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34화
희멀건 죽 그릇에 숟가락을 넣고 의미 없이 휘저은 지 한참이 지났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죽은 그사이 식은 지 오래고 되직하게 굳어 한 덩이의 떡처럼 보였다. 작게 떠서 한입 맛본 뒤 또 숟가락만 돌려 대니 여태껏 잠자코 옆에 서 있던 상궁이 한마디 했다.
“죽이 식어 그러시는 거라면 금방 새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상궁이 진짜 상을 물리려는지 손을 뻗었다. 이설이 손을 막으며 밥그릇을 제 쪽으로 당겼다. 당황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상궁은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도로 손을 걷었다. 옷소매에 감춰지는 두 손을 보며 이설이 짧은 숨을 토했다.
어제저녁부터 식사 시간마다 상궁이 들어와 죽을 남기는지 감시했다. 반 이상 남기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고 바닥이 보일 때쯤까지 먹다 도저히 못 먹겠다는 시늉을 하면 그제야 상을 들고 물러났다.
이렇게까지 고약하게 굴 필요가 있을까 싶어 상궁이 밉다가도 꾸역꾸역 죽을 먹고 있는 자신을 어쩐지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빛을 느낄 때면 기분이 축 내려앉았다. 진짜 고약한 것은 상궁이 아니라 황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다 게워 내는 게 속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말 목 아래가 꽉 막힌 것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먹히지 않았다. 하루 온종일 누워 있기만 하니 소화가 될 리가 없었다.
“정말 더는 못 먹겠습니다.”
이번에는 끝내 이설이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 이설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께 어떻게 고하든 상관없으니 이만 상을 물리세요.”
우찬은 지난 이틀 동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침소에만 찾아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아예 태금궁으로 발길을 끊은 듯했다. 어제저녁부터 언제 우찬이 돌아올까 불안한 마음을 안고 누워 있던 것이 오늘 아침에 됐을 때는 다소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이곳이 아니라고 우찬이 잘 곳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초조하게 여겼는지 모르겠다. 우찬이 자신에게 완전히 정이 떨어졌는지 잠깐 마음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다.
터무니없는 위협을 가하는 우찬에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다 끝내 혼절까지 했다. 우찬이 이틀 내내 자신을 거들떠보러 오지도 않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답답한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두드리며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났다. 이틀 전 사기 조각을 밟은 탓에 발바닥에 상처가 나서 거동이 불편했다. 발을 치료한 흔적을 보고 기겁을 하여 일어나 확인했지만 발목은 건드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설은 혹시 몰라 발목 위 이름 위로 흰 천을 감아 묶은 뒤 그 위에 바짓단을 내리고 재차 끈으로 묶었다. 그나마도 호위군에게 들킬까 두려워 포단을 뒤집어쓰고 한 일이었다.
“폐하께서,”
막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설을 보고는 상궁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마께 하신 말씀은 모두 진심이셨습니다.”
“…….”
“비은궁의 궁인들을 조금이라도 걱정하신다면 황명을 따르시는 편이 더 좋으실 겁니다.”
경고일까 간언일까. 표정은 차갑고 말투는 무덤덤했다. 그래서 이설은 상궁의 말을 간언에 가까운 경고라고 여기기로 했다.
“탕약만 드시면 오늘 저녁상은 이만 물리겠습니다.”
상궁은 아직 반이 넘게 남은 그릇을 가져간 뒤 탕약 그릇을 앞자리에 놓았다. 한 번에 다 먹기에 부담스러운 양의 탕약은 보기만 해도 속이 다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궁도 더는 참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군말 없이 사발을 비웠다. 쓰다 못해 떫기까지 한 탕약은 마치 사약을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태금궁의 상궁은 쓴 탕약을 먹고 난 뒤에 입가심을 하라고 꿀에 절인 과일이나 당과를 주지 않았다.
그릇들을 조용히 정리하기 시작하는 상궁을 부르자 고개는 돌리되 대답하지 않았다.
“내 궁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설마 폐하께서 정말로…….”
차마 말로 꺼내 볼 수도 없는 끔찍한 일을 우찬이 저지른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티 내고 싶지 않아 담담한 척 얘기를 꺼냈다. 상궁은 행동을 멈춘 채로 묵묵부답이었지만 대답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인 눈치였다.
“다들 무사한지 정도만 알고 싶습니다. 환궁한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소식 물어볼 곳이 없습니다.”
긴 사정 설명 없이 무사하다 아니다 정도만 들어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았다. 속이 타는 마음도 모르고 상궁은 긴 고민 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비은궁은 안에 궁인들이 갇힌 채로 폐궁 되었습니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소인도 모르옵니다.”
“폐궁이라니 어째서!”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어 자리에 도로 앉았다. 다시 특유의 감정 없이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궁은 시탁에 그릇들을 챙겨 올린 뒤 이설의 어깨에 난 상처를 보기 위해 뒤에 바짝 붙어 섰다. 태의가 없을 때도 두어 번 상처 위에 새로 약을 찧어 발라 준 일이 있었다. 주 상궁이 아닌 여인에게 맨살을 드러내는 게 아직은 수치스러웠지만 저항할 힘도 없었다.
상궁이 가져온 나무 그릇에서 진득한 진액을 어깨에 붓자 상처의 묵직한 통증이 어깨를 짓눌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진액을 펴 바르며 상궁이 한결 온기 넘치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궁인들이 걱정되신다면 마마께서 어서 쾌차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폐하께서도 마음을 푸실 겁니다.”
펴 바른 진액 위로 새 무명천을 감아 주며 상궁이 몸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아까보다 훨씬 더 작은 목소리로 입술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그리고 폐하께 너무 무정한 정인이 되지 말아 주십시오. 오랫동안 폐하를 모신 늙은이들의 하나뿐인 청이옵니다.”
세월의 한이 무겁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나지막이 머리를 울렸다. 자신은 폐하의 정인도 뭣도 아니며 아무런 인연이 없는 낯선 사내일 뿐이라고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슬쩍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입가에 진한 주름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다시 옷깃을 올려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상궁이 사용했던 무명천을 정리할 때였다. 시탁에 물건들을 담아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침소 바깥문들이 차례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궁이 흘깃 보며 눈짓한 뒤 이설에게서 물러났다.
곧 침소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며 우찬이 들어왔다.
“모두 물러가라.”
문턱을 넘어서기 무섭게 우찬이 상궁을 쫓아냈다. 인기척이 들리지는 않아도 어딘가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을 호위군까지 모두 자리를 피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궁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우찬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죽을 또 남겼던데.”
“제가 끼니를 걸렀는지, 밥을 얼마나 남겼는지 따위를 확인하러 오신 겁니까?”
우찬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순간 이설은 우찬이 간밤에 꼴딱 날을 셌다는 걸 확신했다. 그제 봤을 때보다 얼굴이 더 수척해 보였다.
본의 아니게 삐딱한 말투가 툭 튀어나와 당황했지만 표정을 숨긴 이설이 부상 당한 어깨를 손으로 만졌다. 상처에 약이 스며들며 약효가 도는지 뭉근한 통증은 가시고 쓰라리고 따갑기 시작했다.
“몸은.”
“보시는 대로입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삐딱선을 탄 말투에 두 번은 참기 힘들었는지 우찬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말하면 꼭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들리잖아.”
“…….”
“왜 아니라는 대답이 없지? 정말 그러기를 바라느냐?”
혼절 후 깨어난 뒤부터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이 잘못되면 남아 있는 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우찬이 헛되이 안겨 준 희망 때문이기도 했다. 이설이 자신의 정인인 이상 절대 황궁을 떠나게 두지 않을 거라는 우찬의 덧없는 고집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찬의 질문을 무시하고 이설이 물었다. 혹여 궁으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를 물을까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답을 미루는 하루마다 비은궁 궁인들을 한 명씩 죽이겠다는 말이 좀체 농담 같지가 않았다. 사람을 가둔 채로 폐궁까지 시킨 마당에 궁인 몇 명 죽이는 것쯤이야 황제 직권으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제 코가 아무리 석 자라도 궁에 남아있는 궁인들 생각을 좀 더 해야 했는데 경솔했다. 혈혈단신으로 쫓기는 몸으로는 설령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지라도.
“여기까지 저를 만나러 오신 이유가,”
“이 궁은 나의 궁이고, 여긴 내 침소인데.”
“…….”
“마치 내가 오면 안 될 곳을 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며칠 지내는 동안 익숙해졌다고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여기가 황제의 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한 이설이 태연한 척 표정을 지었다. 냉수라도 한 잔 있었으면 싶었는데 태의는 너무 차갑거나 뜨거운 물은 몸에 좋지 않다며 미지근한 온수만을 허락했다.
우찬은 크게 화를 내거나 이설을 더 당황시키는 대신 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구겨지고 더러운 겉을 펼쳐 안을 보이자 몇몇 군데에 물이 번진 글씨가 보였다. 다소 당황하기는 했지만 까무러칠 만큼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급하게 휘갈기느라 평소만큼 반듯하지는 못했지만 익숙한 필체는 제 것이었다.
“방금 궁으로 들어온 것이다. 너를 사칭한 자의 것이냐 아니면,”
“제 것입니다.”
“…….”
“제가 도국에 있을 때 폐하께 보낸 것이 맞습니다.”
“네가 직접 쓰고 직접 보낸 것이 맞다고?”
“예.”
시동에게 심부름을 다녀오라 건네준 뒤로 벌써 며칠이나 지난 뒤에 황궁으로 도착한 서신이었다. 넉넉잡아 닷새면 충분할 거라던 말이 무색하게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난 뒤였다. 일이 이렇게 된 바에야 차라리 중간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다면 좋았을 텐데.
이설은 제가 쓴 글을 물끄러미 읽어 내려가다가 서신을 우찬에게로 밀었다.
“제가 궁으로 반드시 돌아올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이제 폐하께서도 조금은 아셨을 거라 믿겠습니다.”
“정말 궁으로 돌아오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냐?”
“거기서 정체가 발각되어 쫓기지만 않았어도 저는 제 발로 무사히 환궁하였을 것입니다.”
서신이 이리 늦게 궁에 닿은 걸 보면 제 발로 무사히 환궁하였을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은 황제의 궁에 감금되다시피 갇혀있고, 비은궁은 폐궁이 되어 그 궁인들은 오도 가도 못 한 신세가 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