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8화
“그때는 이런 표정 짓지 못할 거야. 고통이 뭔지, 치욕이 뭔지 내가 다 알려줄 테니까 그때까지……, 악! 이런 젠장, 이 개자식이!”
제법 잘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나무 그릇 아래가 사내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때려 맞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소리를 지르고 그릇 안에 음식물들이 사내 얼굴로 쏟아졌다. 식은 국과 쌀알이 얼굴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온 힘을 쥐어짜 내어 사내에게 밥그릇을 휘두른 이설은 그대로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엎어졌다. 사내가 노발대발을 하며 옆구리를 걷어찼는데 이상하게 크게 아프지가 않았다. 향냄새 때문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사내가 멱살을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뺨을 때렸다. 옆구리보다는 조금 아팠지만 비명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얻어맞는 건 아직 무서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려는데 밖에서 보초를 서던 사내가 부리나케 달려 들어왔다.
“형님 안 됩니다! 아직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이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시건방진 새끼. 우리가 제까짓 거 하나 못 죽여서 가만히 있는 줄 아나 본데, 이 일만 끝나면 진짜 확!”
“그만하시고 얼른 올라가 보십시오. 밖이 좀 어수선합니다.”
“금방 다시 내려올 테니까 저 새끼 벽에 묶어 놔.”
“벽에요? 막골 댁이 그럼 몸 상한다고 아주 지랄도 그런,”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땅을 걷어찼다. 지푸라기가 날려 이설의 몸을 덮었다. 이설은 또 발길질이 날아 올까 봐 몸을 옹송그렸다. 다행히 사내는 씩씩거리며 노려보기만 할 뿐 곧 철장 밖으로 나갔다.
이만 완전히 사라질 줄 알았던 사내가 다시 몸을 돌려 되돌아왔다. 이설은 사내에게 또 발길질이라도 당한다면 이번에는 비녀를 뽑아 발등을 콱 찔러 버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사내는 철장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밖에서 킁킁 냄새를 맡아보다가 구석에 향초를 발견했다.
“저거 서너 개 더 피워 놔.”
“그렇게나 많이요? 정신 못 차릴 텐데…….”
이설을 일으켜 세우던 보초가 옆을 힐끗 보고 말을 흘렸다. 괜히 문제가 생겼다가 자기가 다 뒤집어쓸까 봐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정신 못 차리게 하려고 피우는 거잖아! 곱게는 못 보내지, 곱게는.”
“…….”
“다들 금황제 목을 따든 말든 알아서들 하라 그래. 난 이 새끼부터 따야 직성이 풀릴 것 같으니까.”
“위에서 결국 금황제도 죽이기로 했답니까?”
“별수 있어? 그 계집년은 소식도 없고 여기서 하염없이 사병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눈에 보일 때 처리해야지.”
“막골 댁은 말로는 사나흘 내로,”
“아무튼 그건 내 알 바 아니니까 시키는 일이나 잘해 놔!”
겨우 분을 삭인 목소리가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곧 멀어진다. 반쯤 풀린 눈을 힘겹게 깜빡이며 사내의 뒷모습을 봤다. 우찬에게 해코지를 하러 가는 길이 아닌가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보초는 이설의 뒤에서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몸을 옮겼다. 뒤로 질질 끌리는 몸이 자꾸만 아래로 쳐졌다. 사내를 험담하는 보초의 목소리가 귓가를 아른아른했다.
돌벽에 등이 닿고서야 보초가 어떻게 제 몸을 묶어 놓으려는지 깨달았다. 정신을 차리고 소란을 피웠을 때 몇 대 얻어맞은 뒤 몸이 한동안 이렇게 묶여 있었다. 나이든 여인이 와서 저리 두면 몸 상한다고 신경질을 내기 전까지는.
“제대로 쥐어 터졌네. 막골 댁이 보면 또 나한테 한 소리 하는 거 아냐?”
보초가 이설의 터진 입가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따끔거리기는 하는데 아프지 않아서 이상하고 그게 점점 무서웠다. 정말 몸이 어딘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가까이서 보니 곱상하니, 천하의 금황제가 왜 옆에 끼고 사는지 알 만도 하네. 씻겨 놓으면 봐 줄 만하겠어.”
“……놔.”
“근데 성질이 이렇게 더러워서야 황제 애첩 노릇은 잘하려나 몰라. 밤에는 또 나름 고분고분 한가 보지? ……아, 고개 좀 그만 흔들어!”
자꾸만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피하느라 고개를 흔들었다. 보초가 버럭 성질을 내며 뺨을 가볍게 후려쳤다. 경쾌한 마찰음이 자기 뺨이 맞아 생기는 소리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팔이 만세 하듯 위로 올려졌다. 손목에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닿았다.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많이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몸이 불편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고통스러웠다. 대체 이곳에 얼마나 더 붙잡혀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보초가 밖과 안을 들락날락하며 한쪽 구석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사내가 명령했던 대로 향초를 더 피우는 모양이었다. 이제 막 불을 붙였을 뿐인데 아까는 거의 느끼지도 못했던 냄새가 지금은 온갖 악취를 압도하고 진동했다.
“아이씨, 이 정도 냄새면 나도 피해 있어야 하는데.”
“…….”
“얌전히 있어!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하겠지만.”
처음 내려올 때 가져왔던 술병과 등불을 챙겨서 보초가 자리를 비웠다. 등불은 하나 남기고 갔지만 불이 밝지 않아 어둠을 몰아내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설은 거의 눈이 반쯤 감겨 있었기 때문에 밝든 어둡든 상관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에 감각이 점차 사라진다. 어깨 통증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숨을 아무리 크게 들이마셨다 뱉어도 악취도, 향냄새도 나지 않고 먹먹한 귀는 이명만 공허하게 울렸다. 마치 온몸의 감각이 전부 마비된 것처럼 느껴졌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감까지 모두 다 자신에게는 없는 감각 같다.
정신이 자꾸만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 아니면 위나 아래로 쑥 뽑혀 나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간이 꽤 오래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는 목이 무척 말랐는데 지금은 그냥 몸만 무거웠다. 밖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그 생각은 사라졌다. 이따금 비명 소리가 들린 것도 차츰 잊었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우찬의 얼굴을 기억해 내려 애썼다. 처음에는 속눈썹 한 올까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선명했는데 점점 흐릿해졌다. 검은 장막이 겹겹이 쌓이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은 그렇게 서서히 암전됐다.
*
햇살이 보드라운 아침이었다. 뺨을 데운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께까지 덮고 있는 두터운 포단이 덥게 느껴질 정도였다. 포단을 아래께로 좀 더 내려 몸을 돌려 눕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귀에 익은 새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쉬지 않고 들렸다. 창가에 앉기라도 했나 싶었다. 새소리를 듣는 것은 좋지만 가까이서 새를 보는 건 무섭기 때문에 침소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연화를 불러야 했다. 궁녀들 중 연화만 새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 착각이다. 이제 와 정신이 좀 온전해지며 생각난 거지만 아까 보초가 한 번에 여러 개를 피웠던 향초는 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초였다.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도 모자라 머리를 완전히 바보로 만든 게 틀림없다. 아닌 줄 알면서도 자꾸만 궁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비 증상은 이제 거의 다 사라지셨을 겁니다.”
인기척이 좀 부산스럽다 싶더니 말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사내의 목소리인데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저, 정신을 아직 못 차리시는 건 중독 때문이 아니라 아마 그, 그동안 몸이 많이 약해지셨던 탓이 아닌가 싶습니다.”
별안간 겁이라도 먹었는지 말을 더듬는 것을 듣자마자 알았다. 이 목소리는 황궁의 태의다. 훌륭한 실력에 반해 우찬을 어찌나 무서워하는지, 우찬이 눈을 부라릴 때마다 말을 더듬는 소인배였다. 그래도 이설은 주 상궁의 부탁으로 가끔씩 들려 진찰을 봐 주던 태의가 항상 고마웠다.
“그럼 이따 저녁때 다시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는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그제야 이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햇살은 여전하고 새소리는 귀에 선명했다. 몸을 덮은 포단은 포근하고 머리를 놓은 베개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악취를 풍기는 게 아닐까 싶던 꿉꿉한 몸은 요 며칠 중 가장 상쾌하고 개운했다.
얼마 전 같았으면 평범한 날의 아침이라고 생각했을 모든 것들이 갑자기 다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뭔가 완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한 것은 포단 안으로 들어온 낯선 체온이었다. 누군가 포단 안으로 손을 넣어 이설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이설이 있는 힘껏 손을 뿌리치고 몸을 옆으로 피했다.
“읏!”
몸이 움직인 순간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생경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언뜻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놀라 곧바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잘못 본 게 틀림없다고, 환각초에 정신이 헤까닥 돌이 버린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볼을 몇 번 꼬집고 나면 분명 꿈에서 깨어날 테고 다시 눈을 뜨면 젖은 볏짚이 깔린 지하에 아직 붙잡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 어딜 가려고?”
설령 다시 그곳이 아니더라도 여기만큼은,
“이제 아무 데도 못 가.”
절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연이설.”
뿌리친 손을 다시 잡아채는 힘이 무척 우악스러웠다. 포단 아래로 조심스레 손을 밀어 넣던 방금 전과는 너무 달라서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태금궁 황제의 침소. 우찬이 아닌 다른 이가 있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떨어질 낭떠러지도 없는데,”
우찬이 붙잡은 손목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침상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올라앉았다. 햇살이 가려지며 이설의 얼굴 위로 어둡게 그림자가 생겼다.
“어떻게 날 협박할지 궁금하네.”
피식 웃고 마는 웃음이 정말 즐거운 듯 입이 귀에 걸쳐졌다. 차라리 이 순간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면 덜 무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휘어진 눈매로 진심을 다해 웃고 있는 우찬을 보니 숨도 똑바로 쉬지 못할 만큼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오지 못할 손목이 어느 순간 아래로 툭 떨어졌다. 웃음기를 한 번에 지운 우찬이 이설의 몸을 당겨 베개에 똑바로 눕힌 뒤 포단을 다시 덮어 주었다. 이설은 그때까지도 입 한번 뻥끗하지 못하고 우찬이 마음대로 제 몸을 휘두르는 대로 있었다.
“마비 증세는 거의 사라졌다는데 목소리는 아직인가?”
“…….”
“그렇게 끔찍하게 도망치고 싶어 하던 궁으로 돌아온 소감 좀 들어 보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