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21화
그게 이설의 의문점이었다. 대체 왜 우찬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기를 쓰고 찾으려 하는지. 귀비가 정인이 아닌 걸 알아차렸다는 게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우찬은 자신을 정인으로 생각했던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으니까.
운이 나빠 궁 밖에서 객사를 당하더라도 우찬의 천명에는 티끌만 한 흠집도 주지 않을 사람이, 바로 연이설 본인이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유독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총애하는 빈이라고 직접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거리는 이설에게 기연이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확언했다. 총애한다 하니 기분이 좋아야 하는 게 당연한데, 별다른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우찬의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황후에 올라야 할 정치적 계산이라도 생긴 모양이라고, 그냥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직 그 소리구나, 너는.”
“지금 당장 마마께 닥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폐하와 함께 있는 것만큼 안전한 게 없습니다.”
“내가 황제의 것이 아닌 이름을 몸에 가지고 있는데도?”
“…….”
“그래도 내가 폐하 옆에 있는 게 안전한 거야?”
“적어도 목숨이 위태롭지는 않을 테니까요.”
기연이 대답이 조금 잔인하게 들렸다. 분명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꼭 ‘일단 죽지는 않을 테니 그거면 되는 거 아니냐’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기연이 말이 맞기는 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우찬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껏해야 궁에서 쫓겨나기까지 밖에 더하겠는가. 터덜터덜 비참한 몰골을 한 채 연국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상상해 봤다. 슬프다 못해 비통한 감정은 말로 다 표현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름을 지우는 방법은, ……일단 궁으로 돌아간 뒤에 제가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몇 다리 건너 수소문하면 그런 일을 하는 잡배들은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기연은 ‘잡배’라고 칭할 만큼 형편없는 놈들에게 부탁하는 게 벌써부터 마음이 들지 않는 말투였다.
하지만 이설은 기연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이 이름을 가진 채로 궁에 돌아간다는 게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이대로는 우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심결에 왼쪽 발목을 감싸 쥐었다. 기연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거기입니까?”
“응.”
“궁에 계실 때 다치신 곳 아닙니까? 혹시 그때부터……?”
“아냐. 이름은 양화성에 도착한 날 발견했어.”
“이름의 주인은 알지 못하시겠군요.”
“처음 보는 글자라서 읽을 수도 없어. ……궁금하지 않아. 찾을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
기연은 할 말도, 궁금한 것도 많은 얼굴이었다. 이름에 관해서라면 더는 얘기 나누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렸다.
“도국에서는 네 이름을 썼어. 나이도, 형제 관계도, 출신도 전부 다 네 것을 훔쳐 썼어.”
“잘하셨습니다. 비가랑 상단에 외상을 달아 사람을 보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아, 강구하. 정말 상단까지 찾아갔구나.”
“그럴 리가요. 국경에서 소란을 피우다 궁으로 끌려와 고신 중에 죽었습니다. 마마의 머리카락도 한 줌 잘라 가지고 있었다던데 모르고 계셨죠?”
이설이 놀란 얼굴로 머리카락을 어깨 앞으로 넘겨 잡았다. 끝에 일부분이 댕강 잘려 나간 게 보였다.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고생 중에 그랬겠거니 하여 신경 쓰지 않았다.
죽었다는 구하 얘기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가도 몰래 머리카락을 잘라 자신이 ‘연이설’인 걸 이용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니 괘씸하여 미웠다. 명복을 빌어줄 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숨 한 번과 함께 구하 생각을 지웠다.
구하가 가져간 옥가락지 생각이 났다. 황궁에서 고신을 당했다면 몸수색을 했을 테고, 분명 가락지도 들켰을 것이다. 선물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빼지 않고 끼고 다녔으니,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락지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거다. 혹시라도 우찬의 손에 들어가 있을 가락지 생각을 하니 기분이 축 처졌다.
“아직 도망갈 고민을 하고 계신 겁니까?”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이설을 살피며 기연이 물었다. 이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발목만 만져 댔다.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기연이 자신을 겁주기 위해 일부러 과장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기연의 말대로 우찬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 해도 그럴 듯했다. 산 일대가 끝없이 넓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하룻밤 사이에 갈 거리라고 해봐야 얼마 되지 않으니 수색 중인 금군 눈에 띌 게 뻔하긴 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어차피 발각되실 겁니다.”
기연은 이설의 어리석은 생각을 아주 끊어 버릴 요량인지 냉정하게 말했다.
“알아. 그걸 아는 데도 나는 순순히 돌아갈 수가,”
“잠시만요.”
마주 앉아 있던 기연이 재빨리 상체를 기울여 이설을 가리고 검지를 입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신호가 명백한 가운데 이설은 갑자기 이러는 영문을 몰라 눈을 치켜떴다. 기연은 아주 작게 ‘쉬이’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이설 쪽으로 더 숙였다.
“무슨 일이야?”
얼굴이 가까이 붙자 이설이 속삭이는 소리로 물었다. 귀를 쫑긋 세워도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발소리가 들립니다.”
“난 안 들리는데.”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도망……, 쳐야 하지 않을까?”
“혼자라면 모를까 마마를 모시고 눈에 띄지 않게 도망갈 자신은 없습니다. 금군이길 바라는 수밖에요.”
“금군이 아니면?”
“제가 시간을 벌 테니 마마께서는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셔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찰나 기연이 입을 막았다. 그때쯤 이설도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인원은 아닌 것 같다. 대여섯 명쯤 될까? 발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금군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귓가에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연이 내려 두었던 언월도를 손에 쥐었다.
“신호하면 곧장 일어나서 물길을 따라 도망치십시오.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짧은 순간 기연을 혼자 두고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현실을 직시했다. 기연이 자신과 함께 도망치더라도 분명 오래가지 않아 추격자들에게 따라 잡힐 것이다. 기연은 곁에 있는 이설을 지키느라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못하고 결국 두 사람 다 위험에 빠질 게 눈에 선했다. 기연이 선택한 방법이 지금 상황에서는 가장 합리적이었다.
“다치지 마. 같이 궁으로 돌아가자.”
진심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궁으로 돌아갈 마음이 들었던 건지 말을 뱉은 순간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소리로 짐작하건데 코앞의 수풀 너머까지 가까워졌다. 이설에게서 상체를 멀리한 기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가 완전히 펴진 것과 동시에 눈이 마주치자 기연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설이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기연은 언월도를 휘두르며 수풀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소리가 나는 아래 방향으로 달렸다.
등 뒤에서 쇠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직전에 봤던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기연이 걱정됐지만, 다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땅에 두어 바퀴 구른 뒤 팔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부러진 나무 등에 긁히기라도 했는지 끔찍하게 아팠지만,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어금니로 꽉 깨물어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팔뚝 한 부분을 반대 손으로 꽉 붙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미친 듯이 달렸다.
물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곧 내리막길로 흘러내리는 작은 물길을 만났다. 이제 기연의 말대로 물길을 따라 아래 방향으로 향했다. 자잘한 돌들이 많은데 밤이라 잘 보이지가 않아서 잠깐 사이에 세 번을 앞으로 고꾸라지고 젖은 흙에 옷이 엉망이 되었다. 축축해진 옷의 감촉이 불쾌해질 틈도 없이 꾸역꾸역 일어나 다시 도망쳤다.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꽤 오랫동안 달렸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추자 더 이상 쇠가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멀리까지 도망을 친 건지, 기연의 싸움이 끝난 건지 모르겠다.
땀 맺힌 얼굴을 식히려고 물가로 갔다. 누가 방망이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슴 전체가 쿵쿵 세게 울렸다. 기연을 만났다는 조금 전의 안도감이 씻어 내린 듯 사라졌다. 죽음의 공포 앞에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벌벌 떨리는 손에 물을 담그려 무릎을 접은 찰나였다. 부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의 형체가 얼핏 눈에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나무 기둥 뒤에서 검은 인영이 나타났다. 사람이다, 라고 인식하자마자 부지불식간에 두 사람 사이가 좁혀들었다. 손에 든 검날이 달빛에 번쩍이며 이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갈라진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이설은 아무런 방어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팔로 얼굴을 가리자 죽는다는 생각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수많은 과거의 기억들이 깜깜한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고 마지막에는 한 사람의 얼굴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 순간 어깨 옆을 스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곧바로 억, 하는 단발마의 비명 소리와 함께 무언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야 이설이 조심스레 팔을 내렸다. 눈을 뜨자마자 발견한 것은 목 옆에 단도를 박고 땅에 쓰러져있는 사내였다. 꿰뚫린 목의 상태로 봤을 땐 즉사였다.
숨을 고르며 망연히 땅바닥의 시체를 바라봤다. 목에 꽂힌 단도의 손잡이 부분이 어렴풋하게 보이는데 언뜻 눈에 들어오는 문양이 낯익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이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아갔다.
“……설아.”
물가 건너 반대편에 사람 형체를 띈 검은 게 보였다. 물 흐르는 소리 아래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흐르다 희미하게 사라졌다. 부르면 듣지 못했을 만큼 먼 거리가 아닌데도 귓가에 흩어지는 목소리가 너무 아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