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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36)화 (236/300)

달의 황홀경

236화

“아.”

고개를 돌려 바라본 시야에 반가운 얼굴이 담겼다. 생기 없던 눈동자에 활기가 반짝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살짝 짓게 되는 미소를 인지하지도 못했다.

“비 승상 아니십니까?”

“예, 승상 비차란 오랜만에 마마를 뵙습니다. 그간 옥체 강녕……, 을 여쭙기는 대단히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민망한 웃음으로 걸어온 차란이 창가 발치에 서서 인사했다. 햇빛에 환하게 비친 낯익은 얼굴은 다소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예전과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하기야 한 달 남짓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이 변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유달리 부쩍 수척해진 우찬의 경우가 이상한 노릇이었다.

“그간의 변고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옥체가 많이 상하셨을까 염려됩니다.”

“중독 증상은 거의 사라졌고 화살에 맞은 상처도 회복 중입니다. 승상께서도 그간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안색이 조금…….”

말을 아끼며 걱정스레 쳐다보자 차란이 허허 웃었다.

“신의 안색이 조금 그렇긴 합니다만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차란이 그간 겪은 일들을 고생이라는 한 마디로 다 함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궁 밖에 있는 동안 황궁에서도 갖은 일들이 일어났을 텐데 그것들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들은 게 없었다. 자기 궁에 있는 사람들 소식 하나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상황인데 황궁의 사건 사고들을 알려다 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차란이 양해를 구하고 창가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이설은 자신이 자리를 옮기겠다며 일어났지만 차란은 날씨가 좋으니 창가에 앉는 것도 좋겠다며 이설을 말렸다. 거동이 불편할까 걱정하는 걸 들으니 며칠 전 밤의 소동이 난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마마께서 겪으신 고초에 비하면 신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연국에서 사라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무사히’라는 말을 뱉으며 차란이 이설의 어깨를 보며 다소 어색하게 웃었다. 이설은 일부러 어깨를 더 움직이며 잘 회복되고 있으니 괜찮다며 과시했다. 상처는 정말 빨리 회복되고 있었다. 이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의는 약초를 그리 세게 태워 연기를 맡았으니 당연한 노릇이라며,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고 혀를 찼다.

“저, 그런데 제가 승상에게 한 가지 빚을 진 것이 있습니다.”

차란과 마주 앉아 있자니 불현듯 구하와의 일이 생각났다. 도움은 자신이 받아 놓고 위기를 모면하려 대금은 비가랑 상단에 가서 받으라 사람을 보낸 것이다. 구하가 국경에서 붙잡혀 궁으로 바로 끌려가는 바람에 상단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겠지만 차란의 입장에선 황당했을 터였다.

안부 인사를 끝내자마자 다짜고짜 빚 얘기를 꺼내는 이설을 보고 차란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려는지 압니다, 마마. 빚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희 상단이 마마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인 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설이 미안함에 부담을 느낄까 봐 차란이 과장된 손동작을 하며 위로했다. 그래도 역시 찜찜한 기분을 감출 수 없는 이설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책장에 책들은 모두 읽어 보셨습니까?”

화제를 돌릴 심산인지 차란이 고개를 돌려 뒤쪽 벽면에 새 책장을 가리켰다. 한두 권 꺼내어 읽어 보기는 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올 상황이 아니라 읽는 둥 마는 둥 하여 다 읽은 서책이 없었다.

이설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자 차란이 알 만하다는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사각사각 긁었다. 멀리 금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지붕을 바라보며 이설이 힘없이 대답했다.

“제가 지금 태평하게 서책을 읽을 처지는 아니라서요.”

“……상황이 참, 그렇긴 합니다.”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차란이 그제야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본인도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바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긴 한숨이 이어졌다. 그제야 어색하게 꾸며졌던 가면 한 꺼풀이 가신 느낌이었다.

차란이라고 이설이 왜 여기 혼자 우두커니 앉아 창밖만 하염없이 내다보고 있는 줄 모르는 게 아닐 거다.

반갑게 안부를 물으며 속을 감춘 것도 잠깐.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이설은 가만히 차란이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제가 먼저 뭔가 물어본다 하더라도 차란이 속 시원하게 전부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세요. 말씀드릴 수 있는 것에 한해서는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참 지나도 차란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먼저 얘기의 물꼬를 터 줬다. 망설이던 차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화성에서는 정말 마마께서 자의로 도망을 치셨던 겁니까?”

“예.”

“이유는,”

“답하지 않겠습니다.”

단칼에 질문을 쳐 낸 이설이 차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차란은 따라 웃지 않고 깍지 낀 손만 꼼지락거렸다.

“폐하께서도 그 이유를 무척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어찌나 궁금해하시던지, 대답을 하루씩 미룰 때마다 비은궁 궁인들의 목을 치겠다며 어젯밤에도 으름장을 놓고 가셨습니다.”

피식 웃기까지 하며 어제 일을 들먹이는 이설은 하도 기가 차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억지로 참느라 애를 먹었다. 차란은 차란대로 이게 처음 듣는 얘기인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되물었다.

“폐하께서 정말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궁인들을 죽이겠다고요?”

이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래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모아 목 뒤로 느슨하게 묶었다. 그새 또 길이가 많이 길러 곧 허리에 닿을 듯한 기장이 이제 와 무척 거추장스러웠다.

“설마 폐하께서 그럴 분은 아니신데, 설마 진짜…….”

차란조차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했다. 걸리는 일이라도 있는지 눈동자가 정면을 피해 옆으로 빗겼다. 가로획으로 꽉 물린 입술이 얼마나 심각하게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만도 했다. 차란이라도 말려 주면 좋으련만. 우찬이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차란의 얘기를 귀담아들을 리가 없어 말을 꺼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는 듯 차란이 슬그머니 운을 띄었다.

“폐하께만은 사실대로 말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한데 모아 길게 내렸다. 그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대답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 대답을 회피하는 태도가 분명한데도 차란은 다그치지 않고 머리카락이 그새 많이 길렀다며 다시 말을 돌렸다.

“자리를 비우신 지 그리 오래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원래 머리카락은 빨리 자라는 편입니다.”

“안 계신 사이 궁에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마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때마침 밖에서 상궁이 차를 내어왔다. 두 사람이 창가 앞에 좁게 앉아 있는 걸 보고는 잠깐 당황하더니 잔을 창틀에 조심히 올려 두었다. 차란의 앞에 차를 놓는 사이 뭔가 눈짓을 한 것 같은데 차란이 쌩하니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봤다. 아마 여기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고 눈치를 준 것 같았다.

차만 가져온 줄 알았던 상궁이 탕약 그릇을 내밀었다. 차란이 가거든 마시겠다고 했지만 상궁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이 차란과 상궁이 보는 앞에서 한 사발이나 되는 시커먼 물을 삼켰다. 쓰게 올라오는 뒷맛을 눌러 줄 단 음식이 필요했지만 이번에도 상궁은 빈 그릇만 챙겨 나갔다. 쓴 입맛을 다시며 차를 마신 뒤 차란을 봤다.

“승상 역시 폐하의 사람이 아니십니까?”

딱히 맞는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난감한 표정이 말을 대신했다.

“궁금한 것은 이미 방금 나간 상궁에게 모두 물었습니다만, 돌아오는 대답은 비은궁 궁인들이 걱정된다면 황제 폐하의 명을 거스르지 말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긴 하시단 말씀이시군요.”

“없을 리가 있겠습니까?”

차란이 생긋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까딱 움직이는 모양이 이참에 자신을 마음껏 이용하라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이던 이설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귀비.”

짧은 단어 하나에 차란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집중했다.

“귀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찬은 귀비가 모두를 속이고 입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순히 자기 이름을 속이고 우찬의 이름을 몸에 새기는 일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교묘한 술수로 우찬을 중독에 이르게까지 했다. 그럼에도 귀비는 아직 황궁에 남아 있는 듯했다.

“귀비는 무암궁에 유폐되었습니다. 물론 황궁에 알려진 바로는 지병이 악화되어 바깥출입을 삼가고 정양 중이기는 합니다만, 모두 거짓입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귀비는 폐하의 정인이 아닙니다.”

“…….”

“일전에 사냥대회에서 시체로 발견된 태금궁 궁녀를 기억하십니까? 필시 폐하의 이름을 알고 있던 궁녀였을 텐데 재작년부터 모친의 집에 재산이 불기 시작했답니다. 아마 폐하의 이름을 어딘가에 팔아 왔던 모양입니다. 태어난 아이에게 황제의 이름을 몰래 아명으로 불러 주면 아이가 장성하여 출세한다는 속설이 있거든요. 그것도 다 옛날 미신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성행한다니 한심한 노릇입니다만.”

차란은 진짜 진절머리난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털었다.

“아무튼 귀비도 그 궁녀에게 폐하의 이름을 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모친의 집을 뒤지니 북쪽에서나 볼 수 있는 금광석이 꽤나 나왔답니다. 그 모친도 작년쯤부터 딸이 궁을 나올 때마다 집에서 몰래 수상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았다 실토했고요.”

“그럼 귀비가 가진 이름은 가짜……, 가짜라는 말입니까?”

“폐하 말씀으로는 아주 감쪽같다 하시니 귀비가 직접 실토하지 않는 이상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만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차란은 감히 그런 간특한 짓을 저지르고 뻔뻔히 입궁한 귀비가 기가 찬 모양이었지만 이설은 다른 데에 생각이 팔려 있었다. 우찬이 직접 보고도 구별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새겨진 이름이라니 아주 조금 욕심이 생겼다.

이설은 제 한쪽 손목을 들여다봤다. 어제 우찬이 남긴 자국이 아직 벌겋게 부어 남아 있었다. 이 위로 우찬의 이름이 생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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