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17화
산에서 밤은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때문에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을 자고 가기로 했다. 움푹 파인 땅에 나무가 쓰러지며 그 아래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그 안으로 들어가 밖에서 보이지 않게 마른 나뭇잎을 수북하게 쌓았다.
날이 많이 차지 않아서 털옷을 깔아 그 위에 누웠다. 늑대 털 냄새가 심하게 났지만 참을 만했다. 처음 두 밤을 이렇게 웅크려 잘 때는 눈물이 그렇게 많이 나더니 지금은 그런 서글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름을 지워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도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지 객사한 뒤에는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일단 살아남는 것에 전력을 쏟기로 했다. 일단 그게 제일 중요했다. 여차하면 이름은……, 불에 달군 인두로 직접 지져 없애는 방법도 고려해 보기로 했다. 정말이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아무 생각도 안 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우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잠은 잘 주무시는지, 수라를 거르진 않으신지, 출정이라도 나가셨다 다치지는 않으실지. 그리고 아직 자신을 잊지는 않으셨는지.
시국이 이리된지라 많이 바쁘시겠지만 가끔은 제 생각도 해 주었으면 좋겠다.
몸을 웅크리자 하품이 났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이 땅으로 꺼지며 소록소록 잠에 빠져드는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산짐승의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직 발자국이 선명한 걸 보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험악하게 고함을 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귀에 박혔다. 놀라 입을 막으려고 손을 이자 마른 나뭇잎이 바스러지며 소리가 났다.
“방금 무슨 소리 듣지 못했습니까?”
“소리?”
“저도 뭔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이민족일까 금군일까. 억양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아 애가 탔다. 누구한테 들켜도 문제지만 굳이 하나를 고르자면 금군이 낫다. 적어도 당장 죽지는 않을 테니까.
누군가 그냥 짐승 발소리인 것 같다는 말을 했지만 대부분 쉽사리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근방을 더 수색해 보라는 소리가 들리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따금 모아 놓은 나뭇잎 사이로 불빛이 번쩍 밝아졌다 사라질 때면 숨도 멈춰야 했다.
소리를 듣자 하니 나무 막대기로 바닥에 수북한 나뭇잎을 헤쳐 다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러다 앞에 가려 놓은 것들을 치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발각될 판이었다.
“아무래도 여기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젠장, 대체 어디까지 멀리 내뺀 거야.”
여인의 낮은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금군은 여인이 입영할 수 없으니 이민족임이 틀림없다. 발각되면 목숨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은 이만 철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불이 밝아 오히려 저희 위치가 금군에게 발각될 수 있습니다.”
“그놈들은 아직 이 산등성이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어.”
“규모에 비해 이동 속도가 빨라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병력은 어느 정도라고 했지?”
“수도에 남은 전군이 다 진격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수준입니다. 게다가 양화성 놈들까지 합세하여 이미 저희 쪽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사내가 차마 절망하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쓰며 말했다.
“빌어먹을 양화성 새끼들. 딸을 황제에게 후궁이랍시고 갖다 바칠 때부터 알아봤어. 아무리 부족이 달라도 한 조상에서 난 동족인 것을, 기어이 동족의 피를 봐?”
“병력 차가 이미 컸던지라…….”
“편국 놈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금황제의 목을 따 오라는 것도 아니고 거사가 끝날 때까지 발목만 붙잡아 두라는 거였잖아. 근데 전군이 이리 몰려들면 어쩌라는 말이야. 하여간 쓸모없는 놈들.”
역시 편국과의 내통이 있었던 건가. 공통의 적을 가진 세력이 붙어먹는 일은 인간관계에서도 비일비재하니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편국도 생각만큼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편국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궁이 쉽게 결정을,”
“인제 와서!”
여인이 갑자기 호통을 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이설이 몸을 더 바짝 웅크렸다. 바닥에 털옷을 쥔 손이 속절없이 벌벌 떨렸다.
“이 약해 빠진 남방 소인배 놈들. 간악하고 비열한 건 편국이나 금국이나 매한가지야. 왕족이고 귀족이고 다 똑같다. 이 씹어 죽일 놈들. 제때 연가 왕자 놈만 잡았어도 이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니야!”
연가 왕자 놈이란 건 분명 이설 본인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연국에서 처음 습격을 당했을 때를 통탄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설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그때를 떠올렸다가 바로 지워 버렸다.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되살아나 온몸을 짓눌렀다.
“마음 같아서는 잡자마자 사지를 찢어 배를 가르고 싶은데.”
“절대 안 됩니다. 반드시 생포해야만 약조한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다 온전히 잘못된 계약 때문이다.”
여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했다.
“연가 놈을 붙잡는 즉시 죽여 없애는 약조를 해야 했어. 그래야 금황제의 목을 쉽게 칠 수 있었을 거야.”
“약속된 땅만 돌려받는다면 금황제야 어찌 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수십 년 동안 우리 부족이 당한 수모를 그렇게 쉽게 갚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이 손으로 반드시 황가의 대를 끊어야 죽어서도 조상님 뵐 면목이 설 것 같다.”
이설은 물론 우찬의 목숨까지 노리는 여인이 당찬 포부로 이를 갈았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이 자신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소름이 돋았다. 사람들을 줄줄이 엮어 죽인 뒤 받을 약속된 땅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싶다.
원통해 마지않던 여인은 결국 수색대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했다. 옆에서 자꾸만 금군에게 발각될까 걱정된다며 수선을 떨었기 때문이다. 이설은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횃불의 밝은 불빛이 사라지자 겨우 안도했다.
“일단 동이 틀 때까지 남쪽 진영에서 기다리자. 날이 밝는 대로 이 지점부터 수색을 시작하는 게 좋겠어.”
“네 그럼 이만 철수하겠습니다.”
흩어져 있는 동료들을 모으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이쯤 관두고 내일 이곳에서부터 다시 수색을 시작하겠다는 고함 소리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 해가 밝기 전에 여기서 더 먼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한밤중에 산속을 헤매는 것은 위험하다. 불을 밝힐 도구가 없으니 오로지 달빛에만 의지해 이동해야 했다. 산짐승을 만나 해를 당하는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는 사이 부산스럽던 발소리가 멈춘 동시에 여인이 ‘잠깐’ 하고 주의를 집중시켰다.
“이 일대는 늑대가 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여인이 말을 멈추고 잠시 침묵했는데, 주변이 아주 조용해졌기 때문에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인이 말했다. 은근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늑대 가죽 냄새가 나네?”
*
“기병대는 이 이상 올라가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하여 소대를 나눠 이 일대를 우선적으로 수색하기로 했습니다.”
“보병 제일 소대부터 십이 소대까지는 북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반원을 돌아 진군할 예정이고 십삼부터 십오 소대까지는 기동력이 좋아 서쪽 편까지 빠르게 이동 예정입니다.”
“편국에서는 국경을 넘는 즉시 직접적 선전으로 간주하고 무력 대응하겠다고 별사를 보냈습니다. 산어귀에 친 진영에 일단 포박해 놓았습니다.”
“남은 소대는 폐하의 호위를 위한 최소 병력만 제외하고 매복 중인 이민족들을 정리할 것입니다.”
커다란 진막 안. 우찬의 앞에 나란히 선 거기장군(車騎將軍 : 중앙 상비군을 통솔, 정벌 전쟁을 관장하며 기병을 통솔하는 무관직)과 금위장군이 주거니 받거니 말을 전했다. 우찬은 듣고 있는 건지 마는 건지 눈길도 주지 않고 한가로이 검날을 닦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 치고는 날이 상하지도 않고 보관이 아주 잘되어 있었다. 그러니 명검이겠지.
“별사는 머리를 잘라 편국으로 돌려보내라.”
다 닦은 검을 검집에 넣어 허리에 길게 찼다.
“국경 좀 넘은 걸로 직접적 선전이라니 우습네. 그리고 호위는 내 사람들로 충분하니 전 군은 수색과 토벌에만 집중해라.”
우찬이 성가시다는 듯 손으로 뒤를 한 번 휙 가리켰다. 흰자에 까만 눈동자만 희번뜩이는 새카만 사내 여럿이 기척도 없이 서 있었다.
거기장군이 그럴 수는 없다며 한마디 하려던 찰나 금위장군이 팔을 뒤로 돌려 거기장군의 허리를 툭 쳤다. 갑옷이 철렁이는 소리와 함께 거기 장군이 큼큼거리며 헛기침을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이만 나가 봐.”
“밖에 단소운 태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여보낼까요?”
“들여보내. ……같이 나가 봐.”
뒤도 다 돌아보지 않고 고개만 살짝 기울인 채로 우찬이 말했다. 호위군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흑영이 대답 후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기자 뒤를 쫓았다. 은신하지 말라는 황명 이후 호위군들은 위로 펄쩍 뛰어오르거나 그림자에 몸을 숨겨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흑영은 나가는 길에 마주 들어오는 소운을 만나 눈짓으로 짧게 인사했다. 소운은 피로가 쌓인 얼굴로 억지웃음을 지어 화답했다.
“태감 단소, 아니, 나루성 단가의 사남 단소운 이제 막 도국에서 도착하였습니다. 홍복을 누리소서.”
소운이 바닥에 깐 융단에 부복했다. 일어나 앉으라 하여 얼굴을 들여다보니 여독에 몸이 상한 건지 여하간 지난번 도국 양화성에서 봤을 때보다 꼴이 좋지 않았다.
“먼 길 돌아오느라 수고가 많았다. 다행히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했군. 가지고 온 것은?”
“여기 있습니다.”
소운이 손에 들고 온 두루마리를 공손하게 우찬에게 건넸다.
구겨진 곳 하나 없이 말끔하게 온 두루마리를 양옆으로 펼치자 빼곡한 글씨와 함께 말미에 도국의 인장이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창화군께서 도국 왕을 설득하느라 대단히 애를 먹으셨습니다.”
“수고했다 전해. 아, 넌 이제 돌아갈 일이 없겠군.”
우찬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임시로 가져다 놓은 탁자 위에 휙 던졌다. 나무 대가 부딪히는 소리가 쿵 하고 나는 바람에 천막 입구를 지키던 호위군 둘이 천을 들쳐 안을 확인했다.
“유배는 끝났다. 이만 황궁으로 돌아가 태자를 보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