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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19)화 (219/300)

달의 황홀경

219화

“기병 일 소대가 오늘 밤 궁으로 돌아갈 거니까 함께 들어가.”

흑영이 보병들이 올라오며 다져 놓은 길을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산의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산 전체에 깔린 금군들의 소리가 시끌벅적하여 산세의 고요한 정취 같은 건 느낄 여유가 없었다.

산속이라서 그런지 해가 금세 지고 어두워졌다. 흑영이 다시 산을 오를 때쯤이면 앞이 캄캄해서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흑영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도 않겠지만.

판판하게 잘 펴진 흑영의 등 뒤를 가만히 따르던 소운이 ‘영아’ 하고 나직이 불렀다. 흑영이 걸음을 잠깐 멈칫한 사이 소운이 두 발자국을 더 걸어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내가 처음 손목에 흉을 지고 나타났을 때 말이야.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열여섯 여름. 황후께서 승하하셨던 해.”

흑영이 기억을 되짚어 줬다. 소운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황후의 국장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한테 처음으로 역정을 냈잖아. 그까짓 연심이 뭐길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냐고.”

“화를 낸 게 아니라 걱정이었어. 네가 갑자기 너무 변해서 걱정한 거였다고.”

걱정이라기에는 사람을 구석에 몰아붙이고 화를 내는 태도가 너무 살벌했다. 고문에 가까운 시술 후유증으로 서 있기도 힘든 사람에게, 그날 흑영은 검만 안 빼 들었을 뿐이지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기억하기로는 소운도 잠깐 버티다 그대로 졸도한 것으로 안다.

“난 그때 네 말이 이해가 안 됐어. 대체 내가 어디가 그렇게 변했다는 건지. 나는 항상 그대로였던 거 같은데.”

오랜만에 타인에게 꺼내는 옛날 기억이 모래알처럼 입안에서 버석거렸다.

“그래서 자꾸 나더러 변했다고 하는 네가 밉고, 내 뜻을 헤아려 주지 않는 폐하가 원망스러웠어.”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너도 깨달았겠지. 사람이 변한다는 게 뭔지.”

황제를 원망했다는 말에 언짢은 심기라도 보일 줄 알았던 흑영은 한심하다는 투로 툭 내뱉기만 할 뿐 더는 소운을 비난하지 않았다.

소운이 잠시 말을 끊자 둘 사이에 고요한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직 저 위에 병사들의 말소리는 시끌시끌 어수선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우거진 수풀이 머리 위를 스치자 흑영이 가지를 하나하나 들어 올려 주었다. 소운이 작은 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는 동시에 흑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폐하께서 변하신 것 역시 연심 때문인 줄은 아직 잘 모르겠어. 연심보단 분노와 배신에 더 가까우니까.”

“영아 너는 누군가를 연모해 본 적 있어?”

“…….”

“없을 거야. 있다면 한 번에 알아볼 수 있거든. 폐하께서는 지금 지독한 연심에 혜안이 흐려지셨다는 걸.”

“기우야.”

“폐하께서 소의 마마를 죽이실 거야.”

흑영이 갑자기 손을 거두자 풀이 무성한 가지가 아래로 쳐지며 소운을 가렸다. 소운은 자기 손으로 직접 가지를 위로 쳐 내며 좁은 길을 먼저 빠져나왔다.

“폐하는, ……마마를 죽이기 위해 찾고 계신 게 아니야.”

뒤따라 나오는 흑영이 이것만은 확실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소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되찾으시면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게 다리를 자르실 거야. 눈을 뽑고, 양손도 모두 잘라 몸뚱이만 남겨 놓으실지도 몰라. 그건 숨이 붙어 있어도 사는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소의 마마는 결국 죽을 거야.”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셨어? 마마의 사지를 잘라 종국에는 목숨까지 거두시겠다고?”

“아니 아직은. 폐하께서도 아직 마음을 다 깨치신 건 아닌 것 같거든.”

“난 네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긴 한숨과 함께 흑영이 소운의 머리 위에 손을 짚었다. 가볍게 탁탁 두어 번 내리치는 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뿌리치지 않았다. 두 살이나 어린 주제에, 어린 시절부터 남의 머리 쓰다듬는 걸 버릇처럼 여겼던 흑영이었다. 소운은 씁쓸하게 웃으며 흑영의 몸에 붙은 나뭇잎을 떼어 주었다.

“언젠가 폐하께서 마음을 완전히 깨치시는 때가 올 거야. 너는 폐하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니까 제일 먼저 알아차릴 수 있잖아.”

“그때가 오면.”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 줘. 내가 폐하와 마마를 도울 수 있게. 폐하께서 평생에 걸쳐 후회하실 일을 범하시지 않,”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닷없이 흑영이 소운의 몸을 끌어당겼다. 반 바퀴 돌아간 몸이 흑영의 등 뒤에 가려지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 뒤에는 나무, 앞에는 흑영 사이에 낀 채로 흑영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곧 파사삭거리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나뭇가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흑영이 반쯤 꺼냈던 검을 도로 집어넣고 나서야 소운이 안도했다.

“뭐야.”

흑영이 허공에 대고 말했다. 소운은 그게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수풀 사이에서 흑영과 똑같은 복장을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태감 어른은 제가 아래까지 모셔 드릴 테니 어서 올라가십시오.”

“무슨 일이냐.”

“산등성이 쪽으로 마마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것을 찾긴 찾았는데 뒤를 밟힌 흔적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금군은 분명 아닙니다. 누군가 마마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는?”

“연통을 받으시자마자 혼자 말을 타고 사라지셨습니다. 길이 가파르고 날이 어두워 다른 기병들조차 쫓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남은 호위군들이 모두 뒤따르고 있지만,”

“먼저 올라갈 테니 너는 궁으로 돌아가.”

흑영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소운을 뒤에서 당겨 사내에게 밀었다. 듣기만 해도 아찔해진 상황에 소운 역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황명 역시 지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돌아간다고 해도 도움 될 게 하등 없는 처지였다.

소운이 등을 떠밀기 무섭게 흑영은 땅을 박차고 위로 튀어 올랐다. 고개를 위로 올려 흑영이 사라진 궤적을 보는 소운을 사내가 불렀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내려가자며 재촉하는 사내를 따라 소운이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

“우리 중에 늑대 가죽을 걸친 놈은 아무도 없는데.”

여인의 말과 동시에 한 지점에서 횃불 하나가 화르르 타올랐다. 이설은 몸을 더 작게 웅크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나뭇잎이 쓸려 소리가 날 게 뻔해 숨소리만 가늘게 내쉬려고 노력했다. 마른침을 넘기는 소리조차 새어 나갈까 싶은 긴장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바스락. 발소리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놈 마지막 인상착의가 어떻게 됐지?”

“검은 물이 얼룩덜룩 들어 있는 산발 머리에 털 신발을 신고, 늑대 가죽 외투를 입었다 합니다.”

주변아 적막한 탓에 여인이 피식 웃는 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불 이리 내.”

갑자기 시야가 번쩍 밝아졌다 사그라들었다. 나뭇잎 틈새로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이 보였다. 냄새가 나는 근방 여기저기에 불을 비추고 검집으로 수풀을 들쑤시고 있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여인은 결국 이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설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머리에 비녀를 뽑아 손에 쥐었다. 도움 따위 되지 않을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도대체 이 쥐새끼가 어디 숨은 걸까.”

여인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자박 하는 소리가 이제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설은 비녀의 날카로운 부분을 앞으로 세워 꽉 잡았다.

발길질에 쌓아 놓은 나뭇잎이 우수수 흩어졌다. 다음번에 발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발등을 콱 내려칠 요량으로 마음을 먹었다. 시야가 다시 훤해질 때 이설이 비녀를 치켜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라는 걸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당주님! 금군입니다!”

사내가 다급하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횃불이 눈앞에서 휙 멀어졌다.

“모두 엎드려!”

첫발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던 이설은 이 난리 통에 밖으로 나가 도망을 쳐야 할지 여기서 이 소란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할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 자리를 피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당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잦아든 대신 쇠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금군이 산등성이까지 올라왔다는 얘기였다. 함성 소리에 천지가 개벽이라도 할 것처럼 산 전체가 뒤흔들렸다.

“쫓아라! 한 놈도 살려 두지 말고 모두 죽여라!”

귀를 기울이고 몰래 빠져나갈 때를 찾던 이설에게 어렴풋하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앞을 가린 나뭇잎을 걷어 내고 시야를 넓혔다.

소리만 들었을 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목도한 광경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누가 금군이고 누가 이민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베고 찌르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미 시체와 부상당한 몸뚱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가운데 이설은 헛구역질을 간신히 참고 전장을 빠르게 살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른 여인이 수장이다! 놓치지 말고 잡아라!”

달빛에 반사되는 예리한 날의 검 모양이 다른 병사들의 것과는 확연히 달라 보이는 사내가 하나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데 들고 있는 무기가 확실히 낯익었다.

“기연아!”

반가운 마음이었던 건지 걱정된 마음이었던 건지 순간 입 밖으로 터지는 이름을 곧바로 손등으로 막았다. 다행히 아수라장이 된 전장에서 이설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한 사람만 빼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휘두르던 언월도가 바닥으로 기운 것만 봐도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이 갔다.

이설이 위험을 알리려는 사이 누군가 기연에게로 달려들던 사내의 목을 창으로 꿰뚫었다. 자기 앞으로 고꾸라지는 시체를 밀치고 기연이 이설에게로 달려왔다.

“이설 님!”

후퇴를 하고 있는 이민족 중 하나가 기연의 목소리를 듣고 이설을 발견했다. 도망을 칠지 이설을 잡을지 갈팡질팡하던 사내가 이설에게로 허리를 숙인 순간 멀리서 날아온 언월도가 사내 정수리에 그대로 꽂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내가 눈앞에서 쓰러졌다.

“어서 나오십시오!”

기연이 정신없이 달려와 시체가 된 사내를 밀어내고 나뭇잎 더미 사이로 팔을 쑥 밀어 넣었다. 이 손을 잡아야 할지 찰나 동안 고민했지만 결국 기연의 손을 잡고 이설이 몸을 일으켰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일단 여길 피하자!”

오랜만에 본 얼굴에 대고 안부 인사를 물을 틈도 없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반가웠던 마음도 스치듯 지나갔다.

“곧 금군 병사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페하께서도 오실지 모르니 여기 계시,”

“지금은 폐하를 만날 수 없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소리쳐도 기연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궁에 있든지 어느 전장에 나가 있든지 해야 할 할 우찬이 이곳에 와있다는 소식에 눈앞이 더 깜깜해졌다.

기연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금군과 이민족이 이설을 발견했다. ‘소의 마마를 찾았다’와 ‘연이설이 여기에 있다’하는 고함 소리가 사방천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 우찬까지 이리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설은 기연의 옷가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어서, 여서 여기서 도망치자. 일단 어디든 멀리 도망친 후에 다 설명해 줄 테니 기연아 제발!”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지금 날 보면 절대 살려 두지 않으실 거야!”

비약적인 판단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기연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절망적이다 못해 죽기 살기로 매달리는 이설을 보고 기연 역시 판단력이 흐릿해졌다.

두 눈에서 망설임을 읽어 낸 순간 이설이 기연을 옆으로 밀치고 풀숲 사이로 냅다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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