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18화
탁자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가득 고인 잔을 들어 소운에게 권했으나 거절했다. 그다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모호한 얼굴로 소운은 땅만 봤다.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 태자를 비차란 손에 계속 맡길 수는 없으니까. 네가 가서 태자를 도와 나 대신 황궁을 살펴라.”
“관직도 없는 저 따위가 태자 전하를 보필이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나루성 단가의 사남 단소운에게 상국직을 임한다.”
술 한 잔으로 목을 적신 우찬이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출정식을 끝내고 궁을 나가는 우찬에게 태자가 의젓하게 다가왔다. 울며 떼라도 썼으면 못 본 척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텐데 태자는 생각보다 점잖게 우찬을 배웅했다. 내정은 염려치 마시고 부디 천자의 본분을 다하시어 금의 위상을 알리시라는 말이 어찌나 우습고 어이가 없던지. 태자 또래의 아이가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그걸 본 태자의 보모상궁은 크게 감격한 모양이었지만 우찬은 마음이 착잡해 발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막 돌아서는 우찬을 태자가 불러 세워 눈짓을 했다.
위로 흘끗 올려다보는 방향에 이루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차란이 서 있었다. 태자의 속내를 유추하건데, 다 참아도 이것만은 참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태감직을 지냈던 소신은 받을 수 없는 관직입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태자가 아직 황위에 오르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그렇다 해도 소신에게는 너무 높은 자리입니다.”
“승상 위로 줄 수 있는 자리는 그것뿐이야. 고심해서 마련한 자리니 토 달지 마라.”
“그렇지만 폐하,”
소운의 말을 가르고 탁자 위로 술잔이 쾅 내려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잔 아래가 쩍 갈라지며 틈새로 새어 나오는 술이 손을 적셔 흘렀다. 손을 타고 흐르는 술이 손목까지 닿으며 손목에 묶어 놓은 비단 끈을 적셨다. 언제서부턴가 다시 묶고 다닌 끈이었다. 거치적거리는 게 성가셔서 다시 풀어 끈을 버렸다.
시끄러운 소리에 다시 천막 밖에서 호위군이 안을 들여다보고 나갔다.
“임관은 황명이고 불복은 극형이다.”
“송구합니다.”
소운은 결국 황명에 쉬이 수긍했으나 표정만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네 두 놈의 끔찍한 연분 놀음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이제 그만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안 될 인연은 끊을 줄도 알아야지.”
손을 적신 술을 털어 냈다. 독주의 진한 술 냄새가 천막 안에 진동을 했다.
냉정하게 꾸짖는 우찬의 말에 소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공연히 손목만 만지작거렸다. 불에 달군 인두로 몇 번을 지졌는지도 모를 만큼 주변의 살갗이 엉망이었다. 처음으로 저 손모가지에 붉은 상처 낸 것을 보았던 날 얼마나 황당하던지.
“손목은. 이제 더는 아프지 않으냐?”
우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옆에 짐을 뒤져 직접 새 술잔을 꺼내왔다. 그 안에 다시 술을 채워 소운에게 주었다. 거절한다면 억지로라도 먹이게 할 생각이었고,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역시나 소운은 거절하지 않았고 받은 자리에서 단번에 잔을 비웠다.
“아무런 감각도 없습니다. 이제는 그냥 죽은 살덩이입니다.”
“이름은 어떤 방법으로 새기려고 한 것이냐?”
무표정하게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던 소운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우찬은 잔 없이 술병을 입에 대고 마신 뒤 뭘 그리 쳐다보냐고 물었다.
“여태껏 한 번도 물으신 적이 없지 않으셨습니까?
소운의 말이 맞았다. 수년간 소운의 손목 상처가 계속해서 흉악해지는 동안에도 우찬은 빈말로라도 한 번 묻지 않았다. 아팠는지, 지금도 아픈 것은 아닌지, 손목에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묻지 않아도 대충 알 법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소운이 아무리 아끼는 벗이라고 해도 자기 선택으로 겪은 고통을 안쓰럽게 여겨 줄 만큼 우찬이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궁금해졌구나.”
우찬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인두로 살을 녹여 그 위에 염료를 찍어 새겨 본 적도 있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긁어 쓴 적도 있고. 요즘은 붉은 실로 아예 수를 놓기도 한다는데 이건 소신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퍽 좋은 경험 많이도 했구나. 아프기도 아팠겠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건너건너 들으며 어떤 방법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걸 직접 경험한 당사자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 대단히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인두로 살을 녹여 그 위에 염료를 찍어 새긴다니. 산사람의 몸에 할 짓이 못됐다. 우찬은 잠시나마 떠올렸던 이설의 손목을 계획에서 덜어 냈다.
그래. 이설에게 제 이름을 강제로라도 갖게 할 참이었다. 천명을 억지로 만들고 어리숙한 이설이 수긍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이설을 자의적으로 옆에 묶어 두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금 소운의 손목을 보니 그런 생각일랑 씻은 듯이 사라졌다. 인두로 살을 녹이거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긁는 짓 따위를 이설에게 할 수는 없었다.
어쩌다 힘 조절을 못 해 손목을 세게 잡기라도 하면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아파했던 약골이다. 칠칠치 못하게 등불에 손을 데면 며칠을 아파하면 약골의 몸을 인두로 지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게 애를 써도 갖지 못한 이름입니다.”
소운이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황제의 잔에 술을 채워 줘도 모자랄 판에 자기 잔을 내미는 행태가 무척 소운답지 않았다. 소운은 황제의 가장 가깝고 오래된 벗이며 권문세가의 둘도 없는 귀한 막내아들이라는 감투가 있음에도 법도를 지키는 데에는 앞뒤가 꽉 막혀 빈틈이 없었다.
우찬은 소운의 결례를 지적하지 않고 조용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천운으로 갖게 되신 그 이름을 좀 더 소중히 여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러워하는 한탄인 동시에 훈계조로 소운이 나직이 말했다. 시선이 우찬의 손목에 향해 있었다. 아까 이름을 가렸던 끈을 풀고 소매 끈을 아래로 내려 묶은 뒤로는 이름이 다시 보이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는 내가 이 이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 같으냐?”
소운은 대답 없이 술을 홀짝였다. 온화하게 웃으며 눈을 맞춰 오는 걸 보니 역시 차란이 아닌 소운을 곁에 충신으로 두었어야 했다고 자책했다. 그나저나 이 얘기, 언젠가 소운과 해 봤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혹은 차란이었던가.
술병을 탁자에 빙그르르 돌렸다. 그동안 혼자 먹는 술이라 달지 않은 줄 알았는데 소운과 함께 마셔도 술은 쓰다. 이설을 데려오기 전까지는 제대로 된 술도 즐기지 못하게 됐으니 낭패다. 역시 이설을 한시라도 빨리 곁에 두어야겠다.
“소운아.”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소운을 불렀다.
“연심이란 무엇이냐?”
“…….”
“혜서 황후가 흙으로 돌아갔을 때 선황께서는 꼬박 보름을 앓아누우셨고 그 뒤로도 오랫동안 실의에 잠기셨다. 이런 게 연심인 것이냐?”
선황은 혜서 황후의 관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수백 번도 넘게 관을 쓸어내리며 그대를 한없이 연모했노라, 하며 흐느껴 울었다. 우찬은 저 못지않게 무심하고 냉정하며 때로는 불같은 성정으로 대전을 들썩이게 하는 선황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게 놀라웠다. 연심이라는 게 뭔지 더 혼란스러웠지만 궁금히 여기지는 않았다.
“사람이 일백이라면 그 연심 또한 일백 가지가 있을 테지요. 선황 폐하의 연심은 그런 것이었나 봅니다.”
소운이 차분한 어조로 태자에게 글공부를 가르쳐 주듯 다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찬은 듣고 싶었던 대답과는 거리가 멀어 재차 물었다.
“그럼 네 연심은 어떠하냐? 네가 품은 연심을 알려다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우찬의 시선을 빗겨 땅으로 뚝 떨어졌다. 그간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의 대답을 이제 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술에 젖은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인 뒤 소운은 힘없는 짧은 숨을 뱉었다.
“이제 소인의 남은 연심은 곁에서 지켜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하찮은 마음이니 흘려들어 주시옵소서.”
차분한 것과는 확실히 다르게 체념 짙은 목소리였다. 소운으로서는 너무 오래 앓고 견딘 연심이었다. 담담히 절망을 받아들이기까지 우찬이 본 것만 해도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찮지 않다. 하지만 어리석구나. 만약 내게도 연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
“허면 아무리 붙잡아도 잡히지 않는 상대를 어찌 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달아나려는 두 발을 자르고, 다른 사람을 담으려는 두 눈을 파내고, 나를 거부하는 양손을 잘라야지. 숨이 붙어 있는 한 나의 것이다. 설령 목숨이 다한다 해도 내 품에서 죽을 테니 그걸로 만족해 보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얼굴에 점점 균열이 생겨 굳어 갔다. 본의 아니게 놀란 두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 것을 보고 다시 이설이 생각났다. 눕혀 놓은 나뭇잎 모양으로 커다란 눈이 이제 와 보니 이설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적잖게 충격을 받았는지 소운이 입술만 뻥긋거렸다. 남은 술을 모두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뒤 ‘폐하’ 하고 무겁게 부른다.
“연심은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사람 일백이 있다면 연심도 일백 가지가 있는 것이라고, 네가 방금 그렇게 말했잖느냐. 내 연심은 이런 것이 맞다.”
“자기가 가질 수 없다 하여 연모하는 이의 사지를 자르고 눈을 뽑아 곁에 두는 연심이라니, 그런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모두들 어리석은 연심을 품고 있었나 보군. 지켜보기만 하는 연심이라면 애초에 품지를 말았어야지.”
“폐하.”
“그만 됐다. 괜한 얘기를 꺼냈어. 오늘 술은 이만해야 할 것 같군.”
우찬이 술병을 멀리 치웠다. 어차피 남아 있는 술도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급격하게 기울어지는 기분이 다 소운 때문인 줄로 알고 이만 나가 보라 턱짓을 했다. 소운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아 있는 눈치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났다.
여독이 채 풀리지 않은 걸 알고 있지만 지금쯤 황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태자를 염려해 궁으로 돌아가라고 일렀다. 흑영에게 근처 산 아래까지 데려다주고 오라 했다.
흑영과 함께 나가는 불그무레한 얼굴 위로 이설을 보았다. 연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만류하는 소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우찬은 비교적 소운의 말을 귀담아듣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