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3화
“얼른.”
소매가 파르르 떨리는 손이 손짓한다.
“황궁으로 돌아가자.”
땅에 박혀 있던 우찬의 두 다리가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걸음이 천천히 이설에게 다가왔다. 이설은 그걸 알면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떨궜다.
“네가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온 것인데 어딜 보느냐? 이 옷도, 머리도 모두 네가 마음에 들어 하던 것이었는데. 날 보고 얼굴도 붉히지 않았느냐 설아.”
“…….”
“차란이 화살 과녁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황제가 어딨냐며 노발대발을 했다. 그래도 네가 좋아하면 그걸로 됐어. ……생각해 보니 피가 많이 묻어 안아 줄 수는 없겠구나.”
다시 드리워진 달빛에 우찬의 얼굴 반쪽이 밝게 드러났다. 힘없이 웃는 얼굴에 아까는 몰랐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옷 여기저기에 묻은 붉은 얼룩이, 이설을 찾아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를 보여 줬다.
내내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 우찬을 노리는 적군이 파다한 곳에 저렇게 눈에 띄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밤에 달빛만 받아도 선명히 구분되는 옷이 대낮의 햇빛 아래에서는 어떨지 눈에 선했다.
이설은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셨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우찬이 말한 그대로였다. 옷도, 머리도 그리고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수려한 얼굴과 다정한 목소리까지. 모두 이설을 얼굴 붉히게 했던 그대로였다.
“돌아가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마. 최금서에 서책도 이제 다 네 것이다. 서고까지 너무 멀거든 비은궁에 서고를 하나 더 지으면 되겠다. 이참에 궁을 개축하는 것도 좋고. 뭐든 다 하게 해 줄 테니 너는 그저 내 눈이 닿는 곳에 있기만 하여라.”
피칠갑을 하고서도 저렇게 아름답고 애절할 수가 있는지. 이설은 저 붉은 선혈 중 우찬의 것은 없는지 걱정이 되어 애가 탔다. 미약하게 절뚝거리는 오른 다리가 성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우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설에게 조금씩 가까워져 왔다.
“너는 그렇게 내 황후이자 정인으로 내 옆에서 평생을 있으면 된다. 그것 말고는 네게 어떤 책임,”
“싫습니다.”
꿈에서나 들을 법한 목소리에 마음만 하염없이 녹아내리던 이설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폐하께서는 이미 제가 아닌 다른 정인이 있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 자리를 어떻게 다시…….”
결국 참지 못하고 터지는 울먹거리는 소리로 이설이 끝내 말끝을 흐렸다. 우찬은 절뚝이던 걸음을 멈추고 잠시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이설이 귀비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걸 바라기에는 지나치게 공개적인 선포였다.
기연이 확언했던 대로 우찬은 정말 자신을 황후로 책봉할 마음이 있는 듯했다. 더불어 정인이라는 칭호마저 복권해 준다니, 다른 이름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감읍해 마지않았을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귀비는 내게 아무 사람도 아니야.”
오랫동안 침묵하던 우찬이 아까와 달리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내 정인이라는 이유로 네가 목숨을 위협받았어.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도구가 필요했을 뿐이야. 귀비가 가진 내 이름은 가짜다.”
우찬이 귀비의 정체를 알았다니 다행이지만 기분이 나아질 리가 없다. 우찬의 이름을 억지로 새긴 귀비나 우찬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나 다를 게 없다. 귀비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목적이라도 있었지, 자신은 그마저의 명분도 없다.
떠나 있는 동안 우찬은 생각이 바뀌기라도 했는지 마치 이설을 진짜 정인으로 여기는 것처럼 말했다. 의심이 들 무렵 우찬이 명료하게 말했다.
“내 정인은 오로지 연이설 너뿐이다. 이 이름은 네 것이야.”
마음 한편으로는 궁금하지만 차마 물을 수 없는 질문의 대답이었다. 죄책감이 없었던 시절, 이설은 이따금 우찬에게 이 같은 말을 듣기를 바랐다. 설령 제게는 우찬의 이름이 없을지라도 정인, 반려, 인연 그 어떤 단어로든 특별한 사람이라고 우찬에게 인정받기를 진정 원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찬에게 인정받은 지금. 이설은 이미 우찬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인연의 끈을 묶은 사람이었다.
“너와 처음 독대를 가졌던 날 내가 했던 말은 모두 틀렸어.”
아니, 틀린 건 지금의 우찬이다. 그날 서늘한 눈으로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은 채 읊조리던 우찬의 말 중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찬이 가진 이름은 제 것이 아니고 둘은 천명 따위로 맺어진 인연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난 건 그저 이설의 이름이 하필 ‘연이설’이었다는 우연, 그게 전부다.
“내 손목의 이름은 연이설 네 것이야. 네가 나에게 준 것이니 우리가 천명이 아닐 수가 없지. 그러니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어서 대답해, 연이설.”
말투는 잔잔한 것에 비해 위압적으로 내리누르는 분위기가 평소의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것과 같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우찬과 대답을 망설이는 이설이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곧 우찬이 짧게 헛웃음을 뱉는 소리와 함께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마에 아직 흐르던 피가 손에 닦여 나갔다.
“내가 평생을 이리 애원해도 너는 내 마음을 모를 테지.”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너를 은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냐?”
바람결에 흩어지는 말이 예고도 없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서 있던 이설은 목 뒤를 찌르르 울리는 낯선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전조 없이 찾아온 충격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은애하고 있다, 이설아.”
우찬이 확인 사살로 당겼다가 놓은 화살촉이 다시 가슴께를 파고들었다.
“너를 원하는 이 마음이 연심이 아닐 리가 없어.”
진짜 화살에 관통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의 통증이 심장을 꿰뚫었다. 깊은 밤, 달빛 아래 둘만의 시간 속에서 은애한다는 절절한 고백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지나온 과거의 어느 순간에 들었다면 설렘에 젖어 황홀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이보다 더 비통한 고백은 없었다.
관통당한 가슴이 찢기고 수 갈래로 갈려 너덜너덜해지는 고통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눈물로 나지 않는데 목이 메 차마 말조차 이을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우찬은 겉보기에 무척 덤덤하고 차분했다. 눈빛은 떨림 없이 평온하고 이설에게로 뻗은 손도 더는 떨리지 않았다. 입가에 잔잔하게 띈 미소까지 전부 우찬이 아닌 것처럼 낯설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찬과 사이가 틀어진 후에도 가끔 우찬이 자신에게 화사하게 웃어 주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때와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우찬이 제게 은애한다며, 연심을 가졌다고 고백한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은 이게 만약 진짜 꿈이라면 길몽일지 흉몽일지, 잠에서 깬 뒤 구분을 지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리 와. 네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자. 네가 꼭 해야 한다는 그 일은, 궁으로 돌아간 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해결해 줄 테니 일단 오늘은,”
“제가 폐하의 정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는 우찬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우찬은 다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제가 폐하의 정인이라서, 그래서 폐하께서는 저를 연모한다 생각하시는 겁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냐.”
잔잔한 미소가 순식간에 씻어 내려간 얼굴이 이설을 봤다. 찰나마다 변하는 표정이 꿈결과 현실 사이를 차례로 왔다 갔다 했다.
“폐하께서 제게 연심을 가지시는 것은 제가 폐하의 정인이기 때문에……, 폐하께서 그렇게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까짓 게 폐하의 은애를 받다니,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
“제 이름이 만약 연이설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폐하께서는 저를 은애하셨겠습니까? 폐하께서 제가 아닌 다른 연이설을 만나셨다 한들 은애하지 않으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네가 지금 나를 앞에 두고 헛소리를 하는구나.”
“폐하께서는 그저 천명을 따르기로 하신 겁니다. 그 마음을 연심으로 포장하여 저를 기만하지 마세요. 고작 그런 말 한마디에도 저는,”
“고작 그런 말 한마디?”
딱딱하게 굳어 가는 표정의 절정을 가져다준 결정적 한마디였다. 절절한 호소로 떨리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차갑다 못해 얼음장처럼 식은 두 눈동자가 이설을 살기로 노려봤다.
“내가 너를 은애한다는 그 말이 너에게는 고작이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안 돼? 내 연심이 너를 기만해?”
“저를 정인으로 인정하기 위해 은애하시기로 한 것 아닙니까? 정인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제가, 폐하께는 꼭 필요할 테니까요.”
“네가 궁을 오래 떠나 있더니 정녕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아무렴 어떻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허나 저는 아직 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까 기연이 그랬다. 몇 번이나 우찬을 피해 달아난 전적이 있는 이설의 환궁을 과연 우찬이 허락할지.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이설은 확신했다. 우찬이 연심이라는 말로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궁에 데려갈 작정이라면 훗날 이설이 제 발로 궁을 돌아간다 해도 문전박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의 주변에만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공기가 차가워졌다. 이설은 언젠가 만설지에서 느꼈던 극도의 한기를 온몸으로 마주했다.
우찬은 아직 대여섯 걸음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보는 시선만으로도 목덜미를 옥죄이는 듯했다. 옛날 같았으면 먼저 피했을 이설도 이대로 죽으면 죽겠다는 고집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금니를 꽉 다문 우찬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화를 참으려는 노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이설은 사실 우찬이 무작정 화를 낼 때보다 이럴 때가 더 무서워 견디기 어려웠다.
“너에게 청을 하는 것은 이게 마지막이다.”
우찬이 앞섬에 손을 넣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피가 군데군데 묻은 것만 빼면 평범한 종이였다. 하지만 이설은 펼쳐진 종이가 달빛에 비친 것을 보자마자 우찬이 무엇을 가져왔는지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