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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0)화 (240/300)

달의 황홀경

240화

“소운이 그래? 황제의 연심이 틀렸다고? 하여 득달같이 달려와 주제넘은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컥,”

“연심이란 게, 너와 소운이 운운할 거리는 못 되는데 말이야.”

점점 숨통이 좁혀져 들어가자 차란이 본능적으로 우찬의 팔을 억지로 떼어 내려고 애썼다. 두 손으로 붙잡아 안간힘을 써도 우찬은 손아귀의 힘을 더 줄 뿐 떨어질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폐하!”

뒤에서 다급하게 달려오며 흑영이 소리쳤다.

“이러다 승상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으라고 하는 거잖아.”

“폐하, 제발!”

흑영이 팔목을 덥썩 붙잡았다. 제대로 힘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한 압박이 느껴질 정도이기는 했다. 차란은 이제 졸도하기 일보 직전으로, 눈이 거의 뒤집혀진 상태였다. 이대로 다섯을 셀 정도의 시간만 끌어도 더는 숨을 쉬지 못할 것이다.

손에 힘을 풀자마자 건장한 사내의 몸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는 않았는지 내장을 다 토해 낼 것처럼 쉼 없이 기침하며 침을 흘렸다.

“목숨을 내놓을 만큼 연이설이 네게도 중요한 사람인가?”

차란이 시뻘게진 눈으로 한 번 위를 올려다본 뒤 기침 소리가 조금 잦아들자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흑영이 팔을 붙잡아 도우려 했지만 어설프게 뿌리쳤다.

“그새 정이 많이 든 모양이야. 목숨까지 내놓고 걱정해 주다니.”

“제가 소의 마마를,”

거칠게 쉰 목소리가 잠깐 간격을 둔 뒤 이어졌다.

“마마를 걱정하여 말씀드리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살고 싶어 바둥거리릴 때는 언제고 다시 죽여 달라고 발악이라도 하듯 차란이 맹렬한 눈빛으로 우찬을 노려봤다.

“저는 폐하께서 후회하실까 걱정되어 그러는 겁니다.”

말리려고 다가가는 흑영의 팔을 뿌리치고 차란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훈계가 아니라 벗으로서의 조언이고요.”

“…….”

“폐하의 벗이 되고 싶으면 폐하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하신 것을 이제야 지킵니다.”

목구멍이 막혀 있는 동안 정신이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지 차란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닫았다.

차란은 황궁 문턱을 막 드나들 무렵 어지간히도 우찬과 소운을 쫓아다녔다. 이미 한참 어렸을 적부터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차란이 우찬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나마 좋게 봐줄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상단에서 몰래 가져오는 신기한 물건과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혀였다.

바른말도 한참을 에둘러 겨우 전하는 사람들과 달리 차란은 뭘 듣기 좋게 포장하여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소운과 똑같은 말을 해도 어딘가 건방지고 경박해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기 일쑤였다. 그게 진절머리나게 싫었던 우찬이지만 차란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후회할 짓 같은 거 한 적 없어.”

우찬이 입술 사이로 말을 씹어 내뱉듯 읊조렸다.

“이설 님을 궁에 가두고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겠다 협박을 하시는 데도요? 심지어 죽이시기까지 했고요.”

“승상 그건,”

갑자기 흑영이 몸을 가까이 붙이며 목소리를 낮춰 말을 걸었지만 어깨로 밀쳐 무시했다.

“이설 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그 심정이 어떠실지, 그것보다 폐하께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생각해야 하나?”

“하셔야지요! 폐하께서 모든 걸 다 잃어도 되찾고자 염원하셨던 분의 마음을, 폐하야말로 그 누구보다 잘 헤아려 주셨어야죠. 연모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입니다.”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한 차란이 쉰 목소리를 높이 올려 대답했다.

“저와 소운으로 인해 누군가를 연모하는 마음이 폐하께 어떤 식으로 비쳤을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소운도 겪어 보고 죽을 만큼 힘들어 봤으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적어도 폐하께서는 누군가를 연모하며 괴롭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대체 이까짓 감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소운도 모자라 차란까지 찾아와 이런 소리를 해 대는지 화가 더 뻗쳤지만 차란에게 화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모라는 게 뭐지. 이설을 아예 모르던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희로애락이라는 삶의 색과 무게가 희미했다. 경험하는 감정이란 것들도 대개 특별하지 않았고 무난하게 찾아왔다 빠르게 사라졌다. 초조하게 누군가를 걱정하고, 기다리고, 애타게 보고 싶어 하고 자신을 일부러 피해 도망갔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감정 같은 건 이설을 만나기 전에는 모두 알지 못했다.

“내가 연이설을 연모한다는 것은 네가 어떻게 확신하지?”

혹시 이 연심이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까.

“폐하께서 이설 님을 바라보시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폐하는 다른 사람을 절대 그렇게 쳐다보지 않으시니까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흑영이 수긍한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설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설에게 시선을 준다는 것은 우찬도 인정하는 바다. 자신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시야에 이설이 있으면 시선은 늘 그쪽을 향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있든 나쁜 생각을 하고 있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은 이설과 이설이 아닌 것. 딱 그렇게만 나뉘었다.

차란의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었다. 이설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이설이 황궁을 떠나기 전은 이제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했고 기억난다 한들 이제 와 크게 중요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이설은 악에 받치거나 절망에 무너진 눈에 우찬을 담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설인데 왜 다시 돌아온 뒤로 눈을 마주칠 때마다 불쾌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이설의 마음은 아무래도 자신과 같지 않은 것 같다.

“빌어먹을.”

잇새로 새어나가는 욕지거리를 듣고 차란과 흑영이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를 지나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무슨 이유로 갑자기 분노와 배신감이 넘쳐흐르는지 당장 확인해야 했다.

느닷없이 자리를 떠나려는 우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던 차란이 달려와 우찬의 앞을 가로막았다. 뒤따라 흑영이 왔다.

“태금궁에 가시는 길입니까?”

“비켜라.”

“이설 님께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너 따위가 알 필요가 있느냐?”

“이제 와 그 흉측한 것이 걸려 있는 비은궁에 보내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그렇게 애원하는데 안 해 줄 이유도 없지”

“폐하!”

답답함으로 부르짖는 목소리가 허공에 쩍 갈라졌다. 자기 일도 아닌 것에 누구보다 괴로워하며 차란이 얼굴을 비벼 쓸어내렸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바닥으로 숨을 길게 내쉬자 부풀어 올랐던 가슴팍이 확 꺼졌다.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폐하께서 온전히 감당하셔야 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딱 거기까지만 듣는 걸로 하겠다.”

“부디 천하를 다스리는 성군으로서 부끄러움 없는 결정을 하시옵소서.”

엉망이 된 꼬락서니를 하고 이제 와 고상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차란의 어깨를 치고 지나쳤다. 두어 걸음 걸었을까. 걸음 소리를 듣고 바깥쪽에서 열리는 문을 앞에 두고 우찬이 뒤를 돌아 차란에게로 돌아왔다.

너저분하게 풀어 헤쳐져 있던 차란의 의복 앞섬을 대강 정리해 주며 아직 숨을 짧게 몰아쉬는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손을 댄 적은 없던 터라 차란이 당황스러운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비은궁 대문에 걸린 건 오늘 아침 고신 중에 죽은 어느 계집의 목이다. 연이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 죽기 직전까지도 연이설을 진작 없애지 못한 것을 무척 아쉬워하던 계집이었다고 하니 고신조차 아까운 버러지였어.”

“…….”

“이만하면 성군으로서 짐의 결정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군.”

크게 확장하는 까만 동공을 한심하다는 듯 시선을 던지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몸을 밀었다. 힘없는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을 흑영이 받쳐 주었다. 폐하, 하고 가느다랗게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보폭을 넓혀 정전을 나섰다.

오늘 아침 자백을 받던 금위대장이 비녀 하나를 가지고 찾아왔다. 고신 전 어느 여인의 몸을 수색하다 나온 것인데 우찬이 최근에 하고 다니던 것과 모양이 비슷하여 추궁해 보니, 여인의 동료가 도국 빈민촌에서 이설을 만났을 때 빼앗은 것이라고 했다.

건네받은 비녀는 우찬 역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설과 처음 잠행을 나갔던 날 저잣거리에서 해국 상단의 가게에 들어갔다 한 쌍으로 사 온 비녀 중 하나였다. 두 개를 맞붙이면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신기한 물건이라며 상인이 물건을 팔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이설과 나눠 가졌던 것인데 그 뒤로 이설이 이 비녀를 꽂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핀잔을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흠집이 난 비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꽂고 다니는 이설을 보면 가끔씩 눈살이 찌푸려지기는 했다.

이설에게 그 비녀를 꽂지 않느냐 물었다면 너무 귀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미련한 대답이다. 닳는 것도 아닌 것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지.

어쨌거나 제 손으로 이설에게 직접 사 준 비녀를, 그것도 저와 한 쌍으로 나눠 가진 것을 이름도 모르는 이민족 계집이 가졌다고 생각하자 심사가 뒤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설을 저주하다 고신 중에 죽었다 하니 그 목을 잘라 유용하게 쓰기로 하였다. 마침 오늘이 이설에게 말미를 준 마지막 하루였다.

어차피 비은궁의 궁인을 죽일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들에게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이설을 굳이 극단적인 정신 상태까지 몰아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친 토끼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설인데, 가까운 사람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정전 밖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자 윤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쫓아와 기대 없이 물었다.

“처소로 돌아가 좀 쉬어야겠다.”

별안간 화색이 도는 윤 내관을 더 멀리 따돌리며 우찬이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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