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03)화 (203/300)

달의 황홀경

203화

“신 비차란 폐하께서 오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신 모습을 뵈오니 이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태금궁 안에서 뛰쳐나온 차란이 발치에 엎드리며 말했다.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개무량한 얼굴은 거짓이 아니었다. 우찬이 은밀히 궁을 떠난 뒤 생긴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책임감을 이제야 덜어 낼 수 있어 안심한 얼굴이었다.

우찬은 발치에 차란을 돌아 지나쳐 궁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는 무겁고 만사가 예민해져 차란과 말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찬이 지나는 길마다 궁인들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유난스럽게 예를 갖췄다.

떠날 때는 어두운 새벽 침전의 창과 궁의 담을 넘어 아무도 모르게 궁을 빠져나왔건만 입궁하는 길은 하도 요란하고 떠들썩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된 것 같았다.

몸이 안 좋아 태금궁에서 꼼짝 않고 정양 중이라는 황제가 갑자기 편국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빠르게 궁까지 전해졌다. 애초에 황제가 몸이 안 좋다는 소문을 믿지도 않았던 대신들이지만 그렇다고 편국에 가 있는 줄은 몰랐던지라 모두들 질겁하며 황궁으로 모였다.

“이대로 편국과 척을 지게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

“편국이라 하면 유일하게 저희 금에 준하는 군사력을 갖춘 나라가 아닙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전쟁의 피해가 더 크지는 않을까 신도 무척 걱정이 됩니다. 폐하께서만 허락해 주신다면 신이 편국의 왕일 다시 만나,”

“그럴 필요 없다.”

“…….”

“편국과는 더 이상 교섭하지 않겠다.”

침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우찬이 몸을 휙 돌려세웠다. 뒤를 바짝 붙어 쫓아가던 차란은 우찬과 몸이 부딪히고 머리를 조아렸다.

침전에 들어서자 궁녀들이 의복을 벗기로 후다닥 들어왔으나 모두 돌려보냈다. 궁녀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차란이 알아서 눈치껏 들어왔다.

“어떻게 아셨는지 태자 전하께서 폐하의 부재를 일찍이 알고 계셨습니다. 내내 걱정을 하셨는데 아니 찾아뵙사옵니까?”

“태자가 나를?”

우찬이 코웃음을 치자 차란이 이유를 알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근래에 태자가 우찬에게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궁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태자는 우찬이 새 여인을 정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이설을 쫓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태자는 우찬에게 등 돌렸고 우찬은 태자가 관심 밖이라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태자가 걱정했던 것은 자신이 데려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설이다.

“일단 별일이 없었으니 말씀드립니다만, 부재중이시던 동안 전하께서 무암궁에 찾아가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다행히 그 귀비가,”

차란이 께름칙한 얼굴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귀비께서 몸이 안 좋다 적당히 둘러대어 만나시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별일 없는 건 됐으니 별일인 것부터 듣지. ……손조익이 편국으로 사병을 움직였다고?”

원래 계획은 도국에 머물며 직접 이설을 찾을 생각이었다. 국경이 모두 봉쇄된 상황에서 이설은 분명 도국 안에 고립되었을 거다. 이설을 찾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였다.

슬슬 양화성을 떠날 채비를 하려던 차에 차란으로부터 긴급한 서신이 도착했다. 손조익이 사병을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태자와 우찬이 서로 반목한다는 소문이 슬슬 퍼지기 시작할 때쯤이었으니 예상은 했지만 시기가 너무 안 좋았다. 이렇게 된 이상 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침 국경을 넘기 직전에 편국의 소식까지 전해 들어 사마 육추명을 대신해 편국 왕까지 만나고 왔다. 소득 없는 긴 여정이 온갖 이유로 짜증스러워 화풀이 겸 덜떨어진 왕과 그의 건방진 승상의 목을 벨까 하다 관뒀다. 일단 이설을 찾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이민족보다는 편국과 손을 잡기로 한 모양입니다.”

“편국이 이민족들의 반역을 도왔어. 엄밀히 말하면 두 손을 모두 잡은 셈이야.”

“일이 더 귀찮아진 걸까요?”

“아니. 이 정도 명분은 되어야 나도 황후를 뵐 면목이 있으니 됐다. 손조익은 이제 법도대로 처리해도 좋아.”

“대체 무슨 유지를 이어받으셨기에…….”

차란의 혼잣말이, 이제쯤 알려 주실 때도 됐지 않았느냐 하는 의중을 담고 있었지만 우찬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귀비는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

“낮에는 궁 앞에서 구휼미를 나눠 주고 오후에는 궁 여기저기에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수상한 자가 접근하는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일부러 귀비를 사람들 앞에 나서게 했다. 신변을 지키기 위한 경비를 엄중히 한 것도 아닌데 여태껏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보면 이 여인이 자신의 정인이라는 사실은 이민족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닌 게 분명하다.

금황제의 정인이 아니어도 연이설은 그 자체로 해칠 의미가 있든가, 적어도 귀비 또한 자신의 정인이 아니라는 걸 그들 역시 알고 있든가.

하나 정도는 지금 확인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선방(御膳房:황제의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에 주방 상궁을 데려와라.”

“예? 어선방 상궁을 말입니까?”

느닷없이 어선방 상궁을 데려오라는 말에 차란이 어리둥절 되물었다가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명대로 하겠다며 침소를 나갔다. 차란이 나가고 나자 밀려오는 고요함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며칠 전 궁을 떠날 때는 홀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모습만 생각하며 밤낮으로 달려 도착한 양화성에 연이설은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도, 참을 수 없는 배신감도, 도망친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함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걱정이 그 자리를 채워 커져 갔다. 살며 단 한 번도 초조하다는 기분을 이리 생경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언제나 남의 얘기였다.

소운이 말도 없이 사라진 여러 날 동안 차란이 넋을 놓은 채 지내던 것을 조롱하고 비난하지 말았어야 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던 그 시절의 차란에게, 아주 조금씩 공감이 되기 시작했다.

아직 목숨을 위협받는 줄도 모르고 도국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이설만 생각하면 숨이 막히고 가슴 언저리가 뜨거워졌다. 대상 없는 분노는 이제 북방 이민족을 넘어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폐하, 어선방 주방 상궁입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들라 해라.”

무사히 돌아온 우찬을 보고 크게 반가워했던 윤 내관이 기별을 알렸다. 우찬의 대답에 안으로 들어서는 주방 상궁은 난생처음 황제의 부름을 받은 것에 무척 겁이 난 눈치였다.

“내 수라상에 음식은 모두 자네의 손을 거쳐 올라오는가?”

“예 그렇습니다.”

“소엽을 올린 것도 자네인가?”

“예 올봄부터 소인이 감별 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소엽을 올리기로 하였느냐?”

“사, 사주라니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매 해 봄이 되면 어선방에서는 새로 돋아난 여러 나물을 수라상에 올립니다. 그중 폐하께서 가장 손이 많이 가셨던 것들을 추려 제철 내내 준비하는 것뿐입니다.”

“내 수라상에 소엽이 올라온다는 건 어선방 궁인들 외에 또 누가 알지?”

“기미 상궁을 포함한 태금궁의 몇몇 궁인들뿐이옵니다. 그리고 폐하와 함께 수라상을 드셨던 태자 전하와 루, 루소의 마마 정도…….”

이런 것까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기색으로 주방 상궁이 대답했다. 우찬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푸짐한 상을 준비하고 있다 급히 불려왔는지 행주치마를 걸친 몸뚱이가 벌벌 떨렸다.

우찬은 발아래 머리를 조아린 나이든 여인의 정수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 주방 상궁이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보름에 한 번씩 어선방으로 소엽을 관납하는 행상인이 있습니다.”

“어선방 식재료는 모두 비가랑 상단에서 준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체로는 그렇습니다만 몇몇 재료들은 다른 행상을 통해 소량씩 들여오기도 합니다. 그 행상인이라면 적어도 폐하께서 소엽을 즐겨 드시는 걸 알고 있을 겁니다. 벌써 몇 달째 주기적으로 받고 있으니까요.”

외부에서 사람을 어떻게 끌어들여 만나나 했더니 어선방에 식재료를 대주는 행상인이라면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주 입궁을 하다 보니 문지기들과 친해지며 신분 확인이 슬슬 소홀해지기도 했을 것이고, 가지고 들어오는 수레에 사람 한두 명 정도 숨기는 건 일도 아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발견했다. 다만 이제 와서 문제를 바로잡기에는 조금 늦은 감이 있을 뿐.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구는 주방 상궁을 나가라 명한 뒤 차란을 기다렸으나 곧바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찬은 혼자 있는 동안 앞섬에 넣어 두었던 이설의 편지를 꺼내 펼쳤다. 발견한 이후로 한시도 품에서 떠나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하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여 꺼내 본 탓에 접힌 부분이 너덜너덜해져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허구한 날 쪼그려 앉아 풀떼기만 관찰하고 약초에 관한 서책만 들여다보더니 제법 기특한 짓을 했다. 이설이 일러주지 않았다면 즐겨 먹는 나물 반찬이 특정한 향초를 만나면 중독 증상을 일으킨다는 기발한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 이설이 어째서 무암궁 침소를 가득 메운 향초 냄새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설 덕분에 귀비가 황궁 밖과 내통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귀비와 함께 있으면 노곤한 몸이 깊은 숙면에 취할 수 있다는 불쾌한 안정감을 드디어 부정할 수 있게 되었다. 오직 이설만이 자신을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이 우찬을 위로했다.

그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곧 윤 내관의 기별도 없이 차란이 직접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왔다.

“폐하, 급히 알려 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옵소서.”

뛰어 들어오다시피 하며 말을 전하는 차란 뒤로 금위대장이 쫓아 들어왔다. 그 뒤로 금군 여럿이 따라 들어왔다가 윤 내관 눈치에 모두 나갔다.

“주방 상궁과 나누셨던 얘기는 추후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금위대장 말씀 올리시지요.”

우찬이 꼭 그래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차란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며 금위대장에게 할 말을 넘겼다. 금위대장은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아직 숨을 헐떡이며 숨을 고른 뒤 말했다.

“오늘 아침 동북 지방 군사 경계 지역에서 웬 행상인 사내 하나가 국경을 넘겠다며 소동을 부렸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그 사내가 루 소의 마마의 행적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별 관심 없이 듣던 우찬이 고개를 슬쩍 치켜 올려 금위대장을 봤다. 일단 이설의 이름이 나왔으니 신경 정도는 써 보겠다는 의미였지만 사실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도국에 있는 동안에도 이설을 봤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모두 대가로 약조된 대금을 노리는 거짓이거나 허풍에 지나지 않았다. 우찬은 그런 작자들에게 자비 없는 단죄를 내렸는데, 이틀 뒤 이설을 봤다는 제보는 반의반으로 줄어들었다.

“경비대들도 처음에는 믿지 않고 돌려보내려고 했는데 마마의 서신을 갖고 있더랍니다. 당연히 위조일 거라고 의심을 했는데 서신과 함께 은빛 머리카락이…….”

우찬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과 동시에 금위대장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며칠 동안 봐 봤던 것 중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얼굴로 우찬이 금위대장을 노려봤다.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궁으로 압송 중인데 곧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이설의 행적은 알아냈느냐?”

“비가랑 상단에서 약속된 대금을 받기 전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모양입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비가랑 상단 얘기에 차란이 곤란한 듯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마마께서 수중에 한 푼 없으시다 보니 저희 상단을 팔아 외상값을 치르셨나 봅니다. 수완이 좋으시다고 해야 할지 원…….”

“숨이 붙은 채로 내 앞에 데려와라. 문초는 내가 직접 하겠다.”

“지금 대전에서 온 대신들이 모여 전시 상황에 대한 논의 중에 있습니다. 사 장군을 제외한 무신들까지 모두 모여 폐하를 기다리고 있으니 문초는 신에게 맡기시지요.”

“연이설을 직접 만났던 자다. 문초는,”

차란 쪽으로 몸을 기울인 우찬이 차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들뜬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직접 할 것이다.”

“…….”

“비차란 너는 대전으로 가서 나의 뜻을 전하라. 누구든 금을 위협하는 자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금은 지금부터 누구와도 교섭하지 않는다. 북방은 물론 지도 위에 편국까지 모두 남김없이 쓸어 버릴 테니 전군은 무력대응에 철저히 준비하라.”

‘존명’을 외치며 힘없이 걸어 나가는 차란을 확인 후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이설의 편지를 접어 품에 넣었다. 하도 읽어 이제는 외우다시피 한 글의 마지막 문장이 이설의 목소리로 귓가를 맴돈다.

이설의 기이한 행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직까지는 이설을 믿는다. 돌아오겠다는 그 말을, 우찬은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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