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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05)화 (205/300)

달의 황홀경

205화

“폐하 이자가 가지고 있던 물건입니다.”

음습한 공기가 숨통을 타고 내려가 온몸 깊숙이 퍼졌다. 긴 날숨에 다시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더럽고 메스꺼운 기분이 근위대장이 내미는 것과 함께 다시 몸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근위대장이 내미는 것은 손바닥 위에 반으로 접힌 붉은 비단과 구겨진 서신 하나였다. 서신은 챙겨 앞섶에 넣어 두고 비단 한 겹을 들췄다. 그 안에는 한 뼘쯤 될까 싶은 길이의 은사 대여섯 가닥이 놓여 있었다. 비단 천을 조금만 세게 뒤척였어도 금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을 만큼 얇고 가느다란 굵기였다.

그중 한 가닥을 집어 올려 허공에 띄어 보았다. 윤 내관이 그 뒤로 불을 밝히자 은사가 불빛에 반짝였다. 건조한 눈빛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던 우찬이 은사 가닥을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비단을 덮었다.

“일으켜 세워.”

자신이 어디로 끌려왔는지도 몰랐던 사내는 근위대장이 ‘폐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드디어 상황이 파악된 듯 몸을 떨며 뒤로 찔끔찔끔 물러나고 있던 중이었다.

우찬의 말 한마디에 밖에 서 있던 호위군 둘이 들어와 사내를 일으켜 세운 뒤 어깨를 압박하여 벽에 붙였다. 어깨만 고정된 채 진흙 반죽처럼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사내의 앞에 우찬이 가까이 섰다. 여인들의 독한 향냄새와 피비린내에 매캐한 먼지 냄새까지 한데 어우러져 끔찍했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 크흑,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사내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자 기분이 한층 더 안 좋아졌다.

“가지고 온 물건은 어디서 난 것이냐.”

“……흐으, 흐…….”

“그 애를 다치게 하였어?”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니고, ……잠든 사이 제가 몰래 흡, 잘라 낸 것입니다.”

“잠든 사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우찬을 보고 사내는 뭘 잘못 말했는지도 모르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내 정인과,”

우찬이 단어를 짧게 끊으며 눈썹 뼈 위를 문질렀다. 신장 차이도 제법 나거니와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사내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집요하게 사내와 눈을 맞춘 우찬이 눈은 가만히 둔 채 입꼬리만 확 끌어 올렸다.

“동침을, 했어?”

여태껏 낮고 스산하게 울리던 것과 달리 반음 높아진 목소리로 사내에게 반응했다. 턱 양쪽이 딱딱하게 굳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찬은 가느다란 섬광처럼 얇고 긴 철침이 관자놀이를 꿰뚫는 고통을 한껏 느끼며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물은 것에 답해라. 동침하였느냐?”

입꼬리가 더 말려 올라가는 우찬을 보던 사내가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추호도 그런 일은 없었다며 신음 섞인 대답을 반복하는 사내는 몇 대 맞은 뒤 생긴 고통 때문인지는 몰라도 넋이 거의 달아난 듯싶었다.

“며칠 동해, 도…, 동행하던 중에 방을 가, 같이 사용하기는 했지만……,”

방을 같이 사용했다는 대목을 말하며 사내가 우찬을 눈치를 보며 말을 흘렸다. 오른쪽 어깨를 붙잡은 호위군이 계속 답하라며 어깨를 세게 말아 쥐자 얼굴을 찡그리며 쥐어짜 내듯 대답했다.

“도, 동침을 한 일은 절대 없습니다.”

“……”

“맹세코 절대, 절…… 대 기연 형님과는 그런,”

“기연?”

말을 더듬는 사내의 목을 움켜쥐자 고개가 뒤로 회까닥 꺾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는 표정으로 눈썹을 삐뚤게 들어 올리자 사내가 다급하게 설명했다.

“기연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습니다.”

“……기연이라.”

착 감겨들지 않는 낯선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어떤 애먼 놈의 이름을 훔친 거지.

“마마께서 연에서부터 데려오신 호위 무사의 이름이 진기연입니다. 아마 경황이 없으신 와중에 알고 계신 이름을 사용하신 듯합니다.”

잠자코 옆에서 듣던 금위대장이 상체를 가까이 대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대충 생각이 난다. 입궁 초 비은궁에 자주 드나들 때면 눈에 띄던 사내놈 하나가 있었다. 골격이며 체격이며 칼을 쓰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을 하고 담벼락에 붙은 가지를 쳐 내고 있었다.

“자기 이름 밝히기를, 진기연이라 하였느냐?”

“예, 예. 맞습니다.”

사내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난 게 언제지?”

“날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기연 형니……, 아니, 그, 그분을 만나 뵈었을 때는 이미 제가 사는 시골 마을까지 수배지가 파다했을 때였습니다.”

“첫눈에 알아봤나?”

“무엇, 을 말입니까?”

사내는 분명 우찬이 묻는 의미를 알고 있었다. 짧게 끊기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히끅거리는 딸꾹질로 당황한 것이 훤히 드러났다. 우찬은 대답을 듣지 않아도 직감하였으나 성마르지 않게 대답을 재촉했다. 언뜻 들으면 노기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나긋나긋한 말로 조용히 읊조렸다.

“네가 만난 그 사내가 진기연이 아니라는 것을.”

“…….”

“사실 그는 금황제의 후궁이며 나의 하나뿐인 정인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봤느냐?”

안광이 번뜩이는 눈동자가 얼굴을 꿰뚫을 것처럼 사내에게 향했다. 막 울음이 그쳐 가던 사내는 이제 숨을 헐떡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찬은 그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며 별안간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지. 곱게 자란 것들은 밖에 나가서도 티가 나기 마련이니.”

“…….”

“그래서, 즐거워 보이더냐?”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우찬이 한껏 여유 넘치는 말투로 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설은 황궁을 무척 답답해했다. 어차피 연국에서도 평생 궁에 갇혀 살았던 주제에 황궁을 지나치게 못 견뎌 했다. 입궁 초기에는 자신에게 면박을 많이 받기도 했고 후궁들 등쌀에 정붙일 곳이 없어 황궁이 갑갑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설은 늘 황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황궁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던 것인지, 황궁 밖의 다른 세상을 향한 단순한 호기심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했다. 우찬은 이설과 처음 잠행을 나갔던 이후로도 두어 번 더 야행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이설에게는 함께 가자 청하지 않았다. 이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설에게 황궁 밖에도 좋은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결코 알려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큰맘 먹고 달아난 도피가 부디 즐거워야 할 텐데.

우찬이 빙긋 웃으며 사내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닙니다.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우찬이 원하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목소리를 쥐어 짜내어 좀 전보다 커진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항상 걱정이 많은 얼굴이었고 말수도 거의 없었습니다. 또……, 밤에는 늘 악몽을 꾸는지 잠자리도 편치 않아 보였고……, 여튼 즐거워 보이는 기색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

“예, 예!”

“이상하군. 전혀 즐겁지 않다면 대체 소의는 왜 계속해서 달아나고 있는 건지.”

꼭 사내에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양화성에서부터 우찬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설이 계속해서 달아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지. 도피 그 자체가 즐거운 여정도 아니라면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그게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내 우찬의 미소가 사그라졌다. 옥사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차게 식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앞섶에 넣어 둔 서신을 꺼냈다. 무사히 살아 있다는 생존 신고라도 하는 격인지 글로만 흔적을 남기는 이설을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야 할지.

필체는 이설의 것이 맞다. 동그란 모양을 세상 누구보다 반듯하게 그리는 게 분명 이설의 필체였다. 내용은 대충 이설 자신이 사내, 강구하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으니 비가랑 상단은 황궁의 루 소의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 강구하에게 대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우찬보다 앞서 서신의 내용을 확인했던 차란이 당혹스러워했을 만했다.

“네가 이리 글을 쓰라 협박했느냐?”

우찬이 구겨진 종이를 사내의 얼굴 앞에 펄럭이며 흔들어 보였다. 사내는 잇따라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것은 그, 그분께서 자의로 써 주신 것입니다. 저, 저는 그저…… 베푼 도움에 대한 작은 성의 표시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 국경을 넘으려던 것인데…….”

사내는 금국의 국경을 넘은 것이 생에 최대의 실수라도 되는 양 갑자기 통곡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장 목울대를 세게 후려치는 호위군의 주먹에 컥컥거리며 헛구역질하는 소리로 넘어갔다.

국경에서 난동을 부릴 때 사내가 말하기를 이설은 이미 회국으로 향하는 국경을 넘었다고 했단다. 하지만 차란은 이설이 양화성에서부터 도망쳤던 이동 경로가 회국으로 향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았고 금위대장은 이 환란 중에 개인이 국경을 혼자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믿지 않았다.

아까 전 두 사람이 앞다투어 이설은 분명 아직 도국에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으며 우찬은 이설의 허술한 처세에 화가 날 지경이었다. 정말 서신 하나를 덜렁 쥐어 보낸 사내 말을 믿어 의심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이렇게 형편없이 수를 내다보는 실력으로 도대체 어디까지 도망을 갈 셈인 걸까.

“도국 어디였는지 말해.”

“…….”

“소의는 회국으로 가는 국경을 넘지 않았어.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쯤 내 앞에 끌려온 게 네가 아니라 소의였을 테니 다행이었겠지. ……근데 불행히도,”

우찬이 분노를 참아 목 아래로 삼키며 고개를 뒤로 살짝 젖혔다 세웠다. 느리게 감았다 뜬 눈에 여태 없던 살기가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연이설은 아직 도국에 있다.”

“…….”

“어디지? 네가 연이설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

“가, 강성입니다. 강성에 무슨 고개라고 했는데 그게……,”

사내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마음과는 달리 생각이 나지 않는지 초조하게 어깨를 떨다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강성에서 제일 크게 목화솜 이불 가게를 하는 집이었습니다. 분명 그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까지밖에 모릅니다. 애초에 강성까지 동행하기로 한 것도 그 집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사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런 부류의 경우 사실 대로만 말한다면 목숨만은 건질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찮은 자기 목숨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며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한없이 가벼운 입만 나불거리는 한심한 족속들.

우찬은 사내에게 향하는 경멸과 분노를 갈무리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얼굴 위에 드러냈다. 사내는 우찬이 그런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줄 알고 필사적으로 자기 결백을 애걸복걸했다.

“한 가지 더. 제일 중요한 질문이 남았는데.”

우찬이 몸을 반 바퀴 돌려 금위대장이 들고 있던 검집에서 검을 천천히 뽑았다. 검집에서 검이 긁히며 빠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긁었다.

우찬이 꺼내 든 검 날을 반대 손으로 쓸어내리자 사내가 정신없이 머리를 털며 겁을 내다가 결국 가랑이 사이로 지린내 나는 오줌을 콸콸 쏟았다. 호위군 중 한 명이 복면 사이 눈을 찡그리며 어깨를 더 세게 밀었다.

우찬이 검 끝을 사내의 미간 사이로 겨누었다.

“연이설을 곧바로 관아에 신고하지 않은 건 그에 따른 포상보다 더 값을 쳐주는 제안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러니 말해 봐라.”

“…….”

“누가 지금 연이설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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