주세요.”

“목욕을 할 때에는 몸이 더워지더라도 냉수는 드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마마.”

“그래도 그렇게 준비해 주세요.”

날이 아주 더운 날 땡볕에 오래 있을 때가 아니고서야 냉수는 좀처럼 마시지 않는 이설의 부탁이었다. 주 상궁이나 비은궁의 궁녀들이 봤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을 테지만 이설을 가깝게 알지 못하는 태금궁의 상궁은 다소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알겠다 대답했다.

기왕이면 얼음도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설의 말에 상궁은 당황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큼큼, 헛기침을 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물이 다 데워졌다는 상궁을 따라 목간으로 향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찔끔찔끔 걷는 것을 보고 상궁이 아직 발이 불편하냐고 물었다. 이설은 그냥 대답을 얼버무렸다.

“갈아입으실 옷과 말씀하신 냉수는 안에 준비해 놓았습니다. 소인은 밖에서 기다릴 테니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부르십시오.”

혼자 목간에 이설을 두는 게 마뜩치 않은 상궁을 겨우 밖으로 내보낸 뒤 문을 걸어 잠갔다. 더운물로 데워진 목간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고 뿌연 수증기 때문에 앞이 흐릿했다.

문이 잠긴 것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실수로 큰소리를 내더라도 상궁이 당장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희뿌연 수중기를 헤치고 목간의 구석으로 갔다. 찬공기를 데우기 위해 종일 끓이고 있는 물과 지난번 목욕을 할 때 봐 두었던 인두가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목욕통 아래에 불에 달군 자갈을 깔아 놓았는데 그것들을 뒤적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가끔 궁녀들이 포단 아래를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사용하는 것도 보았다.

이설은 인두를 집어 들어 물을 꿇이는 아궁이 아래에 던지듯 밀어 넣었다. 쇠붙이로 만든 꼬챙이가 생각보다 무거워 바닥에 질질 끌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 뒤 서둘러 왼쪽 발목에 감아 두었던 천을 풀었다. 처음 봤을 때 모습 그대로 붉은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직도 이 이름만 보면 울컥 서러움이 치밀어 올라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이깟 이름 때문에…….

세 글자 위로 손톱을 길게 긁어 붉은 가로 선을 만들었다. 붉은 선에 가려 이름이 지워질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살갗을 긁어낼 수 있었다.

“마마, 소인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송구하오나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저는 별일 없으니 편히 일 보고 오세요.”

하늘이 돕는 듯 잠깐 자리를 비우겠다는 상궁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궁이 완전히 근처를 벗어날 정도의 시간을 기다리며 허겁지겁 옷을 벗고 목욕통에 들어갔다. 물 안으로 정수리까지 푹 담가 적시자 더운 물에 온 몸이 노곤노곤하게 녹아들었다. 갑자기 지금부터 하려는 모든 일들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괜스레 우울한 마음이 들어 다리를 모아 앉았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자 발목께에 닿은 손에 도톰하게 올라선 살갗이 느껴졌다. 평생 이 이름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어느 정도 몸이 데워졌다 싶었을 때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몸을 닦고 옷을 갈아 입고 머리에 물기를 짰다.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작은 비단보를 두껍게 접어 입에 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인두를 달궈야 살을 녹일 만큼 뜨거워지는지 알지 못한다. 이쯤이면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해 아궁이에서 꺼내 들었다. 인두의 손잡이까지 후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상궁이 준비해 둔 냉수는 얼음이 거의 다 녹았지만 아직 찬기는 충분했다. 표면에 손등을 대 온도를 가늠한 뒤 이설이 어금니를 더 꽉 깨물었다. 더 망설인다면 결국 끝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이설은 용기가 생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지금이 딱 알맞은 때다.

“읏!”

불에 달구어진 인두 끝을 발목 가까이 가져가자 화끈한 열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이 별것도 아닌 것을 위해 사람들이 멀리 누군가를 찾아가는지 깨달았다. 자기 신체를 인두로 지져 상처를 내는 짓은 제정신 가진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읍, ……읏!”

후회하기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설이 인두 끝을 발목에 댔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발목뿐만 아니라 전신에 퍼지며 목청이 찢어질 듯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금니에 꽉 물려 입을 막은 비단보로도 찢어지는 신음을 완전히 차단할 수가 없었다.

결국 참다 못해 손에 힘이 빠져 인두를 놓쳤다. 앉은 자세로 발목을 지지고 있던 이설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벌어진 입에서 비단보가 떨어져 나가고 그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 젖었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라리 정신을 잃는 게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에 몸서리가 쳐졌다.

울음소리를 간신히 참으며 이설이 일어나 인두가 떨어져 나간 발목의 상처를 확인했다. 이름은 온데간데없고 붉게 화상 입은 자국만 보기 흉하게 발목을 덮었다. 이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냉수 잔을 들어 그 위에 조심스레 부었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순간 멈췄다.

“으으……,”

다시 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아래턱이 파르르 떨렸다. 시야가 뿌옇게 변한 것이 수증기 때문인지 눈물이 앞을 가려서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정신을 잃지 않은 게 놀랍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궁 밖에서 보냈던 하루하루를 모두 합쳐도 방금 겪은 일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안 됐다.

“마마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느 틈에 돌아온 건지 상궁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설이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마마, 하고 한 번 더 이설을 불렀다.

“……깜빡 잠이 든 것 같습니다. 별일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목소리가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더운물에 너무 오래 계시는 건 좋지 않으니 몸이 불편하시거든 이만 침소로 돌아가시는 게 어떠하신지요.”

“조금만 더 이따 일어나겠습니다.”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대답하자 다행히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한 상궁이 알겠다며 입을 닫았다. 바닥에 손을 짚어 심호흡을 여러 차례 한 후 얼굴을 비벼 눈물을 닦아 발목을 들여다봤다.

붉은 화상으로 뒤덮인 발목에 이름은 이제 희미한 흉만 남았지만 얼마나 오래 가려져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아직 화끈한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자국 위에 냉수를 수차례 더 부었다. 일부러 다른 한 손으로는 발을 붙잡았는데도 발이 혼자 덜덜 떨리며 고통을 밀어내려 애썼다. 이설은 신음을 참으려고 다시 비단보를 입에 물었다.

붉어진 살갗 위로 다시 천을 감아 다시 가리는 게 고역이었다. 그 위로 입 바람만 불어도 머리털이 쭈뼛거릴 정도였는데 천으로 감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바지 밑단을 묶지 않고 펼쳐 임시방편으로 아래를 가렸다.

바닥에 철푸덕 앉아 제가 벌인 짓들을 돌이켜봤다. 침과 눈물에 젖은 비단보와 아직도 열이 다 식지 않은 인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제 스스로 한 짓이라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사실 기분만 그럴 뿐 발목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오는 통증 때문에 웃음조차 쉽게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아픈 탓에 생각이라는 게 완전히 멈춰 버린 것 같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은 듯 목간을 나서야 하는데 자꾸만 몸에 기운이 빠졌다. 잠시 후 상궁이 아직 목욕 중이냐고 물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채로 발견됐다가는 우찬의 귀에 들어갈 테고 그럼 또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거라는 걱정이 뻗쳤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상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간 문이 벌컥 열렸다. 바닥에 앉아 있던 이설은 놀라 다급하게 태의를 부르는 상궁을 마지막으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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