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06화
애초부터 사내를 산 채로 데려와 직접 심문하겠다 한 첫 번째 이유는 이설의 행방이었다. 사내가 이설과 접촉한 증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그에게 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옥사로 오는 동안 의문이 들었다.
우찬은 창화군을 통해 도국 전역에서 이설을 찾으라고 알렸다. 이설을 찾아 관아로 넘기는 자에게는 분에 넘치는 보상이 뒤따를 것이라는 소문도 널리 알리라고 했다. 세상에 돈 만큼 확실한 대가는 없었다.
그런데도 사내는 이설을 관아로 넘기지 않았다. 대충 넘겨짚어 봐도 돈 냄새 나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것 같은 사내가 이설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뒤 곱게 보내 주었다. 이게 돌아가는 이치상 맞지 않는다.
사내에게는 아마 이설을 관아에 넘기고 얻는 수익에 견줄 만한 다른 돈줄이 있었을 것이다. 월등히 높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진작 그렇게 손을 썼겠지.
사내는 이설과 동행하는 내내 두 가지를 저울질했을 것이다. 그러다 이설에게 속내를 드러냈을 테고, 이설은 사내에게 비가랑 상단을 미끼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난 것 같다. 황제의 후궁이 직접 서신까지 써서 ‘빚을 졌으니 대신 보답을 해 달라’고 청한 데다가 수신처가 비가랑 상단이니 마음이 혹했겠지. 장사하는 놈들 중에 비가랑 상단을 모르는 놈은 없다. 분명 엄청난 금전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국경까지 넘으려고 했을 것이다.
“연이설을 데려가려고 했던 자가 누구였는지 어서 말해.”
검 끝이 사내의 미간에 닿았다. 우찬이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미간 사이로 검이 쑥 박힐 것 같았다.
기실 사내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대강 윤곽은 잡혔다. 황제 금우찬, 그리고 이민족이 아니고서야 눈에 불을 켜고 이설을 찾아다닐 세력이 없었다.
우찬이 알고 싶은 건 왜 아직 그들이 이설을 쫓는지, 이 문제다. 연이설은 금황제의 정인이 아니라고 알려진 이상, 이설을 죽여 봐야 우찬은 아무런 해를 입을 게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자신의 정인인지 아닌지와 별개로 연이설의 존재는 그들에게 특별하다.
“북방의 오랑캐였나?”
“…….”
“아니면 편국의 병사?”
“아니, 아닙니다.”
입도 뻥긋 안 할 것 같던 사내는 검에 머리가 꿰뚫리고 싶지는 않은지 더듬더듬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검에 긁혀 이마에 길게 상처가 났다. 틈새로 스며 나오는 피가 검 날을 타고 흘러 떨어졌다. 사내는 뚝뚝 흐르는 자기 피를 멍하니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금군……, 분명 금군이었습니다.”
음습한 옥사 안에 순간 적막이 흘렀다.
“방금 뭐라 했느냐?”
예상을 크게 빗나간 얼토당토않은 대답을 들은 우찬이 검을 옆으로 확 치워 내렸다 자칫 검에 베일 뻔한 호위군이 옆으로 피하며 사내의 어깨를 놓쳐 사내가 옆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우찬이 검을 고쳐 잡아 사내에게 바짝 다가갔다. 앞섬을 잡아당겨 일으켜 앉히자 사내가 웅얼거렸다. 정신이 이미 반쯤 나간 상태라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형님을 만나기 며칠 전 양화성에서 금군이 수색을 내려왔는데……, 동네 젊은 사람들을 모아다가 수상한 사내를 만나거든 북쪽으로 데려오라고……. 그럼 도, 돈을 어마어마하게 준다고……,”
“금군이 확실했느냐?”
함께 듣던 금위대장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서며 사내를 추궁했다.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군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니 금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형님도 자기를 쫓는 게 이민족일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놈들의 수는.”
“두,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북쪽 어디로 데려오라고 하였지?”
“양화성 북쪽 성문으로 나가서 숲길을 지나 무슨 협곡을 넘으면 부락이 있을 거라고…….”
사내가 기억을 더듬는지 눈동자를 불안하게 움직이다 울먹이기 시작했다.
“위치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금군이 들이닥쳐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이상하여 귀담아듣지 않았는데 정말로 형님이 나타나셔서……. 형님을 그쪽으로 넘길 생각도 사실 전혀 없었습니다. 강성에 도착하는 대로 관아에 알리려고 했는데, ……형님이 하신 제안이 솔깃해서 그만…….”
이설을 관아에 넘겼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사내는 이제 와 과거를 후회했다.
우찬은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사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금위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된 일이지.”
“폐하, 그게…….”
“난 금군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는데.”
옥사에 모인 모두가 우찬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같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동공을 파르르 떨었다. 누구라도 우찬에게 변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무도 나서지는 못했다.
금위대장이 어떻게 해서든 한마디 해 보려던 순간 우찬이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한 번 짧게 저었다. 거슬리는 소리는 지금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잠깐의 고민이 끝난 후 다시 사내를 봤다. 사내는 모두 사실대로 말했으니 이제 자신을 보내 줄 거라 여긴 눈치였다. 힘없는 눈동자에 미약한 생기를 봤다.
왜 저런 헛된 희망을 품지?
우찬은 그 모습을 하찮게 무시하며 금위대장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뻣뻣하게 긴장된 채 서 있는 금위대장은 우찬이 검을 자기 몸 쪽으로 대는 순간까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찬이 검을 검집에 쓱 밀어 넣고 난 뒤 멀어지자 짧게 숨을 토해 냈다.
간신히 안도하는 금위대장에게 우찬이 목소리를 낮췄다.
“연이설은 지금 강성에 있고 아직 신변에 위협을 받고 있어. 나를 피해 도망치는 것도 썩 즐겁지는 않은 모양이고.”
“…….”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싶었던 것들이고 이자에게 내 볼일은 끝났다. 금위대장은 이제부터 볼일이 생긴 것 같군.”
꼿꼿하던 허리를 접으며 대답하는 금위대장을 지나 옥을 나갔다. 윤 내관이 갈아 신을 가죽신을 준비했다며 바닥에 내려놓았지만 무시하고 옥사 밖으로 나갔다. 곧바로 태금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옥사 앞에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뒤따라 나온 윤 내관과 호위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의 뒤에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지만 곧 눈치 좋게 우찬의 시야에서 몸을 감췄다.
이른 밤의 날씨가 선선하다. 더위에 약한 이설과 야행을 나가기 딱 좋은 바람이 불고 있다. 아무리 일 년 사시사철 날이 따뜻한 금국이라 할지라도 이맘때를 넘고 나면 밤공기가 무섭게 차가워진다. 북쪽 땅에서 자란 이설에게는 겨울이라고 하기도 어설픈 추위지만 제 몸 돌볼 줄 모르는 이설이 고뿔 걸리기 딱 좋은 날씨다.
고로 겨울이 오기 전에 반드시 이설을 찾아야 한다.
*
“힘드세요? 좀 천천히 걸을까요?”
“것보다 잠깐 쉬었다 가자. 남문은 생각보다 거리가 멀구나.”
“몸도 참 약하십니다. 저기 그루터기에서 잠깐 쉬면 되겠네요.”
완만한 비탈길을 한참 동안 걸었다. 기진맥진하여 그루터기에 철퍽 주저앉은 이설이 밭은 숨을 연신 마시고 뱉었다. 옆에 앉은 시동이 짐 보따리를 뒤져 수통을 꺼내 주었다. 물을 마시고 난 뒤에도 몸이 축 늘어져 힘이 생기지 않았다.
이른 아침의 고요한 정경이 비탈길 위에 낯선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다. 푸릇한 나무가 우거진 산속,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신 연국과도 달랐고, 뻥 뚫린 하늘 위에 구름 한 점 없이 타오르는 태양 빛이 금가루처럼 지반에 쏟아지는 금국과도 달랐다.
새벽은 이미 지났는데 날은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겼다. 때 묻은 구름이 하늘을 가려 햇빛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비가 올까 걱정하는 이설에게, 시동은 이맘때 강성은 원래 항상 이런 날씨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근데 정말 서신을 전달해 줄 수 있어?”
앉은 뒤에야 겨우 한숨 돌린 이설이 느닷없이 시동을 보며 물었다. 시동은 이설이 남긴 물을 조금 마신 뒤 짐 보따리를 싸고 있다 대답했다.
“돈만 주면 저기 사람들은 뭐든 다 해요.”
“국경은 아무도 못 넘는다던데.”
“사람은 못 넘어도 군수품을 나르는 수레는 넘을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것보다 돈은 넉넉히 챙겨 오셨습니까?”
“응. 이 정도면 충분할까 싶은데.”
이설이 허리춤에 매고 있던 주머니를 풀어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 보여 주었다. 임씨에게 받은 돈과 훔쳐 온 비녀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서신을 전달해 주는 데에 얼마나 큰돈을 치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설은 이 정도면 꽤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설이 허벅지 위에 쏟아 부은 돈과 비녀를 본 시동이 애매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좀 모자랄 것 같은데.”
“그래? ……어떡하지.”
“중요한 서신입니까? 국경이 천년만년 봉쇄되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풀릴 텐데.”
“꼭 오늘 보내야 해.”
이설이 간절한 눈으로 고집을 부리자 시동이 마지못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신을 제때 보내야 하루라도 빨리 우찬을 만날 수 있다. 서신에는 자신이 지금 강성에 있다는 사실과 금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달라는 간청이 적혀 있었다.
오늘 이름을 지우고 며칠 임씨네 댁에서 몸조리를 하고 난 뒤 금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리고 우찬에게 빌어야지. 나를 궁에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간절하게.
“이제 그만 갈까요?”
은근히 이설을 재촉하는 시동을 따라 다시 길을 나섰다. 비탈길을 다 오르고 나니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됐는데 그쯤에서는 남문 빈민가가 내려다보였다. 한눈에 봐도 전체적인 민가 분위기가 허름하고 지저분했는데, 우중충한 날씨 탓에 어딘지 음산해 보이기도 했다. 도망친 죄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는 게 딱 어울릴 만했다.
비탈길을 오르는 시간에 반도 안 되게 도착한 시동이 길목 사이사이를 익숙하게 지나 초가 앞에 멈춰 섰다. 짚으로 얼기설기 지붕을 덮은 집은 주위 모든 집과 마찬가지로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고, 벽면은 다 으스러져 겁이 나 서 있기도 어려웠다. 거기다 민가 초입부터 약초 태우는 냄새와 오물 냄새가 진동하니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코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