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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3)화 (243/300)

달의 황홀경

243화

“우선 이 글자들은 제가 사용하는 암어는 아닙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던 우찬과 달리 소운이 눈에 띄게 실망을 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빈말이나마 작은 소리로 그러십니까, 하고 수긍하는 목소리에 이설이 말이 겹쳤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을 주시면 풀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몇 가지 겹치는 단어들을 보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고요.”

“그렇습니까?”

갑자기 안색이 환하게 밝아진 소운이 들뜬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설은 종이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유달리 진지하게 깜빡이는 두 눈이 뭔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두고 보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찬은 아예 이설 쪽으로 몸을 돌려 빤히 지켜보며 버릇처럼 왼쪽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요 며칠 손목이 욱신거렸다. 지난 며칠 동안 무리한 탓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끝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독 방법을 알려 주시면 저도 마마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묘하게 일그러지는 우찬의 얼굴이 소운에게 돌아섰다. 이 일을 핑계로 이설과 같이 붙어 있을 셈인 것 같았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간 소운에게만은 너무 관대하게 굴었던 것을 최근에 들어 종종 후회하기 시작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소운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이설은 우찬보다 먼저 고개를 저었다. 언뜻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이 억지로 웃음을 띄웠다.

“새로 알려 드리기에는 복잡한 과정입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혼자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해독이 모두 끝난 후에도 상국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완곡한 거절로 고개를 젓는 이설에게 소운도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자로서 갖는 실망감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럼 서신은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베껴 쓴 사본이 있으니 혹 훼손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는 소운을 보고 이설이 아쉬운 듯 눈꼬리를 내렸다. 연분홍색으로 부어오른 눈두덩이가 무겁게 깜빡였다.

쉬고 있던 이설에게 대단히 민폐를 끼쳤다는 말로 사죄하며 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찬의 눈치를 한 번 힐끗 보긴 했지만 붙잡아 달라 눈짓을 하는 것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사안이 그럴듯하여 이설을 만날 수 있게 허락해 줬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볼일이 끝난 마당에까지 두 사람을 떠들게 놔둘 생각이 없다는 것도.

“부디 쾌차하시어 시일 내에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라 일어서려는 이설을 만류한 뒤 소운이 뒤돌아섰다. 떠나기 전 우찬에게 짧게 인사한 것이 근래 봤던 것 중 가장 성의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을 치고 문이 열린 참에 마실 것을 내오라 일렀다.

윤 내관이 직접 술병을, 뒤따르는 궁인이 차를 내오기까지의 시간 동안 이설은 조용히 서신만 들여다봤다.

“해독할 수 있다는 말은 진심인 것이냐?”

“예.”

단답으로 뚝 떨어지는 말에 망설임이 없었다.

“태자에게 네가 쓰는 암어를 가르쳤느냐?”

“몇 가지 쉬운 변환 방법을 알려 드렸습니다. 이민족들이 쓰는 암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대개 동일하여 제가 사용하는 암어와도 비슷하게 풀이할 수 있을 겁니다.”

“습격을 당했던 날 동굴에서 네가 옷을 찢어 적었던 암어와 뿌리가 같단 말이냐?”

“그런 셈입니다.”

“암어는 어디서 배운 것이냐. 네 호위무사도 알고 있는 걸 보니 연국의 왕족들만 은밀히 사용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마마마께 배운 것입니다. 어마마마께서는 어렸을 적 외조모께 배운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시작이 어딘지는 모른다 하셨습니다.”

묻는 말에 조곤조곤 잘도 대답하는 이설은 서신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입술만 쫑알거렸다. 미간 사이가 좁혀진 얼굴이 지금 하는 일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여 줬다. 창백하게 핏기가 가신 심각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우찬은 언젠가 저 얼굴에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던 과거의 날들을 떠올렸다.

글씨는 곧잘 쓰는 이설이 그림에는 영 재능이 없다는 걸 실감한 날이었던가. 귀한 붉은 염료를 종이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려 놓은 뒤 동백꽃이라 우기는 작태부터가 남달랐다. 일부러 놀리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태자의 실력과 비교를 할 때면 새 종이를 가져와 전보다 몇 배는 더 집중하여 그림에 몰두했지만, 결과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나무 한 가지 한 가지를 그릴 때의 표정과 같다. 볼이 좀 움푹 팼고 턱이 갸름해진 것만 빼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연이설.”

“……네.”

뒤늦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하는 눈빛만 빼고는 그랬다.

새까만 동공이 흐리멍덩하게 우찬을 담았다. 아까 전 원망한다며 울음과 함께 토해 냈을 때처럼 감정이 또렷하지가 않아 기분이 쉽게 읽히지 않았다. 넋이 뿌리째 쑥 뽑혀 나가고 빈껍데기만 남아 앉아 있는 듯했다.

“됐다.”

억지로 안아 품으려고 했던 바로 아까 전의 일이 먼 옛날의 일처럼 흐릿해졌다. 충격을 받아 머리를 싸매고 포단 아래에 들어앉아 울다 혼절했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냐마는. 태연한 표정 또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차와 술 사이에서 고민하던 우찬이 결국 술병을 집어 들었다. 술로 가득 채운 잔을 집어 들자 그때까지도 내내 우찬을 쳐다보던 이설이 퍼석한 입술을 뗐다.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어렵게 꺼내는 얘기라는 걸 강조할 셈인지 목 막힌 소리가 조금 안쓰러웠다.

“기어코 비은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그리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넌 후회할 거야.”

아직 비은궁에 걸린 이민족 여인의 머리를 내리라고 하지 않았다. 우찬이 별말 하지 않는 이상 그 머리는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고 바람에 쓸려 사라져 백골만 남을 때까지 영영 그곳에 걸려 있을 것이다. 언제든 이설이 그 모습을 본다면 좋은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코웃음과 함께 조롱하듯 던지는 말에 이설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설은 말을 할 수 없었던 우장절 이후로도 종종 제 의사를 고갯짓으로 대신하곤 했다. 처음에는 본인도 몇 번 뜨끔 하는가 싶더니 점점 아무도 지적하지 않자 고갯짓도 어느새 자연스러워졌다. 우찬은 이설의 이런 맹한 행동이 버릇없기는커녕 어처구니없이 귀여워 내버려 뒀다. 이설만은 남들과 달리 예외가 너무 많았다.

“목욕 시중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느닷없는 얘기를 꺼내는 이설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고민을 거듭하다 겨우 꺼낸 얘기라는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싱거운 부탁이었다.

“저도 사내인지라 아무리 나이 든 궁녀일지라도 다 벗은 몸을 보이는 건 껄끄럽습니다.”

“목간에서 네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혼자 두라는 말이냐.”

“사방이 막힌 목간에서 제가 도망이라도 칠까 걱정된단 말씀이십니까? 아니면 목욕물에 코를 박아 죽기라도 할까 걱정된단 말씀이십니까.”

“…….”

“어느 쪽이든 폐하께서 의심하실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 목욕만이라도 혼자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이설의 목욕 시중을 들었던 상궁이 귀띔을 주기는 했다. 황제의 후궁이니 상궁이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이 당연하나, 이설이 사내인 것이 늙은 궁녀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게다가 이설이 보통 부끄러워한 게 아니었을 테니 상궁도 신경이 쓰였을 거고. 황명이 있으니 이설을 혼자 내버려 두지는 못한 채로 상궁도 마음이 불편해 윤 내관을 통해 넌지시 알렸다.

처음 들었을 때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무시했던 것인데 이설이 직접 청을 하기까지 하니 다시금 생각이 든다. 밤낮없이 이설을 감시하는 호위군도 들어가지 못하는 목간에 이설을 혼자 두고 싶은 마음은 쉽게 들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든 상궁이라고 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이설의 맨몸을 보며 시중을 드는 것 역시 불쾌하긴 마찬가지였다.

“폐하.”

대답을 재촉하는 이설이 들고 있던 서신을 아래에 내려놓았다. 안된다고 대답한다 해도 쉽게 물러설 것 같은 강단이 아니었다. 아닌 척하려고 애는 쓰지만 천성이라는 게 본래 쉽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라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게 얼굴에 빤히 보였다.

“그렇게 해라. 밖에는 내가 말해 두지.”

별안간 마음이 왜 약해졌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울며 매달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이설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아졌다.

“단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저 혼자 목욕을 하려는 것뿐인데 허튼짓이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크게 기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안도하는 기색으로 이설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끄러움 많은 성격에 여인이 목욕 시중을 들어 주었으니 여간 창피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걸 보면 영락없이 제가 알던 연이설 그대로였는데 언뜻언뜻 내비치는 일면의 모습들이 자꾸만 낯설게 보였다.

예의상 하는 말인지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딱딱한 말투로 황송하다 대답한 이설은 이내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때 묻은 종이 위에 글씨들을 손으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다시 몰두하기를 한참. 옆에 지켜보는 이가 있다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우찬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아무리 소리 없이 움직였다 해도 바로 옆에서 움직이면 인기척이 느껴질 만도 한데 이설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탁자 쪽에 더 깊이 파묻었다. 옆에 우두커니 서서 햇빛에 빛나는 은회색 머리를 지켜보던 우찬이 말없이 뒤를 돌아섰다.

*

탁,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렸다. 곧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이설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향해 길게 내뿜는 한숨에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 자세로 한동안 숨을 고른 뒤에야 자세를 바로 하여 서신을 집어 들었다. 이마를 아무리 문질러 봐도 지금의 난해한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찬에게 억지로 안길 뻔한 게 바로 조금 전의 일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울음이 터졌던 게 화근이었다. 그 바람에 감정 조절이 안 되며 우찬을 원망한다며 투정을 부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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