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39화
정전으로 향하는 복도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발이 요란스럽게 바닥을 찍어 내리는 것 같다. 걷는 이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한지 제발 알아 달라고.
널브러진 종이와 술잔, 술병, 붓들의 잔해들을 정리하던 궁녀가 다가오는 재앙을 감지하고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아름 품에 안은 물건들을 가지고 멀어지는 궁녀가 네댓 개의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간다. 잰걸음으로 멀어지며 정면으로 마주 보는 양 문을 열자 멀리서 봐도 표정이 썩 좋지 않은 차란이 앞에 서 있었다.
“들어와.”
바로 기별하지 않았던 걸 보니 문 앞에서 윤 내관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윤 내관은 어떻게 해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우찬을 이제 차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었다.
“술은 그 앞에 두고 나가거라.”
차란의 뒤를 따라 궁녀 둘이 새 술병과 술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차란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기둥 옆에 놓인 궤짝 안의 술병을 보고는 입술을 힘주고 꽉 닫으며 하고 싶은 말을 가까스로 참았다.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진 차란은 딱 계단 아래에서 멈춰 섰다. 기분이 조금만 더 안 좋았으면 계단 위까지 올라와 고함이라도 쳤을 표정이었다.
“폐하.”
단순히 다녀왔다는 보고를 하러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은 앞에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비장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목소리가 곧 성가신 대화의 흐름을 예고했다.
“왜 이리 늦었지?”
무척 심각한 얘기라도 꺼낼 것처럼 운을 떼는 차란을 막고 먼저 물었다. 태금궁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가 언젠데 이제야 나타난 건지 설명이 필요했다. 여태껏 자신의 침소에서 연이설과 단둘이 담소를 나누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사실 이제 와 감출 것도 없는 감정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설이 즐겁게 웃고 떠들 모습을 생각하니 화가 나다 못해 사지가 뒤틀리고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제게는 겁 많고 내외하는 이설이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나 사근사근하게 구는지 알고 있어서 더 참기가 어려웠다. 이설을 다시 만난 며칠 동안 웃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었다.
울고 화내고 조소만 가득하던 희멀건 얼굴이 차란을 만나 한껏 웃음꽃을 피웠을 생각을 하니, 느닷없이 차란의 눈을 도려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둘이 안부나 주고받으라고 보낸 게 아닌데 말이야.”
불필요하게 충동적인 생각을 감추려 우찬 싱거운 농을 한 뒤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빈속에 마셔댄 술 때문에 머리가 좀 아팠다.
“얘기가 길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는 길에 잠깐 들렀던 곳도 있었고요.”
“소운에게 서신을 전해 주고 오는 길이냐?”
“예. 그런데 소운에게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들었,”
“연이설은.”
“……”
“잘 지내고 있고?”
잘 지낸다는 말을 묻기에는 못 본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하룻밤에 반나절을 더한 정도였다. 못 지내려고 애써도 그러기 힘들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잘 지내고 있을 리도 없었다. 죽네 사네 차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을 건 아니지만 얼굴 하나만 봐도 이설이 잘 지내고 있다 말하기는 어려웠다.
차란은 잠깐 망설이다 짧게 ‘예’ 하고 대답했다. 이렇다 저렇다 할 부연 설명도 없었다. 어차피 길게 늘여 봐야 별로 믿을 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네게 무엇을 묻더냐?”
차란을 시켜 이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오게 하였다. 뭐가 됐든 이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했다. 우찬이 물어봤자 대답도 않을 게 뻔했고, 소운은 이설에게 연민을 느껴 제게 또 연심을 운운하며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댈 게 뻔했다.
이런 일에는 차란이 적임이다. 상단의 이름을 판 일로 빚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보낸 걸 알아차렸다 해도 차란을 그냥 돌려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귀비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귀비?”
아직도 귀비가 자기 자리를 대신할 정인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천치라 할지라도 이 시점에 귀비를 황제의 정인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귀비가 남몰래 우찬을 독에 중독시켜 해하려 했다는 걸 가장 먼저 발견한 게 이설이었으니까, 그런 믿음 따위 버려도 진작 버렸어야 했다.
“따로 구체적으로 물으신 건 아니었고 귀비에 관해 일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마마 입장에서는 귀비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을 테니까요.”
이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면, 사실 입궁한 날부터가 모든 일의 시작일 것이다. 입궁부터 지금까지 온갖 변고에 시달리기 시작했으니까.
듣자 하니 연국에서는 만사가 그리 태평할 수가 없었다. 한 해의 큰일이라고 해 봐야 왕족 누군가의 출생과 서거, 혼인과 회임 따위의 시시한 것들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소박하게 꾸린 왕가라 하더라도 왕족인 이상 허드렛일이나 고생과도 거리가 멀었던 곱상한 왕자 나리께서 금국에 온 뒤로 갖가지 일들에 휘말려 팔자가 사나워졌다.
“그런가.”
하지만 우찬은 그 점을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이설이 제 품에 안긴 뒤로 팔자가 사나워졌다니 누군가 입 밖으로 꺼낸다면 곱게 죽이진 않으리라.
“또한 폐하께서 당장 귀비의 죄를 밝히지 않으실 거라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보기보다 혼자 생각을 꽤 깊이 한 모양이야.”
“갇혀 지내시는 동안 달리 하실 게 있으시겠습니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도 차란은 제 말을 회수하지 않고 고개를 올려 세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기탄없이 해 보라 말하지 않더라고 오늘 다 털어낼 작정인 듯싶다.
“그리고 이게 증좌가 없어 조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날 붙잡혀 있던 마마를 데려갈 사람이 있다는 대화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어떤 약조의 대가로 마마를 넘기기로 했다고요. 아마 누군가 사병을 보내주기로 했던 모양입니다. 약조란 그게 아닐까 싶고요.”
“사병을 보내주기로 한 대가로 연이설을 넘기기로 했다?”
이민족들이 숨어 있던 촌락은 붙잡힌 포로가 길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온 사방에 금군이 깔려 있으니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곳에서 탈출할 생각이었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짐작하던 믿는 구석이란 게 지원 사병이었던 모양이다.
손조익이 가진 사병의 규모를 짐작해 보건대 그 정도 지원 병력은 충분히 가능하다. 촌락이 있던 곳은 편국 국경과 가깝기 때문에 편국에 주둔 중이었던 사병이 있다면 이동도 쉬웠을 것이다.
“지금 정황상 그게 손조익이 아니기도 어렵겠군.”
“마마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 듯합니다. 귀비를 문초하시어 더 소상히 알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입을 열 턱이 있나.”
우찬이 콧방귀를 뀌며 팔걸이를 탁탁 두드렸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려 목뒤를 주무르며 귀비를 떠올렸다. 얼굴 이목구비는 흐릿해졌는데 독기 어린 눈빛은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고집스럽게 다물었던 입술은 어떤 고신을 한다 한들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귀비가 귀비인 이상 그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쓸모가 있으니 일단은 두고 보겠다.”
“그것보다 마마를 정인으로 다시 되돌려 놓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 아닙니까?”
여상한 말투로 물은 차란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 모습이 다소 건방지기 짝이 없어 보였으나 대놓고 드러내는 속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건방진 소리.”
“비은궁에 궁인은 왜 죽이신 겁니까?”
말의 전조도 없이 다짜고짜 할 말 부터 하고 보는 차란이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싶다. 실은 아까 들어올 때부터 묻고 싶던 말일 것이다.
“보았느냐?”
“상국께서 보셨다 합니다.”
“잘 걸려 있다 하더냐?”
“폐하.”
다소 감정이 격해진 목소리가 우찬을 불렀다. 격 없는 사이였다면 이미 멱살을 잡고 늘어졌어도 한참 전에는 그랬을 법한 태도였다.
“연이설이 보면 당장에라도 입을 열 만큼 잘 걸려 있는지 궁금하군.”
“당장에라도 쓰러지시겠지요. 대체 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셨습니까?”
“연이설이 궁 밖으로 도망치려던 이유를 알아내려고. 어르고 달래는 건 이미 해 봤는데 소용이 없었거든.”
“정확히는 왜 폐하를 떠나려고 했는지 알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말의 허점을 정확히 간파한 차란이 격앙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흥분했다. 짧은 마디로 빠르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소리가 조용한 정전을 메웠다. 우찬은 아무 말 없이 팔걸이에 음각된 구름 모양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기다렸다. 차란이 더 흥분하여 선을 넘어서거나 실언을 뉘우치고 엎드려 사죄하기를.
“왜 폐하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도망치려고 했는지 말입니다.”
잠자코 기다려도 차란이 자기 죄를 뉘우칠 모양새가 아니었다. 뭐라도 던져 낯짝을 뭉개 버리고 싶었는데 좀 전에 궁녀가 다녀가며 탁자 위를 다 치운 터라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태금궁에 가두고 바깥출입을 금하셨을 때 저는 아무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으로 지내고 계신 마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도 저는 폐하께 그 어떤 간언도 하지 않겠다 생각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이치 안에서 행동하고 계시다 생각했으니까요.”
“그 말은 지금 내가 이치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고 있다 이 뜻이냐?”
“예.”
일말의 고민도 없이 차란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우찬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째 갈아입지 못한 옷에 구깃구깃한 주름이 많이 생겼다. 침소로 돌아가지 않아도 침수는 제대로 된 곳에서 들어야 한다며 윤 내관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내내 이 좁은 의자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않은 탓에 관자놀이 통증이 심해졌다.
탁자를 돌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우찬을 맞는 차란은 결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 행동이,”
“연모한다는 분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셨습니다.”
우찬이 잠깐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멈춘 사이 차란이 거리낌 없이 자기 생각으로 말을 이었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서 쳐다보는 모습이 오는 내내 각오를 단단히 다졌구나 싶었다.
바득거리며 이를 갈고 모가지를 손에 쥐어 꺾어 버려도 시원찮을 기분이었다. 술로 죽이던 뱃속의 화기에 다시 불이 붙은 듯 타올랐다. 미묘하게 균열이 생기는 우찬의 얼굴을 보며 차란이 마른침을 삼켰지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제 것들도 아닌 연심에,”
시원찮을 것을 알면서도 되는대로 차란의 목을 손아귀에 쥐어 잡았다. 전에 소운에게 그랬을 때보다 더 두껍고 단단한 사내의 목이 한 손에 꽉 차게 들어왔다. 괴로운 듯 컥컥거리는 소리가 목에서 막혀 날카롭게 갈라졌다.
“왜들 이렇게 훈수가 많아.”
손톱이 살갗을 파고 들어간다. 차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