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13화
“너무 위험합니다. 폐하께서 직접 나서야 하실 만큼 상황이 긴박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차란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우찬을 말렸지만 필사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차피 우찬의 마음을 돌리지는 못할 거라는 걸 내심 아는 눈치였다. 금위대장 역시 방금의 황명에 반박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아 보겠다는 결의로 이를 악물었다.
“네가 생각하는 긴박한 상황이라는 건 대체 뭐냐? 연이설의 팔 한 짝이라도 찢어져야 긴박하다 할 수 있겠느냐? 아니면 가만히 앉아 목이라도 잘리길 기다리란 말이냐?”
“신은 그저 폐하의 안위를 가장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걱정을 그렇게 끔찍하게 한다면 잔말 말고 연이설을 내 눈앞에 데려와. 저딴 쓰레기로 성질 누르는 데도 슬슬 한계가 오는 참이니까.”
문득 왜 요 며칠 장죽을 입에 물고 살았다시피 했는지 알았다. 그게 아니고서는 가슴께에 폭발하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기억나는 한 아주 어렸을 때부터 크게 화가 나 본 적이 없었다. 불같은 성정으로 유명했던 선대 황제들과는 달리 우찬만은 늘 차분하고 냉철했다. 선황도 성정이 꽤 차분한 편이었는데 그래도 해에 서너 번 정도는 대신들 앞에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하지만 우찬은 달랐다. 황자일 때도, 황태제일 때도 그리고 황제가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무심하고 침착했다. 사실 성정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와 아무 상관 없는 것들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에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껏해야 차란과 소운이 관련된 일에 소리를 좀 높인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제 성질에 못 이겨 밤잠을 설치는 축에도 들지 못했다.
매일 하루가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날 호수의 수면 같았다. 어쩌다 한 번 나뭇잎이 멀리서 날아와 떨어지면 잔잔하게 퍼지는 파동이 전부였던 곳에 연이설이라는 돌덩이가 떨어지며 모든 게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연이설을 생각하면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불안과 분노를 누르기 위해 장죽을 폈다. 근데 그것도 이제 효과가 없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내가 없는 동안 봉황의 인장은 태자에게 맡긴다. 비차란 너는 궁에 남아 태자를 보필하고 금위대장은 시간이 없으니 지금 당장 출정 준비를 하라. ……흑영.”
우찬의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시커먼 형체가 뚝 떨어져 금위대장과 차란 사이에 섰다.
“무암궁으로 갈 것이다. 호위군 전원은 은신하지 말고 뒤를 따르라.”
우찬이 빠른 걸음으로 차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흑영이 그랬던 것처럼 시커먼 호위군들이 하나둘 천장에서 떨어지거나 기둥과 벽 그림자에서 뜯겨 나와 우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차례로 열리는 문을 모두 나와 태금궁 밖으로 나왔을 때는 금빛 장포를 걸친 우찬의 뒤로 호위군 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장에라도 나가듯 날 선 눈빛으로 호위군과 걸어가는 황제를 보며 궁인들은 감탄과 경외감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아무런 기별도 받지 못하고 황제를 맞닥뜨린 무암궁의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귀한 첩지만 줬을 뿐 궁에 내팽개치다시피 방치한 이후로 우찬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궁인들은 기쁜 기색보다도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거기다 궁인 하나 없이 흉악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호위군만 잔뜩 대동하고 나타났다. 여차하면 누구 하나 살려서 내보내지 않겠다는 기세가 아니라면 이게 뭐란 말인가.
“귀비 마마께서는 몸이 편찮으셔 자리에 누워 계신 상태이십니다. 의복을 갖춰 입을 동안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개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상궁 하나가 두려움을 무릅쓰고 우찬의 옆을 쫓으며 간곡히 말했다. 우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심지어 들어가신다고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귀비의 침소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셨습니까.”
“…….”
“밖이 소란스러워 오시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상궁의 말과는 달리 의복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귀비가 우찬을 맞았다. 본래도 심히 곱고 예쁜 얼굴은 아니었는데, 이제 보니 그마저도 수척하게 볼이 패여 볼품없어 보였다.
“전원 밖에서 대기하라.”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우찬이 흑영에게 나직이 말했다. 흑영은 자신만이라도 안까지 따라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토 달지 않았다.
오랜만에 온 귀비의 궁은 전보다 살림살이가 많아졌다. 낡은 물건들은 얼마 남지 않고 옻칠이 반질반질하게 되어 있는 새 세간들은 윤이 났다. 침소 안의 것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금수를 놓은 비단 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비싼 장신구들을 보란 듯이 장식대 위에 펼쳐 놓았다.
저것들 대부분이 비은궁으로 들어갔다 이설에게 문전박대를 당해 쫓겨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게 다 연이설의 것이어야 했다.
“앉지 않으시고 서서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
“신첩을 왜 그리 빤히 보시……, 윽!”
사뿐히 걸어 다가오는 귀비의 목을 단번에 잡아 움켜쥐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놀란 귀비가 양손으로 우찬의 손을 붙잡아 밀어 냈지만 한낱 여인에게 당할 힘이 아니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컥컥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지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우찬은 까딱하면 모가지를 부러뜨릴 작정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귀비가 유일하게 이설과 닮은 이 모가지를.
“폐, 크흑, 하아…….”
발끝을 세우고 버둥거리던 귀비는 우찬이 손을 놓자마자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귀비가 암만 괴로워해도 우찬은 사정 봐주는 법 없이 연신 기침을 토하는 뒷덜미의 옷깃을 꽉 잡았다. 뒤로 벌러덩 넘어간 귀비가 우찬에게 붙잡혀 의자 앞까지 질질 끌려갔다.
“하마터면 죽일 뻔했군.”
“……그냥 죽이지, 하아……, 그러셨습니까.”
우찬이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리자 귀비가 바닥에 엎어진 채로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앙칼진 목소리에 독기가 가득 차 있는 게 우스웠다. 정작 목을 졸랐을 때는 숨넘어갈 듯한 소리로 살려 달라 애원했으면서.
“내 손으로 정인을 죽일 만큼 무정하지는 않아.”
헛기침을 몇 번이나 한 뒤에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귀비가 쓰게 웃음을 흘리며 벌어진 앞섬을 추어올렸다.
“엽초의 약효도 이제 별 소용이 없어지셨나 봅니다.”
“알고 있었나?”
“예. 약초라면 가탁희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다 자부하지요.”
가탁희라면 이설이 존경해 마지않는다던 그 신의 말이로군.
우찬은 허구한 날 이설이 옆구리에 끼고 읽고 또 읽던 연생약초도감과 고사독초도감을 기억했다. 가탁희가 집필한 원본 그대로의 서책이라며 어찌나 좋아하던지. 하여간 별 쓸모없는 것들을 귀하게 여겼다. 정작 돈 되는 물건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이설의 생각이 나서 큰일이다. 이럴까 봐 장죽을 물고 지냈던 것인데 이제는 별 도움도 되지 못하고, 벌써부터 짜증이 솟구쳤다. 일의 시초가 된 귀비부터 손을 보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 싶었다.
“그건 인정하지. 독초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우찬의 말을 듣고도 귀비는 크게 당황하는 기색 없이 얕은 숨만 길게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귀비의 바깥출입을 금하였다. 전시 상황이 심각해지며 귀비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귀비가 궁에 유폐되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귀비도 이쯤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우찬을 볼 때면 늘 고분고분하게 내리깔렸던 눈에 깃든 독기만 봐도 그랬다.
“허나 그 일은 다음에 문초하기로 하지.”
“그 일 때문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귀비는 우찬이 당연히 그 일을 문초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을 중독시킨 것쯤이야 당장 죄를 끄집어낼 일도 아니라는 듯 우찬은 가볍게 무시했다.
“강성에서 연이설의 흔적을 찾았다.”
“…….”
“이민족에게 쫓겨 다시 강성 남쪽으로 도망을 치는 중이라 하더군. 들은 바가 있느냐?”
“없습니다.”
귀비가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 칼같이 딱 잘라 대답했다. 굽힐 줄 모르는 눈빛은 여전히 당돌했다.
“폐하께서 얼마 전 궁으로 들어오는 연락책을 모두 끊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하여 신첩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황궁 밖의 이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사실을 당당하게 밝힌 귀비는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꼽거든 당장 목이라도 베라는 식의 허세였다. 실상은 살갗이 칼날에 반만 쓸려도 살려 달라며 울고불고 애원할 게 눈에 선했다.
“일리 있군. 그럼 다른 걸 묻지. ……너희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은 편국이냐, 손조익이냐. 아니면 그 둘 모두인 것이냐?”
우찬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앉은 귀비와 눈을 맞췄다. 귀비는 순간 입을 꽉 다물어 입술을 뭉그러트렸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서 대답을 얻은 우찬은 다시 허리를 세웠다.
“대답은 들은 셈 치지. 연이설의 행방은 정녕 모르는 게 맞느냐?”
“행방은 모르나 그 끝은 알고 있습니다. ……만설지의 위대한 신 호설제의 이름에 먹칠을 한 배신자는 오직 죽음으로만 그 죄를, 큭!”
악의가 선연한 눈동자로 귀비는 잘도 저주스러운 말을 지껄였다. 어지간하면 화를 참으려던 우찬이 다시 손을 뻗어 귀비의 앞섬을 쥐어 당겼다. 손으로 아무것도 지탱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앞으로 끌려온 귀비는 의자 팔걸이에 얼굴을 부딪치고 괴롭게 신음했다.
“설이가 환궁한 뒤 곱게 죽고 싶거든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환, 궁 따위 절대 하지 못할, 겁니다.”
“만일 설이가 환궁하지 못한다면 너희 부족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
우찬이 귀비를 몸 쪽으로 더 바짝 끌어당기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귀비는 팔을 버둥거리다 의자 다리를 겨우 붙잡고 상체를 지탱했다.
“북방의 산천초목을 통째로 불태워서라도 너희를 찾아내 산채로 태워 죽일 것이다. 노인도, 아이도, 여인과 사내도 가리지 않고 이 일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죽여 네놈들의 씨를 말릴 것이야. 이 땅은 물론 만설지 일대까지도 너희가 발붙이고 살 곳이 없게 만들어 주지.”
“…….”
“그러니 하찮은 네 목숨이라도 바쳐 간절히 빌어 보거라. 설이가 무사히 환궁할 수 있도록. 그것 말고는 네 부족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 같으니.”
우찬이 손에 쥐고 있던 귀비의 앞섬을 옆으로 밀쳤다. 힘 빠진 귀비의 몸뚱이가 옆으로 밀려 풀썩 떨어졌다. 귀비는 바들바들 떠는 팔로 간신히 상체를 지탱하고 두 다리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헛헛한 웃음소리가 뒤엉킨 힘없는 목소리가 띄엄띄엄 울렸다.
“그 위대하고 기세 좋다는 금황제께서도 자기 목숨은 퍽 소중하신가 봅니다.”
“…….”
“자기 명줄을 쥐고 쫓기는 사내놈 하나를 찾겠다고 이 소란이라니. 혼자 보기 딱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 명줄이 짧아지는 게 아쉬워 연이설을 찾고 있다, 그 말이냐?”
무시하고 나가려던 우찬이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