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31)화 (231/300)

달의 황홀경

231화

“보시는 곳에서 다 먹을 테니,”

소반으로 향하던 손이 멈칫했다.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진 소반은 정신을 차려 보니 침상 아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직 남은 희멀건 죽과 검은 탕약이 한데 뒤섞여 바닥에 쏟아졌고 사기그릇은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할 말을 잃은 이설이 숟가락을 든 채로 멍하니 우찬을 봤다. 평온한 얼굴은 완전한 가면이고 그 너머로 간신히 화를 참는 본심이 훤히 보였다.

“궁 밖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이제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우찬이 오늘 하루 얼마나 참고 있었던 건지 깨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찬 딴에는 여태껏 화를 참고 참아 자신을 상대했던 거였다.

“널 다치게 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이 그리 안심이 됐느냐? 그래서 이리 주제넘게 굴어?”

“절 해치지는 않겠다 하신 폐하께서 제 사람들을 죽이겠다 겁박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폐하께 주제넘게 굴 수 있단 말입니까?”

명치를 중심으로 장기가 위아래로 흔들거리는 것 같다.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니 현기증도 나고 등 뒤로 식은땀도 흘렀다. 치밀어 오르는 게 북받치는 감정인지 헛구역질인지 몰라 계속 마른침과 함께 삼켜 냈다.

우찬은 미묘한 표정 변화도 없이 이설을 가만히 노려봤다.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이설이 입을 뗐다.

“저를 비은궁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

“꼼짝 않고 지내라 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궁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 명하시면 평생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제 궁으로만 돌려보내 주십시오.”

“불허한다.”

우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짐작하던 바이지만 낙심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태금궁은 폐하의 처소입니다. 한낱 후궁 따위인 제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내 처소에 누가 얼마나 머물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럼 잠깐이라도 좋으니 비은궁에 들렀다 오게 허락해 주십시오. 혹 제 몸이 성치 않아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시려거든 몸이 낫는 대로 허락해주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약조해 달라는 말에 우찬이 크게 한 번 비웃었다. 감히 네까짓 것이 약조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느낌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는 듯 한 귀로 흘려듣고 무시해 버린 게 분명했다.

황제의 침소에서는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까처럼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이나 상궁이나 궁녀들은 제대로 기별도 하지 않고 안을 들락날락할 것이고 무엇보다 우찬의 호위군이 어디선가 그림자처럼 숨어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천장이나 서까래 아래, 기둥 뒤, 어두운 그림자에 사이 어디든 그들은 몸을 숨길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비은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혼자서 이름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혹여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기연이나 주 상궁이 있었다. 가급적 주 상궁에게까지 이 수치스러운 사실을 알리고 싶지는 않지만.

“제가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습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궁에 들르게 해 주십시오.”

“마치 네가 원치 않게 자리를 비운 것처럼 말하는구나.”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이설을 규탄하듯 바라본다. 우찬이 이설의 오른 팔뚝을 꽉 쥐어 잡았다. 가까이 다가온 우찬이 위에서 찍어 내리듯 이설을 내려다봤다.

“양화성에서 나를 피해 달아난 것도, 도국에서 금군을 피해 숨어 있었던 것도, 그날 산에서 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애원한 것도 전부 너였어. 너를 반역자로 몰아 비은궁 궁인들을 모두 처형했다 하더라도 그건 네 책임이었을 거다. 근데 이제 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것이냐? 네 궁인들조차 우스워하겠구나.”

“제가 궁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도망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저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 일만 해결되면 반드시 폐하께 돌아오겠다고 분명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네 약조는 이제 신망이 없어.”

이보다 더 힘이 세질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팔뚝의 압박감이 더 심해졌다. 이대로 뼈가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낮은 신음이 흘러나오기 직전 우찬이 거칠게 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침소를 나가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경대 옆에 옥갑 문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안을 휘젓던 손이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빠른 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던지는 시늉을 하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찔 돌려 눈을 꽉 감았는데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떠 보니 포단 위에 낯익은 가락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탄신일에 선물로 준 가락지 하나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네가 그저 글자 몇 자 따위로 내게 돌아오겠다 약조한 것을 내가 어찌 믿을 수 있느냔 말이다.”

오래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다. 우찬이 말해 주지 않더라도 무슨 가락지였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락지를 쳐다보며 허전해진 손가락 하나를 하릴없이 만져 댔다. 그 뒤 어렵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 하여도 폐하께 돌아오겠다던 제 약조는 진심이었습니다.”

이설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일만 끝내면, ……정말 그 일만 끝낸다면,”

“그러니 네가 끝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뭔지 어서 말해.”

“…….”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느냐?”

이설은 그 말이 나오자마자 입을 꾹 닫았다. 어떤 식으로든 둘러댈 변명이 없었다. 섣불리 거짓말을 했다가는 들키기 마련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할 것 같다면 아예 입조차 열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우찬은 이설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화를 삭이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우찬도 그날 밤 봤을 때 이미 성치 않은 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리는 이미 걷기 불편해 보였고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검 주변이 유독 덜 마른 피로 물들여 있던 것도 생각났다. 우찬이라고 지금 성한 몸으로 이설을 윽박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래,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지.”

“…….”

“그럼 네가 대답을 하루씩 미룰 때마다 네 궁인들의 목을 치는 것은 어떠하냐?”

“폐하!”

느닷없이 차분해진 우찬의 목소리와 달리 이설이 일순간 비명처럼 우찬을 불렀다. 우찬은 기분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태도로 유유히 술병을 입에 대고 마셨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넘어가고 내일 해가 질 때쯤까지도 네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궁녀 하나를 참수하겠다.”

“그게 무슨 억지이십니까!”

“궁인 전부를 희생하면 너도 열흘 남짓한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좋은 일이 아니냐.”

조금 전에 언제 그렇게 화를 냈었냐는 듯 우찬이 즐거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설은 우찬에게 난생처음으로 사람 같지 않은 살기를 느꼈는데 그게 꼭 당장 자신을 참수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와 닿았다.

궁 밖으로 한 발짝만 내디뎠다가는 제 사람들을 죽일 거라는 협박과 같다. 우찬은 지금 절대 농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다급해진 이설이 포단을 들추고 침상 아래로 무작정 내려왔다. 발바닥에 따끔한 고통이 들었는데 아마 사기그릇 파편을 밟은 모양이었다. 여유롭게 술을 마시던 우찬이 그 모습을 보고 병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뭐 하는 거야!”

우찬의 말도 아랑곳 않고 이설이 파편 위를 지나 우찬에게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뻗은 팔이 우찬에게 닿기도 전에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쓰러졌다. 양팔로 바닥을 짚었다가 어깨 통증으로 상체가 아래로 엎어졌다.

우찬이 몸을 숙여 이설의 상체를 받치며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궁인들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움직이지 마!”

“어떻게 제게만 이리 모질게 구실 수가 있으십니까?”

“모질어? 네가 지금 내가 너를 모질게 군다 하였느냐?”

오늘 하루 벌써 두 번이나 쏟아 낸 눈물이 솟구치는 감정과 함께 다시 왈칵 쏟아졌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흘러넘치는 눈물이 옷깃을 축축하게 적셨다. 목이 메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 사이 우찬이 감정이 격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사라진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를 찾아다녔을지 생각이나 해 본 적 있느냐? 네가 나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비참한 심정은 헤아려 봤느냔 말이다!”

“흣, 저, ……저는,”

“은애한다 애원하는 나에게 너를 기만하지 말라며 모질게 굴던 것도 너였다!”

더부룩한 속이 메슥거렸다. 몸을 끌어안은 우찬이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는데 귀가 울려 무슨 소린지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영문도 모른 채 자꾸 눈물이 흐르니 현기증이 나는 게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나를 경멸하듯 노려보고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쳐 내는 너인데 그런데도 나는 네가,”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게 울컥하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속을 다 게워 낸 뒤에나 알아차렸다. 누군가에게 명치를 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배 속 장기가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꼬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철창에 갇혔을 때 사내들이 몰려와 발로 걷어찼을 적에도 이만큼 아프지 않았다.

속은 속대로 뒤틀리고 머리는 누가 돌로 치는 것처럼 깨질 것 같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우찬의 절망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설아, 이설아! 연이설, 정신 차려!

밖에 아무도 없느냐!

당장 태의를 불러오거라 어서!

우찬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친다. 아픈 제 몸을 걱정이라도 해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미해져 가는 정신에 맥락 없이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