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42화
혹시 눈을 뜬 채로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이설은 미동도 없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대보자 눈썹을 움찔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더 이상 발악하듯 몸부림치지는 않았는데, 자포자기보다는 이미 몸에 진이 다 빠져 그런 것처럼 보였다.
“잠시 있어라.”
눈물로 젖은 뺨을 가볍게 한 번 쓸어내려 닦아 준 뒤 올라타 있던 몸에서 비켜났다.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앞섬을 더 세게 쥐어 잡으며 몸을 웅크러뜨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포단을 집어 몸 위에 던지듯 덮어줬다. 생전 한 번도 쳐본 적 없는 휘장을 천장에서 내려 이설의 모습을 가린 뒤 뒤를 돌아섰다.
갑자기 발작하듯 이설에게 달려들었던 충동의 원인이 차분하게 머릿속에 되감겼다. 울음을 꾸역꾸역 참으며 기어이 폐하를 원망한다는 말이 이성의 그 어딘가를 날카롭게 잘라 냈다.
차라리 밖의 인기척이 없었으면 좋을 뻔했다.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설을 끝까지 안았다 한들 흐트러진 모습으로 침상에 널브러진 정사 후 모습을 봐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설을 향한 죄책감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문 한쪽을 거칠게 밀어 열자 코앞에 소운이 서 있었다. 땀이 난 이마에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갑자기 기별도 없이 찾아뵈어,”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연이설을 만날 수 없다. 이미 몇 번이나 얘기한 것 같은데.”
급하게 달려온 게 분명한 소운이 평소와 달리 횡설수설하며 초조한 기색으로 침소 안쪽을 살폈다. 힐끗 우찬의 표정을 올려다보기는 했지만 차게 가라앉은 표정 아래 기분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급히 마마를 뵐 일이 있습니다. 마마께서는 안에 계시옵니까?”
“소의는 아직 여독을 다 풀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어. 지금은 만날 수 없으니 물러가거라.”
“그런 줄 알고 있으면서도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폐하, 아무래도 서신의 암어를 마마께서,”
“따로 이를 때까지 태금궁 근처는 얼씬도 할 생각 말 거라.”
뭔가를 꺼내려는지 소매 안쪽을 뒤적이는 소운을 무시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윤 내관을 불렀다. 당장 끌어내 궁 밖으로 쫓아내라는 말에 윤 내관이 머뭇거렸다. 뭣들 하고 있느냐는 일갈에 결국 윤 내관이 소운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시지요, 상국.”
“이거 놓으십시오!”
“이게 지금 무슨 소란이냐. 당장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소운이 윤 내관의 팔을 뿌리치며 우찬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몸을 휘청한 윤 내관을 궁인들이 받쳐 주고는 우찬의 눈치를 살폈다.
“폐하, 낮에 받았던 서신의 암어에 관한 것입니다. 소의 마마께서,”
“소의는 아직 몸이 성치 않아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 돌아가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알아들을 것이냐?”
슬슬 소운에게도 화가 뻗치기 시작한 우찬이 소운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윽박질렀다. 신음을 흘리는 소운이 반대편 손을 뻗으며 소매에서 꺼낸 낯익은 서신을 건네려던 찰나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럽습니까? 궁인들 보기 좋지 않으니 안으로 들어와 말씀 나누세요.”
인기척에 뒤를 돌아선 순간 소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맥없이 힘이 풀렸다. 머리가 조금 부스스해진 것 말고는 정갈함이 나무랄 데가 없는 이설이 의연한 표정으로 서서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됐던 얼굴은 이제 물기 없이 건조했지만 충혈된 눈은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울었던 티를 내지 않는 태연함으로 눈이 깜빡였다.
“태감께서, ……아니, 상국께서 제게 물어볼 게 있으신 것 같은데 잠깐 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폐하?”
말꼬리를 올려 세우며 생긋 웃는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억지로 웃는 게 분명한 미소가 이설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 꼭 우스꽝스러운 저잣거리의 가면을 씌워 놓은 것 같았다.
방금 전 일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갑자기 고분고분 구는 이설이 정말 정신이 회까닥 돌아 버린 건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뚫어져라 응시하는 우찬을 보고도 이설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힘은 없지만 나긋나긋한 말투로 안으로 들어오라 다시 한번 말했다.
“이민족이 편국 왕가와 주고받던 서신의 암어를 어쩌면 마마께서 해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찾아온 것이니 페하 제발 마마를 뵐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설에게 넋이 나간 사이 드디어 할 말을 모두 할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생긴 소운이 간절히 애원하며 말했다. 눈썹 두 쪽을 위아래로 올려 내려 얼굴을 찡그린 우찬은 소운이 들고 있는 서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안쪽으로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소운이 한결 걱정을 덜어 놓은 표정으로 우찬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나란히 한쪽 자리로 향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모습을 봤다. 우찬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환한 얼굴로 이설이 웃었다. 이제 발의 상처는 거의 아물었는지 사뿐사뿐 허공을 떠다니듯 걸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찬이 완전히 등을 돌려 두 사람을 따라가자 조용히 뒤에 문이 닫혔다.
“걱정했던 것보다 마마께서 쾌차 중이신 것 같아 실로 마음이 놓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사지나 멀쩡할 뿐이지 좋게 봐줘도 쾌차 중이라고 볼 수 있는 몰골에 할 말은 아니었다. 거기다 옷에 가려져 그렇지 어깨는 아직도 성치 못했다.
사근하게 답한 이설은 소운이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우찬에게 고개를 돌렸다. 웃는 얼굴 그대로의 표정이었지만 형용할 수 없는 긴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제 저 표정에 담긴 완벽한 의미를 실감한다. 끝없는 원망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게 물어볼 게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급한 사안이신 거 같은데 편히 물어보세요.”
“아, 예. 우선 보여 드릴 서신이 하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고 우찬은 둘 사이에 섰다. 소운은 손에 서신을 쥐고서 우찬을 올려다봤다. 이 서신을 이설에게 보여 줘도 될지 허락을 구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우찬이 없었다면 진작 이설을 만나 전부 보여줬을 것을 이제 와 허락을 구한다는 게 이치상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렇다 할 대답도 없이 우찬은 이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간의 괄시와 천대에도 꿋꿋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던 이설은 이제 기억에나 존재했다. 원망한다는 말이 이렇게 억장이 무너질 말인 줄 몰랐다. 이유가 있다며 피하고 도망칠지언정 자신을 향해 직접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토로한 적은 없던 이설이었는데.
“마마께서 어디서부터 알고 계신 줄 몰라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설이 조심스레 건네받은 서신을 대충 훑어본 뒤 고개를 들자 소운이 짐짓 더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여름 사냥대회에서 폐하와 마마를 습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를 찾았습니다. 예상하셨겠지만 금국에 앙심을 품은 이민족 잔당들이었습니다. 호위가 느슨해지는 사냥대회를 틈타 폐하의 목숨을 노렸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마께서는 운 나쁘게 말려들었을 거고요.”
목숨을 노린 것치고는 화살의 방향이 너무 불명확했다.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놈들이었다면 기마술이든 궁술이든 보통내기가 아니었을 텐데 날아오는 화살들은 처음 어깨에 맞았던 한 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 사람을 스치듯 지나쳤다.
직접 그 상황을 겪어 본 우찬은 습격 무리가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그러나 우찬의 측근 대부분은 단순히 위협을 위해 금군이 사방에 깔린 나덕산에서 황제를 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그런데 죽은 그 자들의 유류품에서 그 서신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서신들 중 하나인가 했지만 유독 그 서신만이 달랐습니다.”
“편국의 인장 때문이었나 보군요”
“예. 그때는 이 일에 편국과 이민족, 그리고 손조익이 모두 관련되었다는 것을 몰랐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넘긴 서신이었습니다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쯤부터 편국은 금을 배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 시점부터인 줄은 모르겠지만 그 일에 손조익이 가담하였고요. 하여 손조익의 죄를 입증하는 데에 이 서신이 중요한 증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헌데 서신의 정확한 내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요.”
“부끄럽습니다만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겸손으로 하는 소리가 아닌지 소운이 정말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러 창피함을 감췄다. 잠자코 옆에 서서 듣고 있던 우찬은 이설이 다시 서신의 내용을 제대로 살피는 사이 물었다.
“이설이 해독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왜 갑자기 한 것이냐?”
“그건 태자 전하 덕분입니다.”
소운은 이설이 서신에 눈을 떼지 못하고 읽어 내려가는 것에 기대하는 눈초리로 지켜보다 대답했다.
“아까 소봉궁에서 해독을 해 보던 중 우연히 태자께서 글자들을 보시고 아는 척을 하시는 겁니다. 대략적인 글자의 의미도 몇 개 알고 계셨고요. 놀라 여쭈어보니 일전에 마마께 배운 암어라고 하시더이다.”
놀랍고 경이로운 눈빛으로 소운이 이설을 들여다봤다. 신하로서 제대로 된 증좌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뿐만 아니라 학자로서 궁금증이 해소되기 직전의 기쁨이 미묘하게 교차했다.
이설이 유심히 쳐다보는 글자들을 내려다본 순간 우찬도 한 가지 사실이 생각났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싶었던 낯익은 글자들을 봤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사냥대회의 습격 직후 밤, 이설과 단둘이 습한 동굴 안에 숨어 있었던 날이다. 이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자기 옷 일부를 찢어 그 위에 처음 보는 암어를 적어 말에 묶어 밖으로 보냈다. 그 덕분에 그 암어를 유일하게 해설할 수 있었던 이설의 호위무사가 금군을 이끌고 구하러 왔다.
그날의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대략적인 모양이 그때 본 것과 비슷했다. 첫눈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야 그때 중독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용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마마?”
소운이 결국 한참 동안 말이 없는 이설을 재촉했다. 이설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다 종이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