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30화
태금궁 상궁이 자신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무시할 리가 없다. 분명 우찬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리라. 울화가 치민 이설이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접었다. 우찬의 아까 경고는 절대 농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수면향의 잔향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창을 다시 열었다. 해가 지며 밖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보름 남짓한 시간밖에 차이 나지 않는데 도국에 있을 때와는 날씨가 확연히 달랐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아 딱 좋은 날씨다. 창틀 밖으로 몸을 걸치자 저녁 바람에 정신이 들 무렵 흐릿한 어둠 속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이설이 창에서 떨어져 나와 허둥지둥 곧 한숨과 함께 어깨를 늘어뜨렸다. 쫓기는 신세를 너무 오랫동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바람만 좀 쐬다 들어가겠습니다.”
호위군은 대답이 없다. 원래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호위군과 대화를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창을 열고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는데 괜스레 다시 울화가 치민 이설이 눈을 치켜떴다.
“내가 처소 밖으로 나가면 쫓아와 다리라도 자를 셈입니까? 폐하께서 그리 명하셨습니까?”
맞다 아니다 대답 없는 호위군과 대치하여 노려보다 먼저 창을 쾅 닫아 버렸다. 상궁이든 호위군이든 모두 황명을 따르는 사람들일 뿐인데 엄한 곳에 화풀이를 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침상으로 되돌아가다 면경에 비친 모습을 봤다. 삐쩍 마르고 푸석푸석한 나무 꼬챙이가 야장을 입고 비틀거리며 있었다. 가까이 들여다본 얼굴은 가관이다. 한쪽 볼은 볼록하게 부어 있고 입술은 터졌다. 야장을 들춰 보니 몸 여기저기 상처도 많았는데 전부 치료한 흔적이 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도독 돋아났다. 주위를 살피며 침상에 앉아 다리를 주무르는 척 상체를 숙여 왼발을 봤다. 흰 천으로 묶어 두었던 건 없어지고 통이 좁은 바짓자락만 발목에서 간당간당했다. 들춰 확인해 보니 이름은 그대로다. 아까 우찬의 반응으로 보건데 눈치챈 것 같지는 않다.
안도의 한숨이 뭘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까지 이름을 들키지 않았다는 안도라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발목에 이름이라 하더라도 우찬과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이상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갑자기 밖의 인기척이 달라졌다. 타닥타닥 발소리가 분주해졌다. 궁의 주인이 돌아온 것이라 직감하고 재빨리 포단 안으로 몸을 눕혔다. 버릇처럼 왼쪽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어깨가 닿고 놀라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뒤 포단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일어났다고 들었는데.”
포단이 귀를 막아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포단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이설은 그래도 꼼짝 않고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네가 처소 밖으로 나가면 쫓아가긴 하겠지만 네 다리를 자르지는 않을 거야.”
불과 일다경도 되기 전 홧김에 뱉은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나는 너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거든.”
“…….”
“물론 네 팔다리를 잘라 옆에 두면 어떨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뺨 위에 우찬이 손등을 가볍게 갖다 댄 뒤 쓸어내렸다. 아까 면경에 봤을 때 퉁퉁 부어오른 쪽이었다.
“나는 온전한 모습의 네가 좋……,”
나긋하게 말을 잇던 우찬이 잠시 멈춰 뜸을 들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제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네가 다치는 일은 없을 거야. 다치는 건 네 사람들이니까.”
“대체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뭡니까!”
결국 치미는 화를 참지 못했다. 포단을 옆으로 거칠게 걷으며 이설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천장까지 치솟았다.
우찬은 허리를 숙여 이설의 뺨을 쓸어내리고 있었는데, 이설이 상체를 세우자 천천히 허리를 펴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잠들기 전 봤던 모습 그대로, 정복 차림에 대충 묶은 머리를 하고 서 있었다.
“황명을 거역했다 차라리 제게 벌을 내리세요. 옥에 가둬도 좋고, 극형에 처하신다 하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찬이 코웃음으로 가볍게 비웃으며 이설과 떨어져 의자에 앉았다. 아까보다는 나아지긴 했지만 유심히 보면 다리를 불편하게 걷는 게 느껴졌다. 아마 그날 산에서부터 다리를 다쳤던 게 틀림없다. 어쩌다가 다친 건지, 얼마나 다친 건지, 언제쯤에나 나을 수 있는 건지 오만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건지 회한이 찾아왔다.
우찬이 마시는 것이 술이라는 걸 안 순간 제게도 한 잔 달라 청할 뻔했다. 차라리 술에 잔뜩 취해 생각이나 걱정일랑 모두 잊고 백지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
타들어 가는 사람 속도 모르고 우찬은 빈 잔에 술을 채우며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연심으로 은애하는 너를 옥에 가둘 수가 있겠느냐? 극형이라니 우습구나.”
술 따위 취하지 않아도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가 될 수 있었다. 잘못 들었을 수가 없는 선명한 목소리가 양쪽 귀로 흘러들어 와 뇌리에 콱 박혔다. 동시에 어렴풋하게 잊고 있었던 우찬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은애하고 있다 이설아.’
‘너를 원하는 이 마음이 연심이 아닐 리가 없어.’
서로 간의 긴장이 극에 달했던 순간 우찬이 난데없이 은애한다 고백했었다. 그때 그 순간 느꼈던 비통함이 같은 크기로 다시 마음을 세게 짓눌렀다.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느라 포단을 손톱으로 마구 쥐어뜯었다.
“지금 저를 은애한다, 하셨습니까?”
“그리하였다.”
이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우찬은 태연하게 수긍했다.
“너를 은애한다 하였어. 그때도, 지금도.”
“…….”
“근데 그때 네가 내게 뭐라 하였는지 기억하느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이 매섭게 우찬을 쏘아봤다. 우찬은 술잔을 탁자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뒤 눈을 맞췄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웃고 있다 말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너를 은애하는 이유는 네가 내 정인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
“네 이름이 연이설이 아니었다면 너 따위에게 연심을 갖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그저 천명을 따르는 것일 뿐이라고. 그 마음을 연심으로 포장하여 너를 기만하지 말라고.”
조금씩 격앙되던 목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우찬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이설이 깜빡거리는 눈꺼풀에 밀린 눈물들이 뺨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우찬이 못 보지는 않았겠지만 우는 모습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아 소매로 급하게 닦아 냈다. 닦아내기가 무섭게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부질없는 짓이었다.
잔을 채우자마자 비운 우찬이 다시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런 기가 막힌 소리를 듣고도 아직 너를 은애한다 하니 퍽 감동이긴 하겠지.”
“…….”
“좋을 대로 생각하거라. 어차피 내 손목의 이름은 네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네가 내 곁을 떠날 수는 없을 테니.”
이설이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 우찬이 말했다. 심드렁한 말투에는 진심 따위 깃털 하나 무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없이 술잔만 비우는 우찬을 조용히 응시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 미련한 마음을 접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우찬은 끝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실낱같은 희망은 스스로 만든 게 아니라 우찬이 억지로 손에 쥐여 준 것이다.
우찬이 자신을 정인이라고 믿는 이상 우찬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 우찬과 세상을 전부 속이고 우찬의 정인으로 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폐하, 수라상이 준비되었사옵니다.”
긴장감 흐르는 침묵을 깨고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우찬이 들라 이르기가 무섭게 상궁이 작은 소반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우찬의 수라상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했다.
상궁은 미리 들은 바가 있는지 소반을 이설의 앞에 내려놓은 뒤 조용히 나갔다. 소반 위에는 희멀건 쌀죽과 조린 나물, 그리고 흙탕물 색의 탕약이 전부였다. 가뜩이나 허기도 지지 않는데 이런 걸 먹으라고 가져다주니 괜히 헛구역질만 더 났다.
우찬이 일어나 장포를 벗었다. 의자 등받이에 대충 걸쳐 둔 뒤 가까이 왔다. 소반 앞에 마주 앉는 걸 보니 무슨 말을 꺼낼지 알 만도 했다.
“먹거라.”
“…….”
“내가 보는 앞에서 다 먹어.”
“먹지 않으면,”
“누군가 죽겠지.”
예상은 했지만 너무 당연스레 대답하는 우찬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연모하는 마음은 아직 이렇게 크고 선명한데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상처다. 설령 정인이라는 이유로 은애한다 하여도 그렇지 어떻게 제 사람들을 죽이겠다는 말을 저리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코를 훌쩍이자 우찬이 소매로 눈물을 닦아 줬다. 홧김에 손등으로 쳐 내자 허공에 우찬의 손만 붕 떴다. 작정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황했지만 모르는 척 숟가락을 들었다. 우찬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안 하던 짓을 하네.”
식은 목소리와 함께 진한 술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변명도 안 하고.”
이설은 대꾸하지 않고 숟가락에 쌀죽을 펐다. 입에 넣어도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빻은 쌀알은 씹을 것도 없는데 턱만 열심히 움직였다. 부어오른 볼과 터진 입술이 조금 아팠다.
우찬이 빤히 지켜보는 동안 쌀죽 반을 비웠다. 두어 숟가락쯤 떴을 때 이미 더는 먹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가는 다시 우찬이 걸어올 말이 뻔해 억지로 입에 쑤셔 넣었다. 속이 금세 더부룩해져서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 우찬이 숟가락을 든 손목을 잡았다.
“됐어.”
“분명 폐하께서 다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황명인데, 따라야지요.”
밥을 먹는 데 치중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했는데 우찬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오늘 하루 내내 언제는 보기 좋았던 적이 있겠냐마는 지금은 몸에서 냉기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전 같았으면 알아서 몸을 사리고 눈치를 봤을 이설이 붙잡힌 손을 제 쪽으로 확 당겼다. 다시 허공에 덩그러니 우찬의 손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