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2화
이명처럼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가 귓가를 부유했다. 아련한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되풀이됐다. 오른쪽 귀에서 왼쪽 귀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 귀로. 귀를 타고 온 소리가 머릿속을 시끄럽게 헤집어 놓는다.
우뚝 멈춰 서 있던 검은 인영이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가 불편한지 걷는 자세가 어딘가 엉성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물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지 철벅거리는 발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물길이 갈라지는 소리가 깊은 밤 스산하게 울렸다. 점점 다가오는 인영은 여전히 검은 형체만 뚜렷할 뿐 어둠에 가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물러났다. 상대가 다가온 만큼 이설이 멀어졌다. 첨벙거리는 물소리가 멈췄다.
“이설아.”
더 선명하고 또렷해진 목소리가 이설을 불렀다. 이설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동시에 앞으로 내달려 가고 싶었다.
“내가 갈 테니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화를 내는 것일까. 아니면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건조한 목소리는 꽉 막힌 목구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것처럼 무거웠다.
이설은 아주 천천히 한 발을 뒤로 내디뎠다. 조심스럽게 움직였지만 마른 나뭇가지를 잘못 밟아 부러뜨리는 바람에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발을 앞뒤로 두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상태에서 다시 몸이 얼어붙었다. 다시 ‘이설아’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내 목소리를 벌써 잊은 것이냐.”
재빨리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나무들 사이로 좁게 난 길의 입구를 발견했다. 허리를 숙이면 잔가지들은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은 수렁으로만 보이는 길의 안쪽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막 도망을 치려던 참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도망을 치려는데 고작 목소리에 발목을 붙잡혔다.
“너의 금우찬이다.”
“…….”
“네가 하도 늦어 데리어 왔다. 이제 같이……,”
이어지는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두 다리가 후들거려 속력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하늘을 빼곡하게 덮은 나무들은 달빛이 새어 들어올 작은 틈조차 주지 않아 눈을 감은 거나 뜬 거나 시야가 똑같았다. 시커먼 나무 기둥에 수도 없이 부딪히며 달렸다.
입 밖으로 토해지는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달리는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이미 이전에 한 번 죽을힘을 다해 달린 뒤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는 상태였다.
뒤를 쫓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어렴풋이 ‘연이설’ 하고 크게 부르는 목소리도 들은 것 같다. 이렇게 사방이 어두운데 제 뒤는 어찌 저렇게 잘 따라오는 건지, 정신없이 뛰는 와중에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좁다랗게 이어진 길의 끝이 보였다. 빽빽한 나무숲 사이를 지나면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도망칠 수 있다.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을 향해 안간힘을 다해 달렸다. 그리고 좁은 길을 벗어나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탁 트인 전경이 펼쳐졌다.
넓지 않은 공터. 그 너머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다.
“연이설!”
망연자실하여 터덜터덜 절벽 앞으로 다가가는 이설의 등 뒤로 누군가 소리쳤다. 이설은 힘없는 몸을 천천히 뒤로 돌렸다.
“위험해!”
“…….”
“거기 가만히 있어. 내가 갈 테니,”
“오지 마세요!”
앙칼진 목소리가 산 일대를 울렸다.
어두운 길을 벗어나 마침내 마주한 우찬이 눈앞에 서 있었다. 유독 달이 밝은 아래에서 우찬의 얼굴은 미묘한 표정까지 세세하게 보일만큼 환했다. 눈에 띄어 표적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반들거리는 금색 의복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화려했다.
단 하루도 잊어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눈을 뜨면 아른거리고, 눈을 감으면 선명한 그런 얼굴. 이제나저제나 볼 수 있을까 눈물로 밤을 지새우게 만드는 그 사람을 드디어 만나게 됐는데 정작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붙잡아 두는 것밖에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던 우찬이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설에게로 뻗은 손은 허공만 쓸쓸히 맴돌았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몸을 완전히 돌려세우며 쐐기를 박았다. 두세 걸음 뒤면 천 길 낭떠러지다. 우찬이 조금만 더 다가오면 차라리 절벽 아래 몸을 던지겠다는 심정으로 이설은 이를 악물었다.
“설아.”
아련하게 퍼지는 우찬의 목소리는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했다. 자신이 우찬에게 이런 목소리로 이름이 불릴 자격이 있는지, 죄책감이 들었다.
우찬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빠지고 수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을 보는 것처럼 수려하고 여태 만났던 다른 사내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위압적인 기품이 있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서는 그토록 화려하고 눈부신 사람이었는데 달빛 아래에서 보니 은근하게 빛나는 풍채에 숨이 턱 막혔다.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그때, 사냥대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날. 습격을 당하기 바로 직전 우찬이 저더러 요사스럽다고 했었던가. 이설은 속으로 그때 우찬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정말 요사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폐하 당신이라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럼 네가 이쪽으로 와.”
자꾸만 다정하게 말을 거는 우찬 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두 팔을 벌려 손짓을 하는 게 꼭 어서 자기 품에 안기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비참했다. 궁을 떠나기 전 우찬이 제게 보였던 태도를 돌이켜 보면 더욱 그랬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탓하지 않을 테니 어서 이리 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거기 그대로, ……그대로 있으세요. 조금만 더 가까이 오시면,”
“멈춰!”
우찬이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찔끔찔끔 뒤로 물러나던 발이 멈췄다. 고개를 뒤로 돌려 내려다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절벽 아래가 집어삼킬 듯 가까워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공포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우찬이 더 다가온다고 해도 이 아래로 몸을 던질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우찬은 두 발은 땅에 딱 붙인 채였지만 언제라도 앞으로 튀어나갈 것처럼 상체가 이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달이 다시 구름에 가려져 흐릿해진 이목구비가 어떤 표정일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설은 그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우찬의 얼굴을 보면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슨 이유가 있든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일단 이리 와. 설아 제발.”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우찬이 두 팔만 간절하게 뻗었다. 소매 끈으로 꽉 조인 왼쪽 손목에 눈길이 갔지만 바로 외면했다.
우찬은 격해진 감정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사그라든 목소리로 다시 나긋하게 이설을 설득했다. 설아, 하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우찬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애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모습이 진심인 것만 같고 이 소동을 일으키며 도망을 쳤던 일을 문제 삼을 것 같다는 생각도 정말 들지 않았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눈빛을 멋대로 상상하니 우찬이 여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마저 들었다.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우찬의 손을 잡으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여기는 너무 위험해. 어서 궁으로 돌아가자.”
“폐하께서는 여태,”
울먹이는 소리를 간신히 삼키며 담담한 목소리를 이었다.
“저를 찾으셨습니까?”
“당연한 걸 묻는구나.”
“해결할 일을 마친 뒤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제 편지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일부러 딱딱한 목소리를 내며 냉정하게 굴었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눈빛이 당황스러워 말이 자꾸 끊겼다. 분명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찬의 선명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칠 때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전에 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을 하고 자꾸만 자기 품으로 돌아오라 손짓하는 저 사내가 진짜 우찬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럼 내가 너를 이대로 그냥 내버려 뒀어야 한다는 말이냐.”
“예. 그래야 제가 폐하께 하루라도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었을 테니까요.”
억지인 걸 알고 있다. 일이 틀어진 건 금군이 아니라 이민족 때문이었다. 아까 전 토굴 아래에 숨어 있을 때도 금군의 습격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포로가 되어 붙잡혔을 것이다.
“네가 이런 곳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어떻게 너를 그냥 두, ……됐다. 다 됐으니까 제발 이쪽으로 오거라. 울어도 좋고 화를 내도 좋고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줄 테니 어서 이리 와.”
여기서 길게 말이 오고 가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았는지 우찬이 계속해서 간절한 말투로 이설에게 손짓했다. 정말 이설이 낭떠러지로 몸을 던질 것을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인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손만 뻗은 모양새가 처음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아까는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리라도 다친 모양인지 서 있는 자세가 엉거주춤했다.
죽을 길을 앞에 둔 건 자신인데, 우찬은 이설이 당장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 같은 모습으로 애걸복걸했다.
그래, 애걸복걸. 이설은 우찬의 모습이 왜 이렇게 낯설고 그답지 않은지 가장 확실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우찬이 뭔가를 이토록 갈망하는 것이 낯설었고, 그게 자신이라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저를 도대체 왜. 제 발로 폐하를 피해 도망친 저를 왜 이렇게까지 찾으신 겁니까?”
“보고 싶어서.”
기대 없이 던진 물음에 우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널 찾지 않아도 넌 분명 돌아온다는 약조를 지켰을 거야.”
“저는 반드시 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허나 너를 그리는 마음이 너무 크고 조급하여 내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음을 돌리려 하는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꽂혔다. 우찬은 평소처럼 담담하지가 못했다. 장난스레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도 온데간데없었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터지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차마 소리만큼은 낼 수 없어서 아랫입술을 이로 꽉 물어 울음을 삼켰다.
“네가 가까이 오지 않으면 달래 줄 수가 없어.”
어린아이 어르는 말투로 우찬이 중얼거렸다.
“안아 줄 테니 이리 와서 울어. 이번에는 우는 얼굴 못났다 놀리지 않을게.”
언젠가 별것도 아닌 일로 우찬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사실 그런 일이 너무 많아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럴 때면 우찬은 저더러 우는 얼굴 참 못났다며 혀를 차곤 했는데 그게 농인 것 같기도 하고 진심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매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종국에는 그만 놀리시라고 제 주제에 대들기도 몇 번 했던 것 같은데 별로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사이가 좋았던 시절과는 달리 우찬은 짓궂지도 의기양양하지도 못했다. 희미한 웃음은 불안과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한껏 애를 쓰고 있는 가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