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12화
근본도 없는 사내에게서 이설이 강성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궁에서 상소문이 빗발치고 갖은 정보를 담은 서신들이 흘러들어 왔지만 그중 이설에 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내의 말을 들은 뒤 강성으로 수색 병력을 더 보내려고 했지만 그중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가 섞여들었다가는 이설을 다시 코앞에서 놓칠 수 있었다. 믿을 만한 금군이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애초에 규모가 큰 병력이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자기 의지로 도망치고 있는 이설의 계획도 파악을 못 했는데 금군의 탈을 쓴 괴한들이 쫓고 있다 하니 일이 너무 복잡해지고 있다. 이설은 곤경에 빠진 자기 처지를 알고 있기라도 한지 모르겠다. 대체 그 세상 물정 모르는 천치가 사람 많고 복잡하다는 강성에 있으면서도 아직 붙잡히지 않은 건지 그것도 모르겠고.
“비차란은 어디 있지? 어제부터 내내 보이지 않던데.”
혼자 앉아 있던 우찬이 허공에 말하자 문갑 뒤 그림자가 소리 없이 옆으로 떨어져 나와 우찬 옆에 섰다.
“오늘 아침 내각사로 향하는 것까지만 확인됐습니다. 데려올까요?”
“아니, 둬. 육추명이라도 만나러 갔나 보군.”
차란이 일을 알아보고 있는 순서를 가늠하며 우찬은 느릿하게 장죽을 입에 물었다.
일이 바쁜 차란이 퇴궐을 하지 못하는 탓에 상단에서 들여오는 좋은 엽초를 갖다 주지 못하고 있었다. 맛이 좋지 않은 엽초를 사흘 내내 피우니 안 피우니만 못했지만, 이제는 이 행위자체가 습관이 돼 버려 끊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걸 끊었다가는 이 정도나마 추스리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깊게 들이마시는 숨과 함께 텁텁한 연기가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하도 오래 피워 대니 이제는 맛도 잘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폐하. 금위대장 들었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금위대장은 나라 밖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전투 상황을 알렸다. 궁에서는 궁 밖과 전서구로 소식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했지만 물론 예외는 있었다. 요즈음 궁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한시라도 빨리 전해져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여기저기서 전서구들이 날아들어 정신이 없었다.
금위대장이 찾아온 이유는 아마 사방장군의 세 공석에 관한 일 때문일 것이다.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공석이 세 자리나 되는 까닭에 대전에 모인 대신들의 불안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방 장군이 아니더라고 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래도록 공석이었으니 그 불안을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 된다며 차란도 며칠을 지겹게 들들 볶았다.
하여 금위대장과 사마 육추명에게 각 공석에 대한 임명권을 일임했다. 어차피 누가 차지하든 상관없는 자리였다. 필요한 인장일랑 알아서 찍어 가든지 말든지 상관도 하지 않을 생각으로 안으로 들이라 명했다.
“폐하. 방금 전 급히 들어온 소식입니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커다란 덩치가 문 사이를 비집고 뛰다시피 들어왔다. 제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챈 우찬이 자리를 고쳐 앉으며 장죽을 내려놓았다.
“찾았느냐?”
전쟁과 관련하여서는 적군이 황궁 코앞까지 들이닥치지 않은 이상 금위대장이 이리 호들갑을 떨며 들어올 일이 없었다. 이렇게 황망하게 구는 걸 보면 연이설의 일이다.
“찾은 것은 아니오라……,”
“꾸물대지 말고 말하라!”
며칠 내내 궁에 틀어박혀 장죽만 종일 피울 뿐 큰소리 한 번 내는 일 없던 우찬이 고함을 버럭 지르며 말했다. 급히 오는 데에만 정신이 없던 금위대장은 우찬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고민할 새도 없이 들은 그대로를 뱉었다.
“강성 남쪽에서 소의 마마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정확한 것이냐?”
“예. 현재 남쪽 빈민촌에서 정체가 발각되어 이민족들에게 다시 쫓기시는 중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직 확인 중이긴 한데 정체를 숨기고 강성 어느 상인의 가게에 숨어 계셨던 것 같습니다.”
“여태껏 안전히 숨어 지내다 갑자기 정체가 발각되었다고?”
주먹이 탁자를 내치치는 힘에 장죽이 위로 덜거덕 튀어 올랐다 떨어졌다. 여차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금위대장의 멱살이라도 쥐어 잡을 기세로 우찬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받은 정보로는 거기까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마마께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도피 중이신 걸로 보고 있습니다. 사안이 긴박하다 판단하여 수색에 근방 금군 전 병력을 투입하라 명하였습니다.”
속사포처럼 토해지는 금위대장의 보고를 듣자 온몸에 퍼졌던 엽초의 텁텁한 연기가 목을 틀어막은 듯 숨을 옥죄였다. 생각을 정리하려 눈을 감자 시커먼 암흑 위로 도국의 대략적인 지리가 그려졌다.
강성의 남쪽은 지형이 험한 산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몇 개의 산맥을 넘으면 곧바로 금국이다. 두 나라 사이에 낀 거대한 산악 지대는 영토로써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합의하에 어느 쪽의 군사도 두지 않기로 했다.
“강성에서 남쪽이라면 주둔 중인 금군이 없는 곳일 텐데.”
“일부 병력을 급파하여 경비를 강화해 둔 상태였습니다.”
금위대장은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런다고 우찬이 안도할 건 아니었다. 방대한 크기의 산악 지대를 어디로 향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이설을 일부 병력만으로 찾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쫓기기까지 하고 있으니 마음먹고 숨기라도 한다면 낭패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부글부글 끓던 속이 찬 기운에 확 식어 버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가끔씩 이설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빠르게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럴 때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배 속에서부터 끓어올라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겨우 진정하고 이성을 되찾는 건 이설이 놓고 간 편지 말미의 문장 때문이었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겠다는 그 한마디. 믿을 건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금위대장이 미간을 좁힌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찬을 불렀다. 우찬은 또박또박 적혀 있던 문장을 속으로 곱씹은 뒤 냉랭하게 대답했다.
“도국에 전해. 수비 경비를 위한 최소 병력만 유지하고 남은 병력을 모두 강성 남쪽으로 보내라고.”
“이미 요청해 놓은 상태입니다.”
“요청이 아니라 황명이다.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끌었다가는 도국 왕족의 대가 끊기는 수가 있다고, 확실하게 전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밖에 비 승상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벌써 몇 번 기별이 왔습니다만.”
생각이 많아 쓸데없는 잡소리가 머릿속에 들린다 생각했는데 윤 내관의 기별 소리였나 보다. 뒤늦게 들라 대답하자 피곤한 표정의 차란이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표정을 보니, 자기 입으로 이런 말을 전해야 하는 게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폐하 방금 사마 육추명과 얘기를 나누고 오는 길입니다.”
눈을 질끈 감은 차란을 보고 금위대장이 알만하다는 듯 티 안 나게 긴 한숨을 쉬었다. 우찬은 얘기가 늘어지는 걸 원치 않아 말을 끊었다.
“손조익의 사병들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하더냐?”
할 말을 빼앗긴 차란이 한 박자를 쉬었다가 ‘예’ 하고 기운 빠지는 소리로 대답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손조익이라면 사병들을 어떻게 움직일까 생각해 봤지. 편국에 세워 금군을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어. 사병치고는 큰 규모일지 몰라도 편국 전체 병력에 비하면 한 줌 모래알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별 도움도 되지 않을 거다.”
“그럼 폐하께서 내리신 결론은 무엇이십니까?”
“손조익이 지금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아나?”
난데없이 우찬이 엉뚱한 것을 물었다.
“말씀드리기 무척 송구스럽습니다만, 폐하께서 하루빨리 황위에서 물러나시는 것입니다.”
금위대장을 보며 물었지만 정작 대답은 차란이 했다. 금위대장은 정답이 뭔지 알면서도 자기 입으로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로 눈을 깜빡였다.
“손조익은 찾은 거야. 내가 하루라도 더 빨리 황위에서 물러날 수 있는 방법을.”
“귀비가 가짜라는 것은 극비입니다. 손조익이 정말 정인을 해치는 방법으로 폐하의 명을 끊으려 했다면 소의 마마가 아니라 귀비를 노렸을 겁니다.”
금위대장이 우찬의 말에 곧바로 반박하였다. 마치 손조익이 노리는 그것이 단순히 계획에 불과할지라도 절대 사실이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는 것처럼 가차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 옆에 차란이 금위대장을 똑바로 바라보고 고개를 저었다.
“손조익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폐하, 손조익은 이설 님을 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접촉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거절당했습니다.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했을 겁니다.”
“연이설은 황후가 될 생각 따위 없다는 걸 그자도 알게 된 거지. 하지만 그때까지도 손조익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어. 내가 선황의 유지만큼은 절대 깨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잠자코 기다리려고 했겠지.”
선황의 유지. 손조익이 이렇게까지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
“그러다 어느 순간 눈치를 챈 거다. 내가 이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우찬이 조소하며 짓는 표정에 차란이 고개를 돌려 금위대장의 눈치를 살폈다. 금위대장은 우찬이 얘기하는 중간부터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황의 유지는 물론 황제가 이 자리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슬쩍 차란을 쳐다봤지만 차란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그래서 나를 직접 끌어내리기로 한 모양이야. 연이설을 미끼로 삼아서.”
미끼라는 말이 주는 어감이 구역질이 날 만큼 역겨웠다.
늑대나 호랑이같이 크고 포악한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다리에 상처를 낸 토끼를 산에 풀어 둘 때가 있다. 토끼는 절뚝거리는 다리로 산 이곳저곳을 다니며 피 냄새를 흘린다.
오래 지나지 않아 피 냄새를 맡은 굶주린 늑대와 호랑이는 미처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토끼를 향해 돌진한다. 눈앞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먹이에 홀려 다른 곳에 한눈팔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들의 눈에는 활을 든 인간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때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 절대 놓치는 법이 없다.
연이설은 토끼다. 피 냄새를 철철 풍기는 토끼. 황제 금우찬을 잡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미끼.
“……감히 누굴.”
“예?”
우찬이 일어나며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우찬의 말을 놓친 차란이 재차 물었지만 무시하고 금위대장에게 다가갔다.
“각 성문을 지키는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병사를 집결하라. 해가 지면 최대 병력으로 출정한다. 산세가 험한 곳이니 보병대를 전두에, 기병대는 후미에 배치하라. 선두 지휘는 내가 직접 할 것이다.”
“폐하!”
“미끼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못하게 직접 나서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