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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35)화 (235/300)

달의 황홀경

235화

“서신은 일을 마무리하러 가기 직전에 보낸 것입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늦게 도착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정말로 일을 마치는 대로 환궁하려고 했다 이 말인 건데.”

평정심을 유지한 듯 보이는 우찬이지만 속으로는 깊이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말을 믿을지 아니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었을 거라는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지.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알려 주지 않은 채 우찬은 서신을 그대로 접어 품에 도로 넣었다. 무딘 시선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일말의 온기조차 없는 표정은 볼 때마다 낯설었다.

이설은 문득 우찬이 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화가 났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나를 피해 도망치려 한 이유는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평온한 어조로 가장 대답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꺼내는 우찬의 시선을 피했다. 역시 이 일이 가장 우찬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이었을까.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궁에 돌아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이?

“폐하를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만 됐다.”

우찬에 허공에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유려한 손동작이 무척 짜증스러웠다.

“어차피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네게 뭘 더 물을 게 있다고.”

“…….”

“벌써 이틀이 지났어. 오늘도 입을 열지 않겠다면 두 사람의 목이 날아가겠구나.”

음의 높낮이 없이 대수로울 것도 아니란 듯이 말하는 우찬은 만사가 태평해 보였다. 이설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고 눈에 힘을 주고 우찬을 맹렬하게 노려봤다. 온종일 배가 더부룩하고 소화가 덜 된 기분이기는 해도 현기증이 난다거나 구토가 치밀어 오른 적은 없었는데 우찬을 마주한 후부터 머리가 무거워지고 속에서 뭔가 자꾸 치미는 느낌이 들었다.

“제 궁인들은 죄가 없습니다.”

“그래 맞아. 죄는 네게 있으니까.”

“그럼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것도 제가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나더러 궁인들 대신 네 목을 베라고 부탁하는 것이냐?”

다소 비약적인 추측이었다. 이설은 아래턱을 당기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가 죽으면 제 궁인들과 연국의 사람들을 해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실 수 있으십니까?”

큰 기대를 가지고 물었던 건 아니었다. 설령 우찬이 그리 약조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하더라도 결심을 내리기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선택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밤낮으로 도망쳤던 게 아니다.

인정하자니 억울하고 비통하기 그지없지만, 죽음을 택하기에는 아직 우찬이 좋았다. 그래서 함께 있을 수 있는 앞으로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찬은 이설의 질문을 어떤 결심으로 오해한 것인지 느닷없이 매서운 눈빛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보다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약조하지.”

우찬이 순식간에 낚아챈 이설의 손목을 꽉 쥐어 잡았다. 살이 빠져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목이 커다란 손에 쉽게 휘감겼다. 맥이 뛰는 자리에 닿은 엄지가 긴 동맥을 가르듯 좌우로 살을 쓸어내렸다.

“네가 죽으면 네가 걱정하는 사람들을 모두 산 채로 땅에 묻겠다.”

“…….”

“그러니 허튼수작 부리지 마.”

우찬이 손목에 힘을 푸는 걸 느끼자마자 옆으로 세게 쳐 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렸던 손이 서서히 제 색을 찾아 돌아왔다. 저릿한 감각이 드는 건 손인지 가슴인지 모르겠다. 우찬이 이런 식으로 협박 어린 경고를 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벌겋게 자국이 남아 있는 손목을 문지르며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우찬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허튼수작 같은 거 부릴 생각 없습니다.”

“말로는 뭐든 못 할 게 없지.”

“정말로 죽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습니다.”

우찬이 그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는 듯 은연중에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쳐다봤다.

“다만 궁인들은 죄가 없으니 벌을 주시려거든 제게 내리시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폐하께서 만일 제 죄의 무게를 죽음에 달아 놓으셨다 하더라도 목숨만은 살려 달라 애원하였을 것입니다.”

“죄를 인정하니 벌은 받되 극형은 과하다?”

“예.”

이설은 순간 자신의 태도가 너무 뻔뻔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차라리 우찬이 이를 언짢게 여겨 한 며칠 멀리해 준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면 네가 생각하는 적당한 형벌은 무엇이냐?”

“비은궁에 저를 당분간 유폐시켜 주십시오.”

“유폐?”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우찬이 되물어 확인했다. 예, 하고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긴장하여 탁자 아래 발을 엇갈려 꼬았다. 아침부터 왼쪽 발목에 꼭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려워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황궁 밖에서는 굳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름이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황궁에 돌아온 뒤로 이따금 이름이 있는 발목이 간지럽거나 따끔거릴 때가 있었다. 침상에 앉아 있다 무의식중에 발목을 문지르는 것을 태의가 진찰을 하다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했다.

어젯밤 잠들기 전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유폐였다. 이름을 완전히 지우기 전까지는 우찬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가급적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비은궁 궁인들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거기까지 바라는 건 지금 상황에 무리였다.

“너를 유폐시켜 달라고?”

확실하게 대답을 듣고도 우찬이 재차 물었다. 이번에는 숨기지 않는 미묘한 감정이 얼굴에 선연히 떠올랐다.

“나쁘지 않은 형벌이지만 네 속셈을 간과할 수는 없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우찬은 우려하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속 시원하게 밝혔다.

“헌데 유폐를 당분간만 시키는 경우는 없어.”

“정인을 너무 오랫동안 유폐시키는 것도 세간의 눈들이 보기에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습니다만.”

말 끝나기가 무섭게 우찬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돌하다 못해 되바라지기까지 한 이설의 대답을 듣자마자 터지는 웃음소리가 창밖으로 새어 나갈 정도로 크게 울렸다. 입술이 호선으로 넓게 늘어나고 광대가 올라선 우찬을 얼마만의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만큼 반갑지가 않다. 송연함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가 목구멍을 조여 말을 막았다.

“그건 걱정할 거 없어. 세간에 알려진 내 정인은 무암궁의 귀비니까.”

“…….”

“그러고 보니 귀비의 사특한 짓거리를 알아채는 데에 네가 큰 공을 세웠지 아마.”

귀비 생각을 하지 못했던 이설이 난처함에 말을 잃은 사이 우찬이 나긋하게 말했다. 양화성에서 도망칠 때 두고 갔던 편지에 남겼던 얘기를 꺼내는 것이라 생각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 공을 높이 사는바, 이틀의 시간을 더 준 셈 치지.”

“무슨 시간 말입니까?”

“몇 번을 말하느냐?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해야 했던 그 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 하루마다 궁인들의 목을 벨 거라고.”

“폐하!”

같은 말을 끝없이 반복하는 우찬에게 질린 이설이 결국 소리를 질러 울분을 토해 냈다.

“유폐는 네가 후궁 된 본분을 잊고 궁 밖으로 도망을 다녔던 죄에 대한 형벌이다. 그리고 그런 형벌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우찬이 말을 멈추고 새삼 자신의 침소를 새로이 둘러봤다.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비은궁으로 돌려보내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궁인들의 목숨만은 제발, 차라리 궁 밖으로 쫓아내셔도……!”

서릿발처럼 차갑게 들어왔던 것과는 달리 다소 기분이 풀린 표정으로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돌아서는 우찬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발바닥의 상처 때문에 제대로 걸어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를 돈 우찬은 걸음을 멈췄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 도망치고 밀어낼 땐 언제고 이제 와 나를 쫓는 걸 보니 썩 기분은 좋지 않네.”

“폐하.”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아직도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궁금하구나.”

그리고는 쌩하니 몸을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잠시 열린 사이 밖에 기립해 있던 궁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설을 보고 걱정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곧 문이 닫혔다.

깨질 듯이 머리가 아파 차라리 정신을 잃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어지는 인기척을 붙잡으려 폐하, 하고 크게 소리 내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더 불러 보고 싶었지만 울먹이는 목소리가 비참해 더는 아무런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아침을 억지로 먹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상궁이 목욕을 하겠느냐 물었다. 그리하겠다 대답하니 상을 치운 뒤 목간으로 데려갔다. 목간까지 가는 길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로 보지 못했다. 미리 궁인들을 모두 치워 놓은 것 같았다. 왜 이렇게까지 치밀해야 하는 건지 구역질이 났다.

한사코 거절하는데도 상궁이 목욕 시중을 들었다. 그간 많이 편해진 주 상궁조차도 목욕하는 동안 목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면이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상궁이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수치스럽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했다.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신경이 쓰여 제대로 몸을 데우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침소로 돌아왔다.

차라리 아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침소에 혼자 있는 게 더 편했다.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 서책을 펼 새도 없이 창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밖에 후원으로 나가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테지만 어제 호위군에게 제지당한 일을 다시 시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창틀에 상체를 기울이자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찬 바람이 불어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가 시렸지만,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해가 질 때까지 적당한 변명거리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또 온종일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을 수가 없었다. 우찬에게 더 이상 인내심을 바라는 것은 무리이다. 오늘마저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우찬은 기어코 칼에 피를 묻힐 것이다.

“마마,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상궁의 인기척이 들렸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 후 뭔가 허전한 것 같더라니, 깜빡했던 탕약을 가져온 모양이었다. 가져다주면 헛구역질을 참고 단숨에 들이켠 뒤 빈 그릇을 주면 될 일이다.

“루 소의 마마.”

이렇다 할 변명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민에 휩싸였던 이설을 누군가 조용히 불렀다. 상궁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사내의 목소리가 그저 반갑기만 한 듯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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