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9화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는 얼굴 옆으로 햇빛이 환하게 비췄다. 어두운 달빛에도 수려했던 이목구비는 햇빛 아래 더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별다른 일이 없었을 때 봤더라면 얼굴을 붉혔을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여 먼저 눈을 피했다.
“왜 말이 없느냐? 목숨을 구해줬으니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
“…….”
“그게 아니면 궁을 나가게 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든가.”
똑같이 웃음기 없는 얼굴이라 하더라도 우찬은 평소일 때와 기분이 좋지 않을 때의 차이가 컸다. 일부러 표정을 굳혔을 때는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시퍼런 냉기를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이설은 그 차이를 실감할 때마다 등줄기에 서늘하게 돋는 소름을 느꼈다.
궁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자신을 나무라는 우찬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두터운 포단 아래 숨겨 둔 왼쪽 발목의 비밀을 우찬이 발견한 것은 아닌지, 그게 가장 겁이 났다.
“저는,”
다행히 우찬이 빈정거렸던 대로 목에도 마비 증상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다만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듣기 거북할 정도로 거칠었다.
“궁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
“궁을 나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요.”
“헛소리 집어치워.”
싸늘한 목소리가 이설의 변명을 부정했다. 이설은 헛소리가 아니라고 말을 더하려고 벙긋거렸던 입술을 다물었다. 우찬이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게 분명한 지금, 제 말이 먹혀들 리가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우찬은 믿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분명 알고 있었다.
미묘한 신경전처럼 깔리는 침묵을 깨고 이설이 작게 잔기침을 했다. 목이 칼칼해서 그런지 한번 터진 기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침상 옆 협탁에 물이 있는 걸 확인하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찌릿하게 퍼지는 어깨 통증에 멈칫하며 눈을 찡그렸지만 우찬은 가만히 쳐다만 볼 뿐이었다. 손에 닿지 않는 잔을 집으려 애쓰는 걸 빤히 보면서도 대신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지는 않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서운한 마음을 느끼는 스스로를 비난했다. 다 마신 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부질없는 어색함을 메꿨다.
“궁을 나가는 건 이제 포기했나? 생각 외로 얌전하네.”
“소란이라도 피우면 보내 주시는 겁니까?”
빈정거리는 우찬의 말을 유연하게 받아쳤다. 우찬이 피식 가볍게 웃는 소리를 내며 이설에게서 잔을 가져갔다. 대신 제자리에 치워 주는 줄 알고 습관처럼 황공하다는 말이 나오려던 찰나에 우찬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벽에 부딪힌 도자기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 화병이 그 파편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지며 연이어 시끄러운 소리가 이어졌다. 잔이 부딪친 벽은 양각 위에 보옥들이 알알이 박혀 있었는데 벽이 깨지며 그것들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벽 한쪽을 엉망으로 만든 우찬이 태연한 표정으로 이설을 봤다.
“어림없는 소리.”
우찬이 침상 끝에 비스듬히 걸터앉으며 말했다. 코앞으로 가까워진 우찬에게서 연초 냄새가 진하게 났다.
“잘 들어, 연이설.”
뺨을 부드럽게 감싸는 커다란 손의 온도도, 지긋이 바라보는 눈빛도, 낮게 내리깐 목소리도 모두 봄꽃을 피우는 햇살처럼 따뜻했다.
“네가 이 침소 밖으로 벗어나는 걸음 하나마다 네 궁에 있는 궁인들을 죽일 것이다.”
귀가 녹아내릴 듯 다정한 말투로 우찬은 섬뜩한 얘기를 이어 갔다. 이설은 우찬의 얼굴을 보는 것만이라도 외면하고 싶었지만, 뺨을 감싼 손이 어느새 턱을 타고 내려가 목 언저리를 붙잡아 고정했다.
“궁인들이 모두 죽으면 네가 연에서 데려온 네 사람들을 죽일 거야. 그 뒤에는 연에 남은 네 가족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죽일 것이다.”
“…….”
“네가 지금까지 궁 밖에서 만났던, 네가 도망치는 것을 도와준 모든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내 죽일 것이다.”
“폐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읏!”
겨우 용기 냈던 목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도 못했다. 우찬은 가볍게 턱을 움켜쥔 것만으로도 위협이 충분했다.
“울고 싶은 만큼 울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만큼 소리 질러도 좋아. 던지고 부수고 깨트리고 찢고 이 안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하거라.”
너그러운 목소리에 감명을 받아 눈물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우찬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이 그저 위협 삼아 하는 과장이 아니란 걸 알아서, 광기로 번뜩이는 두 눈이 전하는 진심을 다 알 것 같아서 눈물이 터졌다.
“어차피 너는 이 안에서 절대 나갈 수 없을 테니까.”
“폐하!”
“먼저 약조를 깬 것은 네가 아니었느냐?”
우찬이 갑자기 해사한 웃음을 피우며 이설의 눈을 맞췄다. 시시각각 변하는 우찬의 표정을 따라가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약조를 깬 일이라면 아마 지난번 밤에 달의 맹세를 깨뜨렸던 일을 말하는 것일 거다. 노발대발하여 성을 내도 할 말이 없을 지언데, 화를 내기는커녕 이설이 약조를 깬 것을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그러니 나 역시 약조를 깬다 해도 네가 날 비난할 처지는 아니지.”
우찬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전혀 쫓아갈 수가 없었지만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이렇게 웃어 주는 얼굴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는데 막상 그 얼굴을 마주한 지금, 대체 무슨 말로 입을 떼야 할지 모르겠다.
턱 언저리를 쓰다듬던 손이 목선을 타고 내려가 목 뒤를 받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해사한 웃음을 홀린 듯 바라봤다. 물기 젖은 민망한 소리가 났다. 볼에 흘러내리는 눈물 위로 우찬이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이설은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꼭 감은 두 눈으로 소리 없이 눈물만 계속 흘렸다.
“네가 일어난 것을 봤으니 나는 이만 나가 봐야겠다.”
가까이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졌다. 눈을 떠 보니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묶고 있었다. 모난 곳 하나 없는 정복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데에 반해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은 금색 띠로 대충 묶어 올렸다. 묘한 이질감이 상반된 두 격식에서 오는가 싶었는데, 그것보다는 차려입은 정복이 낯선 것이었다.
“해가 질 때쯤 돌아오마.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테니 괜한 기대 하지 말고, 심심하면 저기 쌓아 둔 서책이라도 보거라.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추려 왔다.”
우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이 따라갔다. 전에는 휑하게 있던 벽 쪽에 책장 하나가 새로 생겼다. 가장 위에 칸까지 서책들이 빼곡했다. 좋아할 만한 것들을 추렸다더니, 대충 제목들만 훑어봐도 제 취향의 서책들이었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얌전히만 있다면 너로 인해 죽는 사람은 없을 거야.”
안심하라 일러주는 말이 아니었다. 허튼수작이라도 부렸다간 비은궁의 궁인들부터 연국의 백성들까지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완전한 협박이었다. 이 침소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위협을, 저 아름답고 태평한 얼굴로 여유작작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 것이냐고 소리쳐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황궁에 가둬두려 하는 것인지, 정말 이 침소에 자신을 평생 동안 가둬두고 살 생각인 건지 물어야 했다.
그런데 방금 눈물을 흘린 탓인지 머리가 조금씩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옆으로 휘청 기우는 상체를 받아서 우찬이 자리에 눕혀 주었다.
“수면향을 피워 뒀으니 너무 무리하지는 마. 태의 말로는 네 몸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향초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더군. 잘된 일이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보다야 자는 게 나으니까.”
“폐, 하 저는……,”
“쉬이.”
우찬이 아이를 조용히 시킬 때나 내는 소리로 이설의 입을 막았다. 곧바로 입술에 타인의 말랑한 살갗이 가볍게 붙었다 떨어졌다. 물기 젖은 마찰음이 제 입술에서 나는 소리인지도 실감 나지 않았다. 한번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눈꺼풀이 무겁게 감겼다.
“어떤 방법으로도 좋으니 내 옆에 있어야 한다 설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를……,”
귓가에 속삭이는 우찬의 목소리가 점점 뿌옇게 흩어진다. 이설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지만 끝내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쯤이었다. 자고 있는 동안 누가 들어왔었는지 안을 밝힐 불은 충분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수면향도 발견했는데, 불을 놓은 누군가가 향초를 끄고 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설도 자연히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내내 안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했는지 밖에서 기별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한번 꼼지락 하지도 않고 있던 이설이 놀라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식사는 폐하께서 오시면 함께 들이겠습니다.”
태금궁을 오가며 눈에 익은 상궁이다. 우찬을 어렸을 때부터 모신 보모상궁이라고 들은 것 같다. 이설이 태금궁에 올 때면 사근사근하게 챙겨 줬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보고도 몸은 괜찮으시냐는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상궁은 공손하게 해야 할 말만 전한 뒤 협탁에 찻주전자와 잔을 놓았다. 무심결에 아까 우찬이 엉망으로 만든 벽을 보니 파편들은 깔끔히 치워져 있고 깨진 벽만 남아 있었다.
“한 가지 물을 게 있습니다.”
잠에서 막 깬 목소리로 이설이 입을 열었다. 상궁은 창문을 차례로 닫는 중이었는데 듣지 못하였는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하였습니다.”
이설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상궁을 불렀다. 굳이 일전의 제 권세를 자랑하려는 건 아니지만 예전 같았으면 이설이 숨만 한 번 크게 들이마셔도 다가와 어디 불편하신 게 있냐 물었을 만큼 눈치 빠른 상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부른 걸 들었을 게 분명한 데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창문을 닫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기가 생긴 이설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침상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건지 걷는 게 무척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까 우찬이 침상 곁을 왔다 갔다 할 때 다리 한쪽을 불편하게 움직이던 것이 생각났다.
“내 말 들리지 않습니까?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마지막 남은 창문을 닫는 상궁의 뒤에 섰다. 절대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상궁은 이설이 부르는 말에는 일언반구 대답도 없이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뒤 기척 없는 걸음으로 침소를 나갔다. 창문 앞에 이설만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덧없이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