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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14)화 (214/300)

달의 황홀경

214화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만 쳐들고 있는 꼬락서니가 영 볼품없었다.

뒷짐을 지고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억지웃음을 띈 귀비가 우찬을 조롱하듯 올려다봤다.

“그게 아니라면 폐하처럼 무정한 사내께서 어찌 그리 애타게 그것을 찾으신단 말입니까?”

당차게 묻는 말은 언젠가 차란과 소운이 했던 질문과 같았다. 이보다는 덜 공격적이었지만 궁금함의 크기는 어쩌면 더 컸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우찬이 이토록 한 가지에 일에 몰두하여 집착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다.

우찬은 두 사람의 질문을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귀비의 말은 그때와는 새삼 다르게 생각됐다.

잠시 고민하던 우찬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이유를 찾게 되면 네게 제일 먼저 알려 주지.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다면.”

우찬이 다시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때맞춰 문이 열리고 우찬이 나가자 호위군 두 사람이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귀비는 죽고 싶어도 황명 없이는 죽지 못하는 몸이었다.

*

들어올 때는 궁인들로 부산스럽던 복도가 한결 한산해졌다. 무암궁에 남은 건 이제 귀비와 궁인 둘 셋 정도가 전부였다. 탁 트인 복도를 걷는 우찬에게 반대편에서 흑영이 다가왔다.

“출정 준비는 모두 마쳤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줄곧 수도 밖에 병사들을 준비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어쩌면 금위대장도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준비됐다면 굳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는 우찬이 걸음을 서둘렀다. 태금궁에서 머뭇거렸던 시간만큼 이설을 되찾는 데 시간이 지체됐다.

“그런데 폐하. 밖에 우 미인 마마께서 폐하를 뵙겠다며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 미인?”

“예. 도국 양화성 변방에 사는 이민족 출신의,”

“누군지는 알고 있다.”

누군지 몰라 되묻는다 생각했는지 흑영이 우 미인의 출신 배경을 설명하려 했다. 말을 막아서고 인상을 잠시 찌푸렸다 손을 저었다.

귀비를 만나고 푹 꺼진 기분에 누구든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하물며 이민족 출신의 후궁이니, 여기까지 쫓아와 만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대강 이해가 돼서 더 성가셨다.

“양화성 거주민들에게는 원한이 없으니 귀찮게 굴지 말라고 돌려보내.”

“고향 부족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궁 밖으로 막 나온 우찬에게 흑영이 대답하려던 순간 여인의 우렁찬 목소리로 ‘폐하!’ 하고 부르는 것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며 가며 얼굴이나 봤던 우 미인이 체통머리 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뛰어와 바닥에 납작 엎어졌다.

“양찬궁의 우 미인, 결례를 무릅쓰고 폐하를 이리 뵈옵나이다. 홍복을 누리소서.”

모래 자갈 바닥에 이마를 댄 우 미인이 목청이 터질 것 같은 소리로 예를 갖췄다. 한시라도 빨리 출정할 채비를 하려던 우찬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가려 하자 우 미인이 재빨리 그 앞으로 기어가 길을 막아섰다. 동시에 뒤에 서 있던 호위군들이 일제히 검을 꺼내 우 미인의 목을 빙 둘러 겨눴다.

“무엄하다! 감히 황제 폐하의 길을 막아서다니,”

“폐하.”

우 미인은 호위군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찬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루 소의 마마를 찾는 데에 저희 부족민들을 사용해 주십시오. 강성 남쪽은 보기보다 지형이 험하고 지대가 넓은 곳입니다. 저희 부족민들이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시하고 지나치려던 우찬이 걸음을 멈칫했다. 강단 있는 눈빛이 괜한 객기로 여기까지 찾아와 지껄이는 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우찬이 허공에 손을 젓자 우 미인의 목을 겨누었던 검들이 사라졌다.

“연이설이 강성 남쪽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궁 뒤편에서 궁인들의 눈을 피해 전서구를 주고받으며 고향 소식을 듣곤 했습니다. 마마께서 강성에서 사라지신 이후로 양화성의 일부 이민족들이 거주지를 이탈하여 강성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합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폐하. 부디 저희 부족민들의 금계 제한령을 해제하시고 마마를 찾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 미인 따위에게 관심이 없기도 없었지만 전서구를 날리는 것조차 몰랐다니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궁정 경비를 주 임무로 하는 무위대장에게 어떤 경질을 쳐야 할지 계산도 되지 않았다. 무위장군 석재영은 호위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바, 이미 목숨 반을 내놓고 불철주야로 이설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네가 연이설과 각별히 친했다는 것은 익히 보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발 벗고 나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자신이 비은궁에 발길을 끊은 이후부터 이설에게 들러붙던 구더기들도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황제의 총애가 끝물에 이르니 떨어질 떡고물도 끝났을 거라 여긴 듯했다. 그 와중에 우 미인만은 쌓아 온 의리를 지킬 심산인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우 미인은 숨을 짧게 훅 들이마시며 북받치는 감정을 참았다.

“일전에 저희 부족민이 마마께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라.”

“다친 신첩의 오라비에게 의원을 보내 주시고 곳간에 쌀과 고기를 채워 주셨습니다. 마마가 아니었다면 오라비는 분명 불구가 되고 부족민 절반은 다가오는 겨울 동안 굶어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마저도 신첩은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으니 부디 지금이라도 신첩에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옵소서.”

말을 하면서 감정이 격해진 우 미인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애원했다. 우찬은 미동도 없이 선 채로 바닥에 엎드린 우 미인을 조용히 내려다봤다.

우 미인의 부족은 열두 이민족 중 가장 먼저 금군에 백기를 들고 투항하여 여태껏 작은 분란도 없이 양화성 변방에 숨을 죽이고 살고 있었다. 금의 백성 된 도리로서 납세의 의무를 미룬 적도 없고 고된 나랏일에 사내들이 노역으로 가장 먼저 차출돼도 반기 한 번 든 적이 없었다.

이 눈물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찬이 손해 볼 일 또한 아니었다.

“양화성 부족민들의 금계 제한령을 해제한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우 미인이 우는 얼굴로 크게 기뻐하며 이마를 조아렸다.

“단 네 부족민들에게 일말이라도 역모의 조짐이 보인다면 양화성에 남아 있는 네 부족의 노인과 아이, 여인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저희 부족민에게 사내와 여인은 차이가 없습니다. 말을 탈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다해 마마를 찾을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신첩이 직접 신첩의 사람들을 이끌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자기 부족민들의 금계 제한령을 풀어 달라는 것도 허락을 했는데 직접 이설을 찾아 나서겠다고 하니 말릴 이유가 없었다. 재수가 없어 봐야 우 미인이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런 일이야 우찬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허락한다.”

눈물진 얼굴을 소매로 벅벅 닦아 내며 일어서는 우 미인을 등졌다. 황송하다 거듭 인사를 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태금궁으로 돌아가자 궁 앞마당에 신당 무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익은 늙은 무녀가 아닌 걸 보니 산송장이 드디어 진짜 송장이 되어 땅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우찬이 걸음을 빗겨 무녀에게 다가갔다. 오방색 띠를 허리와 양어깨에 두른 무녀가 나른한 얼굴로 우찬을 응시했다. 우찬이 짧게 한숨을 토해 내며 옆에 서 있던 흑영의 검을 뽑았다.

“약식으로 하지.”

열 살 남짓 무렵 동북 토벌대에 끼어 출정하던 날 아침, 지금은 진짜 송장이 된 무녀가 찾아왔다. 황족이라면 출정 전 으레 해야 하는 의식이라며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칼로 음푹 찔러 피를 내고 그걸 종이에 바르게 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들고 무녀가 괴상한 춤사위로 주위를 맴돌며 지껄이는 동안 한참을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토벌대 원정 중 그날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날이었다.

그때의 출정 제식이 생각난 우찬이 망설임 없이 칼날에 왼손바닥을 그었다. 검날의 길을 따라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우찬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무녀가 들고 있던 종이를 가로채 그 위에 손바닥을 짓이겼다. 붉게 찍힌 핏자국을 확인 후 무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흑영은 깨끗한 천을 우찬의 피 흐르는 손에 쥐여 주었다.

“이만하면 나도 신께 성의를 보인 것 같군.”

“모쪼록 폐하 존체의 상함 없으시기만을 신께 빌겠사옵니다.”

무녀가 합장하여 허리를 꾸벅 숙여 말했다. 우찬은 무녀 옆을 스쳐 지나가려다 말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자기 신장의 반 토막 정도밖에 안 되는 중년의 여인에게 눈을 맞추려 허리를 바짝 내려 숙였다. 우찬을 그리 가까이서 처음 봤을 무녀가 흠칫 놀랐다.

“이 존체는 짐이 어련히 잘 챙길 테니 그대의 치성은 비은궁의 안주인이 무사히 돌아오는 데에나 드리도록 해.”

“신당의 무녀는 오직 금의 흥성과 천자의 성후만을 걱정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우찬이 한 박자 말을 쉬며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천자의 명줄을 쥔 진짜 연이설이 무탈히 돌아오기를 네년의 목숨을 쥐어짜서라도 신께 빌라 이 말이다.”

우찬의 속삭이는 말을 들은 것은 얼굴이 바짝 붙어 있던 무녀와 청각이 유달리 예민한 흑영 둘뿐이었다.

무녀는 마른 침을 삼키고 가까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합장했다. 뻐끔거리는 입술로 ‘천자의 말씀대로 따르겠나이다’ 하고 대답했지만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우찬은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본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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