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5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 아래로 몸이 서서히 침잠한다. 깊이 더 깊이 가라앉는 몸은 천만 근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살을 에는 시린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체온은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만 진다. 몸 안에서 증폭되는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내장을 야금야금 불태운다.
끔찍한 고통 속을 하염없이 헤맨 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다. 어느 순간 수면 밖에서 새하얀 손이 첨벙 물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손목을 쥐어 잡은 손은 너무 작고 연약했지만 남다른 힘으로 몸을 위로 끌어당겼다. 너무 차갑지도, 너무 뜨겁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로 물드는 손목의 열감에 고통이 반감됐다.
깊은 수렁 아래에서 건져지는 데에 또 셀 수 없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끔찍한 고통이 잦아들어 가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폐하!”
완벽한 기시감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밖에 아무도 없느냐! 태의를,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과거 어느 날이 다시 반복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똑같은 장면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통증의 부위가 달랐다. 그때는 왼쪽 어깨 지금은 오른쪽 허벅지다. 통증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차란이 계속해서 밖을 향해 소리쳤다. 고개를 고정하고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반복되는 하루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정교한 음각이 새겨진 기둥과 화려한 비단 휘장 대신 천막으로 둘러친 벽이 보인다. 여긴 태금궁의 침소가 아니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당장 태의를 데려,”
“연,이설은.”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폐하.”
“연이설은 어디에 있지?”
몸 위에 덮여 있던 거추장스러운 포단을 휙 들춰내는 동시에 상체를 세웠다. 어깨와 허리가 약간 뻐근했고 바닥에 양 발을 내딛은 순간 오른쪽 허벅다리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목소리는 저음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온몸으로 달려들며 앞을 막아서는 차란을 단숨에 밀쳤다. 묻는 말에는 대답도 않고 안정을 취하셔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소란을 듣고 밖에서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폐하! 아직 체내에 독이 남아 회복 중에 있으신데 벌써부터 움직이시면 아니 되옵니다!”
태의가 숨이 넘어갈 듯 놀라며 두 팔로 우찬을 만류했다. 팔을 밀치자 늙어 꼬부라진 몸이 옆으로 휙 넘어가 쓰러질 뻔한 것을 옆에 서 있던 병사가 부축해 주었다.
“연이설.”
아직 깊이 잠긴 목소리가 마치 짐승의 포효처럼 내리깔렸다. 간격이 짧은 거친 숨소리에 맞춰 흰 천을 감은 가슴팍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맨살이 드러난 상체 여기저기에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왼팔 팔뚝에 고약이 쓸려 내려가며 긴 상처가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연이설은 어디에 있느냐.”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천막 내의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우찬이 점잖게 묻는 것도 여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말아 쥔 주먹 안으로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장내의 고요함을 깨뜨린 건 이제 막 천막 안을 들어온 흑영이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어 폐하 한 분만 모셔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마를 납치한 놈들을 쫓기에는 폐하께서 독시에 맞으시고 위급하다 판단되어……, 송구하오나 제 판단에 실수는 없었,”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천막 안에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얼굴로 몸을 경직했다. 파열음과 낮은 신음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나고 곧바로 쌓아둔 빈 술병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우찬은 감정이 앞서 손이 먼저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벗들은 제 나름대로 소중히 대했다. 그 오만방자한 차란에게도 직접적으로 손찌검을 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나마도 제 화에 못 이겨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차란이 이 정도였으니 소운과 흑영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흑영이 먼저 대련 상대가 되어 달라 청을 해도 열에 아홉은 거절했다. 명색의 황제가 호위군 수장에게 검술로 밀리는 추태를 보여서야 되겠냐며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만 다들 대놓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되도 않는 이유였다. 검술 훈련 중 불이 붙은 우찬 자신이 흑영을 다치게 할까 염려되어 대련을 꺼린다는 걸, 호위군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찬은 자기 손으로 뽑은 호위군 한 명 한 명을 깨나 아꼈지만 흑영에 비할 바는 안 됐다.
그 정도로 아끼는 벗이자 심복의 턱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후려친 것이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화살이 스쳐 지나가며 상처가 생겼고 독을 빼기 위해 처치를 해 놓은 상태라 팔 전체가 뻐근한 마비 증상이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평소보다 몇 배는 약한 힘으로 빗겨 맞은 덕에 흑영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연이설이 그 새끼들에게 끌려가는 걸 뻔히 보고도 내버려 뒀다는 얘기잖아.”
“저는 폐하 존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호위 무사입니다.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는 폐하를 가장 먼저 구할 것입니다.”
“폐하 일단 진정하십시오!”
엎드려 빌어도 모자를 판에 곧 죽어도 자기가 하는 게 바른 말인 줄로만 아는 흑영의 앞으로 우찬이 다시 주먹을 들었다. 딱 알맞은 찰나에 그 사이를 끼어든 차란이 감히 옥체에 손을 대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우찬을 말렸다.
“제발 고정하시고 자리에 앉아 보십시오! 화살에 스쳐 다행이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치를 뻔하셨습니다. 작은 상처에 비해 큰 부상이니 부디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으시면 마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란이 우찬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돌려 눈짓했다. 바들바들 떨던 태의가 탁자에 탕약 한 사발을 두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재차 눈짓하자 이번에는 흑영을 제외한 전원이 밖으로 나갔다.
차란은 흑영도 밖으로 보낼 작정이었는지 우찬을 붙잡은 채로 계속 눈짓, 턱짓을 했지만 흑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아직 못다 한 말이 있는지 기어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판단을 후회하지는 않습,”
“입 좀 다물어 제발!”
몸을 돌려세운 차란이 끝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동시에 우찬이 차란의 몸을 앞으로 밀었다. 차란과 흑영이 부딪히며 비틀거리는 사이 우찬은 한쪽에 쌓아 두었던 술병 하나를 들고 간이로 만든 침상 끝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젖혀 들이붓는 술이 반은 얼굴을 쓸고 내려가고 반은 입술을 타고 입안으로 흘렀다. 미지근한 술의 온도가 정신을 번쩍 깨우는 데에는 별 쓸모가 없었다. 입안으로 스며들지 못한 술이 턱을 타고 흘러 상체를 적셨다.
“하지만 놈들보다 먼저 두 분을 찾지 못한 것은 제 불찰입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차란을 밀어내고 앞으로 한 발짝 성큼 가까이 온 흑영이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찬이 아랫입술을 이로 짓이기며 말의 꼬투리를 잡았다.
“달게 받아?”
얼굴 위로 술을 다 쏟아 버린 뒤 빈 병을 아무 데나 던졌다. 일렬로 진열해 두었던 검과 창들이 옆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눈앞에서 연이설을 놓치고 한다는 소리가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다고?”
웃음이 나오는 이 현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가 않았다. 손짓하자 머뭇거리던 차란이 결국 술병 하나를 더 가져와 건넸다. 이번에는 술병의 주둥이를 입술에 똑바로 갖다 대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혀를 지나 곧바로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가는 독주가 맹물 같았다.
이설과 손끝이 스쳤다. 꿈에서 침잠하던 수렁에서 손을 잡아 준 건 환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밤, 손끝이 닿았던 것은 분명 현실의 연이설이었다. 보드랍고 말랑했던 그 감촉은 절대 잊을 수가 없다.
보름달 아래. 시커멓게 칠해진 절벽을 뒤에 두고 이설과 대치했던 지난밤의 기억이 이상할 정도로 흐릿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차란을 기이한 눈으로 올려다본 우찬이 물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이나 지난 거지?”
이설을 만났던 날 소운을 황궁으로 돌려보냈다. 소운이 돌아온 것을 본 뒤 차란이 궁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략적으로 시간이 나흘에서 닷새는 지났을 것으로 계산된다.
“사흘입니다. 폐하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궁을 나왔습니다. 태감, 아니 저……, 단 상국은 무사히 궁에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궁에는 폐하 소식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우 미인의 매가 신에게만 은밀히 서찰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제가 우 미인에게 부탁드렸습니다. 금군이 사용하는 전서구보다 빠르고 안전합니다.”
턱이 삐뚤어졌는지 흑영의 발음이 약간 어눌해진 것 같았다.
“사흘? 연이설이 납치 된 지 벌써 사흘이나 지났다 이 말이냐.”
“예.”
목 아래에서 쓰게 올라오는 덩어리가 멍울진 느낌이었다. 화를 낼 대상이 없다. 그렇다고 삼켜 없앨 수도 없었다. 열꽃처럼 피어나는 분노가 몸 안에 고스란히 녹아 핏줄을 타고 흘렀다.
끓어오르던 감정은 금세 가라앉고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서서히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했다.
그날 밤 소운과 흑영이 떠나고 오래 지나지 않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곧이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병사가 이설의 흔적을 찾은 것 같은데 그 뒤를 쫓는 무리의 흔적이 보인다고 전했다. 그 뒤로는 기억이 드문드문 조각났다. 산등성이 위쪽이라는 말까지만 듣고 한참 동안 말을 달린 것과 이민족의 군영을 맞닥뜨린 것이 기억난다.
수적으로 지나치게 열세였던 우찬과 호위군을 도와 우 미인이 부족민을 끌고 나타났다. 길을 터준 우 미인 덕에 전장을 빠져나왔지만 이미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뒤였다. 우 미인은 저기 위쪽의 병사들이 이설을 봤다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숲을 오랫동안 헤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산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전투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중 어딘가에 이설이 있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하여 쉴 틈이 없었다. 팔이 잘리고 목이 꺾이며 피와 살이 뒤섞인 전장에 오도카니 서 있을 이설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다.
‘……설아.’
정신없이 헤맨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먼 곳의 불빛을 따라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점점 밝아지는 불빛이 눈에 익다고 생각한 순간에 그것은 단순히 불빛이 아니었다. 날숨과 함께 뱉어지는 이름이 이제야 자기 주인을 만났다.
본능적으로 던진 단도가 이설을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 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이 없었다. 은은하게 빛을 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 우찬은 보다 확실한 것을 원했다. 뻣뻣하게 돌아간 고개가 우찬을 향한 순간 휘몰아친 감정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었다.
안도한 동시에 애가 닳았고, 애틋함과 배신감이 뒤섞여 타올랐다. 뛰어가면 충분히 붙잡을 수 있는 거리를 홀린 듯 천천히 걸어간 것은 달리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다. 혹시 헛것을 보고 있다면 조금 더 오래 붙잡아 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목소리를 잊었는지 물었고, 너의 금우찬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쯤 이설이 그저 환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설은 경직된 몸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도망갈 길을 물색하고 있었다. 혹여 주변이 어두워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닌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설은 다시 달아났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 멀어지는 이설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시체의 목에서 빼낸 단도를 손에 꽉 움켜쥐었다. 굳이 다리가 아니더라도, 제대로 맞지 않더라도, 이설은 더는 도망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진 이설을 둘러업고 궁으로 돌아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