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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37)화 (237/300)

달의 황홀경

237화

“나라 밖 정세도 그런대로 마무리가 됐으니 귀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멀거니 허벅지 위에 놓인 손목을 쳐다보고 있는 이설이 이상했는지 차란이 고개를 아래로 빼꼼히 내리며 물었다. 이설이 놀라 손목을 잡아 가리며 예, 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이만 물러갈까요?”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세요.”

“예. 그, 귀비도 슬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정리라면……?”

어렴풋이 알 것도 같은 차란의 속뜻을 확인 차 되물었다.

“폐하를 기만하고 입궁한 귀비를 저리 가만둘 수야 없지요. 거기다 처음부터 이민족과 내통하여 폐하는 물론 금국 전체를 위험에 할 뻔했던 여인입니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작정하고 입궁했을 게 분명합니다.”

“그럼 폐비가 되는 것입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이설을 보고 차란이 가볍게 웃었다.

“폐비라니, 형벌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것 아닙니까? 자신을 폐하의 정인이라 속이고 입궁한 여인입니다. 폐하께서 일찍이 눈치를 채셨으니 다행이지 하마터면, 어휴.”

우찬이 일찍이 눈치를 챘을 줄은 몰랐다. 그것보다 어떤 이유로? 차란을 말을 들어 유추하건데, 귀비가 새긴 이름은 제법 감쪽같아 우찬도 한눈에 가짜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찬이 어떻게 알아차린 것이지.

천명을 나눈 사이가 아니라면 서로 간의 느끼는 다른 신호나 자극이 있다는 게 사실일 수도 있다. 서책에서 어떤 인연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아픈 곳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읽었다. 미신 같은 이야기라고 깊이 읽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 서책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서책의 말이 사실이고 우찬이 그만큼 예민하다면 언젠가 자신 역시 진짜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않을까?

“아마 극형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목으로만 따진다면 당장 참형에 처해져도 귀비는 할 말이 없는 처지여야 했다.

그런데 귀비가 만일 이민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돈에 눈먼 궁녀 하나를 꾀어내 황제의 이름을 알아낸 뒤 단순히 출세의 야욕만으로 그 이름을 새겨 입궁했어도 참형이라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했을지 모르겠다.

금국은 천명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고 하물며 황제를 기만하여 거짓 정인 행세를 했으니 설령 이민족과 무관한 여인이라 하더라도 참형을 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인연으로 묶인 사실을 알고도 숨긴 자신도 다를 바 없다. 발목의 이름이 들통난다면 단순히 폐비가 되는 것 이상으로 형을 받을 것이다.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불안한 표정을 감추며 이설이 여상한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당장 귀비의 죄를 밝힐 마음이 없으신 듯 보였습니다만.”

“마마께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차란이 눈살을 크게 찌푸리며 물었다. 우찬이 정확히 그런 식의 얘기를 한 것은 아니지만 우찬은 세간에 잘못 알려진 귀비의 정체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귀비를 자신의 정인이라 방패 삼아 만인 앞에 내세울 것 같은 속셈인 듯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폐하께서는 귀비에 관한 얘기를 당분간 함구하라 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예. 그렇지 않아도 잡아들인 이민족을 문초할 때뿐만 아니라 손조익의 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귀비 증언이 무척 중요한데,”

“태부 손조익까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는 것입니까?”

대단히 놀랄 만큼 의외의 인물은 아니지만 생각한 적 없던 이름인 것은 확실했다. 찻잔을 막 입에 갖다 대려던 이설이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차란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듯싶습니다. 헌데 확실한 증좌가 없어 난감한 처지입니다.”

손조익이 이민족 편에 섰다는 말은 우찬을 황위에서 몰아내든 금국을 무너뜨리든 둘 중 한 가지를 결심했다는 말인데 야망이 커도 지나치게 컸다. 기껏해야 어린 태자를 황위에 올려 수렴청정을 하려던 야욕이 자기 분수를 한참 넘어섰다.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거절함으로서 초조해진 손조익이 차라리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우찬을 끌어내리려고 했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괜히 더 시간을 끌다 우찬에게 후사라도 생기게 될까 걱정이었을 것이다. 굳이 황후 태를 통해 얻는 적통이 아니더라도 손조익에게는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손조익이 이 일의 배후라면, 그때 붙잡혀 있는 동안 감시자들이 나눴던 대화의 대상이 손조익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마? 안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신이 눈치도 없이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봅니다. 볼일만 보고 얼른,”

“뭔가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산에 붙잡혀 있을 때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차란의 소맷자락을 붙잡아 도로 앉혔다.

“누군가 저를 데려가기로 약속되어 있었던 모양입니다. 대화의 내용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마마를 데려가기로 했다고요?”

“예. 저를 붙잡아 둔 사람들은 분명 제가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죽일 만큼 밉지만 대업을 위해 쓸모가 있으니 아껴 둔다고도 여러 번 말했고……. 저를 어떤 약조에 대한 대가로 넘겨주는 듯한 대화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병을 보내 준다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분명 그렇게도 말했습니다.”

“마마께서는 그들과 거래를 한 자가 손조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설이 대답을 잠시 미뤘다. 제 일만 고민하고 걱정했지 자신이 납치됐던 건에 황궁의 누군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이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들은 몇 명 떠오르지만 가장 강력한 동기를 가진 사람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황제의 후궁 대부분은 양 소원을 제외하고는 출신이 한미하여 뒷배가 넉넉지 못하다. 거느리는 사병들의 규모도 대단치는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리 미웠으면 그 자리에서 죽였으면 될 일.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손조익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이민족과 진작 내통하여 귀비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테고 이설이 우찬의 약점이라는 사실도 자연스레 알게 됐을 것이다. 당장에 죽여도 그만이긴 하지만 데리고 있으면 우찬을 구워삶는 데 이용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쓸모가 없으면 그때 죽여도 그만이라 생각했을 거고. 정확한 속마음이야 본인이 아니고서야 정확히 꿰뚫어 볼 수는 없다.

“정황상 손조익이 가장 의심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대답하는 이설에게 동감하듯 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죄를 입증할 증좌가 충분치 않습니다.”

“붙잡아 온 죄인들과 귀비의 증언이 있지 않습니까?”

“귀비는 이 일과 관련해서는 함구한 지 오래고 붙잡힌 자들은 심부름꾼이 전달한 서신을 통해서만 거래를 했다 할 뿐 그 정체조차 정확히 몰랐다 합니다. 황궁 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고 심어둔 사람들도 많아 보이니 그저 높은 사람이겠거니, 했다 하네요.”

“귀비의 입을 열게 하거나 증좌를 찾는 게 우선이겠군요.”

“폐하께서 이제 무암궁에 출입하는 것도 불허하셔서 증좌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어차피 귀비도 입을 생각이 없어 보이고요. 유폐되기 전에 잠깐 만나 봤는데 보통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차란이 치를 떨며 다 마신 찻잔을 창틀에 올려 두었다.

귀비는 정확히 어떤 목적을 가지고 궁에 들어온 것일까. 그리고 우찬은 왜 귀비를 문초하지 않고 궁에 가둔 채 내버려 두는 것일까. 정말 귀비의 죄를 들추어 낼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일까.

제 코가 석 자인데 다른 사정까지 생각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안색이 확연히 안 좋아진 것을 보고 차란이 잔에 차를 더 부어주었다.

“어쨌거나 마마께서는 귀비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몸조리부터 하시는 게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건강을 걱정해 주는 차란에게 입만 벙긋거리다 결국 우찬의 의중은 묻지 못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갔다.

“태자 전하께서는 무탈하십니까?”

“언제 물으시나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차란이 자리에 고쳐 앉아 어깨를 으쓱했다.

태자의 소식이야말로 그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우찬이 궁을 비운 사이 황제를 대신해 많은 책무를 지었을 것이다. 제법 의젓하다고는 해도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 어린 나이에 너무 무리를 한 것은 아닌지 틈틈이 마음이 쓰였다.

“태자께선 무탈하십니다. 마마께서 무사히 환궁하셨다는 소식에 무척 안도하셨고 지금은 소봉궁에 상국과 함께 계십니다. ……태감 단소운 말입니다.”

“아 태감께서 돌아오셨군요.”

환궁한 뒤 들은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다. 순간 웃음꽃이 활짝 피었지만 금세 사그라졌다. 소운이 돌아왔다 한들 만나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서둘러 기뻐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소운과 태자에게만은 좋은 일이기를 바랐다. 아무래도 차란은 소운이 돌아온 게 썩 기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태감에게도 큰 빚을 졌는데 얼굴을 뵙고 사과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구합니다만 그건 신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멀리 에둘러 말했지만 차란도 그 의미는 용케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허락 여부는 자기 소관이 아닌지 애매하게 말을 흘렸다. 역시 우찬의 허락이 없는 이상 이 안으로는 누군가 들어올 수 없다. 차란도 우찬의 명으로나마 잠시 들린 것일 터였다.

“그리고 이제 태감이 아니라 상국입니다.”

씁쓸하게 웃는 차란의 빈 잔에 찻물을 가득 채워 주었다. 얘기만 나와도 표정이 이렇게 변하는데, 연심이 그대로 비치는데 왜 우찬이 일러주기 전에는 몰랐을까 싶다. 꼭 말로 해야만 보이는 마음도 아닌데.

“태자께도 마마의 안부를 잘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차도 다 식었으니 신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사실 폐하께서 물건만 바로 챙겨 나오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무척 지체됐습니다. 이거 또 야단맞겠네요.”

허허 웃으며 일어나는 차란은 곧바로 걸어 나가는 대신 새로 생긴 책장 옆에 문갑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뒤뚱거리며 걸어가 뒤에 서자 곧 얼룩덜룩하게 때가 묻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 줬다.

“지난번 사냥대회에서 두 분을 습격했던 자들로 추정되는 무리를 찾았습니다.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그중 한 놈이 가지고 있던 서신입니다. 편국 왕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걸 보면 보통 밀지는 아닌 듯싶은데 아직 암어를 해독하지 못하였습니다. 상국께서 다시 살펴보고 싶다 하셔서 꺼내 가는 참입니다. 마마께서도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차란이 구깃구깃한 서신을 앞으로 건넸다.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본다고 알 턱이 있겠습니까.”

연국에서 쓰던 것 말고는 다른 종류의 암어는 거의 본 적 조차 없다. 소운이 재주껏 해독할 테니 자신이 본들 소용이 없었다. 설령 소운이 해독하지 못한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제가 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차란이 다음에 또 말동무를 해 주러 들르겠다며 밝게 인사한 뒤 나갔다. 다시 혼자가 된 시간. 창가에 다시 팔을 걸치고 앉아 있다가 여기 갇힌 신세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해가 최대한 늦게 지기를 조용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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