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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27)화 (227/300)

달의 황홀경

227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하룻밤 이상인 것은 확실하나 그보다 며칠이 더 지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사면은 돌로 벽을 쌓아 한 줄기 빛조차 새어 들어올 틈이 없었고 볏짚을 깐 바닥은 어디선가 자꾸 물이 흘러들어와 축축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앉아 있는데 볏짚 더미가 움직이며 쥐 울음소리가 났다. 엉금엉금 기어 구석으로 가 벽 모서리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세워 앉았다. 벽의 한기가 몸에 스며들자 어깨에 통증이 느껴졌다.

“왜 저래?”

나무 그릇에 숟가락을 꽂아 가지고 내려온 나이 든 여인이 철창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가 뒤를 흘끔 돌아보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글쎄요.”

“더는 소란 피우지는 않고?”

“이제는 조용합니다요. 향은 더 피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기운 차리면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놔둬 봐.”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 안에서 난동을 부렸다. 철창을 흔들고 소리를 지르는 통에 사내들이 몰려와 얻어맞기도 몇 대 맞았다. 아직도 옆구리, 허벅지가 멍이 들어 욱신거렸다. 통증이 가장 심한 건 화살이 관통했던 어깨였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치료를 마친 상태였는데 얼마나 대충 치료를 해 놓았는지는 어깨의 불편함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친 몸을 엎어뜨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이설과 보초 한 명만 남겨 두고 사내들은 떠났다. 떠나기 전 벽 구석에 향초 하나를 놓고 갔는데 아무래도 저 향냄새 때문에 자꾸만 몸에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손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에 부쳤다. 덕분에 통증도 점차 사라지는 것 같다. 몸을 마비시키는 향초인 것 같은데 오래 맡으면 몸에 안 좋을 것이다.

여인이 철창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요란한 소리에 쥐들이 놀랐는지 귀 따갑게 울어 대다가 볏짚 아래에서 나와 철창 밖으로 도망쳤다. 보초를 서던 사내가 욕지거리를 하며 쥐들을 쫓아가 발로 걷어찼다.

“와서 밥 가져가.”

여인이 괄괄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설은 팔에 얼굴을 묻고 못 들은 척했다. 옷에서 구정물 냄새가 났다.

“귀먹었어? 와서 밥 가져가라니까.”

“…….”

“이보세요, 마마. 쇤네가 안에 들어가 식사 수발이라도 들어드려야 한 입 하시겠사옵니까?”

여인이 비꼬는 말에 사내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이설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생각 없습니다.”

“이 와중에 품위 있다 품위 있어.”

사내가 빈정거리며 제 몫으로 가져왔던 밥그릇을 손에 들고 우악스럽게 한 숟가락 퍼 올려 먹었다. 악취 사이로 고깃국 냄새가 옅게 흘러들었지만 먹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설을 한껏 비웃은 여인이 철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왔다. 이설 앞에 국과 밥이 한데 섞여 담긴 나무 그릇을 던지듯 내려놓고 발로 이설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처먹으라고 준 건 처먹어. 고집 피우다 댁이 죽기라도 하면 아직은 곤란해,”

“어차피 죽이려고 데려온 것 아닙니까?”

이설이 고개를 뒤로 젖혀 여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기운 빠진 목소리에 사나운 기색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여인이 코웃음을 치며 이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죽이기는 아깝지. 아직 쓸모가 있는데.”

“폐하께 누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죽는 것 자체가 황제 놈에게는 누가 되는 거잖아?”

낄낄 웃는 여인의 웃음소리가 쥐 울음소리와 겹쳐 들렸다. 녹슨 쇠붙이를 서로 긁어 대는 것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음으로 울렸다.

우찬과 이 자들 모두 똑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기연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설은 왼쪽 발목에 황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여 주면 이 자들이 자신을 놓아줄지 생각해 봤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이면 죽였지 놓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을 것이다.

되려 연국에 협박질을 할지도 모른다. 이설을 팔아 연국에 얻어내려는 이익이 잠깐만 생각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어때? 폐 끼치고 싶지 않거든 목숨 부지는 알아서 잘해야겠지?”

여인이 밥그릇을 툭툭 치며 말했다. 국과 밥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게 암만 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것 같았다. 헛구역질이 절로 나는 쓰레기에서 시선을 옮겼다. 정신을 차린 날부터 물 말고는 먹은 게 아무것도 없는 데도 허기가 지지 않았다.

“먹을 건 됐으니 물이나 주십시오.”

“이거 다 먹기 전에는 이제 물도 금지야. 그나저나 어쩜 이렇게 태평하지?”

“…….”

“살려 달라, 꺼내 달라, 원하는 게 뭐냐 울고불고 매달릴 때도 됐잖아. 나 참, 뭐 하나 물어보지를 않네. 왕족의 품위, 뭐 이런 거야?”

“…….”

“뭐 됐어. 물 없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보자고.”

밖으로 나간 여인이 보란 듯이 철창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걸쇠 채워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잘 채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당겨 흔드는 바람에 철창 전체가 뜯겨 나갈 듯 요란하게 소리를 냈다. 그래도 철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저거 다 먹을 때까지는 물 한 모금도 주지 마.”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어쩝니까요?”

“물 없어도 나흘은 살아. 그전에는 일이 마무리될 테니 죽지는 않겠지.”

“밖에 분위기가 안 좋던데 거래는 약조한 대로 되는 게 맞습니까?”

“나라고 아는 게 있어? 사병을 보내 준다 했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 개송이 고것 말만 믿었다가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몰라.”

“그 계집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랍니까?”

“정체가 발각됐으면 죽기밖에 더하겠어? 그쪽 일은 신경 끄고 저놈이나 잘 감시해. 저 화근, 얼른 데려가 줬으면 좋겠네.”

여인이 짜증스럽게 이설을 노려본 뒤 사내가 주는 빈 그릇을 받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발걸음 소리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처럼 사라졌다. 돌 틈새로 빛이 지나치게 안 보인다 싶더라니, 지하에 갇혀 있는 모양이었다.

힐끗 밥그릇을 다시 봤지만 역시나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목이 마르다고 이깟 쓰레기를 입에 넣을 수는 없었다. 입이 말라 더는 나오지도 않는 침을 삼키며 한참 고민하다 결국 철장 가까이 몸을 움직였다. 몸에 힘이 빠져 걷지는 못하고 한 팔을 땅에 바쳐 몸을 질질 끌자 밖에 보초가 측은한 듯 쳐다봤다.

“물 한 잔만 주시오.”

“아까 말 못 들었어? 밥 먹기 전에는 물 주지 말라잖아.”

“딱 한 모금이면 됩니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꺼져!”

철창을 쾅 내리친 사내가 험악한 얼굴을 구겨 화를 했다. 놀랄 힘도 없어서 이설은 있던 자리에 몸을 웅크려 앉았다.

절벽 앞에서 우찬을 만났던 그날 밤, 어깨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우찬의 가죽신이었다. 쓰러진 자신을 누군가가 말에 걸쳐 올린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점점 멀어지는 우찬의 팔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가고 그 찰나에 숲 안에서 흑영과 엇비슷하게 생긴 사내가 튀어나왔다.

우찬은 무사할까. 화살을 정통으로 맞은 건 아니었지만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에 남겨졌던 것은 분명했다. 흑영이 있었으니 목숨만은 부지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쯤 금군의 군영에서 안전하셔야 할 텐데.

그날 밤을 기억하려고 애쓰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다. 몸에 기운도 자꾸 빠지고, 머릿속은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하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저기 구석에 향초 때문인 건 확실했다. 미약한 향에 이 정도 증상을 보일 정도면 보통 독초를 태우는 것은 아니겠거니 싶었다.

잠깐 선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갑자기 멀리서부터 들리는 발소리와 욕지거리에 눈이 스르르 떠졌다. 흐릿한 시야에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철창 너머 서 있는 게 보였다.

“어이, 잘 있었어?”

아는 척 인사를 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묘하게 낯익었다. 눈을 비벼 다시 위를 올려다본 이설이 순간 미간을 좁혔다.

“나 기억하지? 덕분에 나 그날 아주 좆될 뻔했잖아.”

“…….”

“그렇게 찾아도 그림자도 안 비추더니, 언제 여기까지 도망쳐 왔어? 어차피 잡힐 거였으면 그때 나한테 순순히 잡혔으면 좋잖아. 이런 고생 안 해도 되고 말이야.”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도국 빈민촌에서 만났던 사내다. 이설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정체를 바로 알아냈던 사내. 이자 때문에 도국에서부터 일이 꼬여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자만 아니었어도 그날 이름을 지우고, 며칠 뒤 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일이 잘못된 건 전부 다 이자 때문이다.

“그렇게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바닥에 볏짚을 한 움큼 집어 밖으로 던졌다. 힘없이 날아간 지푸라기는 사내 얼굴은 근처도 못 가고 허공에 흩날렸다. 사내가 걸걸한 소리로 크게 비웃으며 철창 안으로 들어왔다.

“도망 다니는 게 힘들기는 했나 봐? 얼굴 많이 상했어. 이래 가지고는 황궁에 돌아가도 애첩 대접이나 받을 수 있겠어?”

“집어치워.”

“성질도 좀 세졌고.”

사내가 앞에 쪼그려 앉아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있는 힘껏 손을 쳐 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대신 사내는 기분은 좀 상했는지 언짢은 얼굴로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

“이렇게 버릇없이 굴면 쓰나. 가뜩이나 쓸모도 없어질 것 같아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치 아프던 차에 이런 식이면 죽여도 곱게는 못 죽이지.”

“죽일 거, 면 그냥 지금 죽여.”

“곱게는 못 죽인다니까?”

사내가 머리채를 잡은 채로 옆으로 밀어냈다. 볏짚 위를 뒹군 이설의 몸에 젖은 지푸라기가 붙었다. 주섬주섬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이설의 눈에 밥그릇이 보였다. 사내가 엎어진 이설의 앞으로 와서 다시 쪼그려 앉았다. 살이 홀쭉해진 턱과 볼을 한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잡아 자신과 눈이 마주치게 당겼다. 목이 뒤로 꺾여 불편해진 자세로 이설이 더듬더듬 밥그릇을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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