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01화
임씨네 집 한편에 짐을 푼 지 이틀이 지났다. 도착한 첫날 진수성찬을 대접받고 일찍 잠이 든 뒤,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나 집을 둘러봤다.
쬐끄만 가게 하나 차려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다던 임씨 말과는 달리 가게 겸 거처는 무척 크고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문전성시를 이뤘다. 군손님 주제에 놀고먹기만 하는 것도 눈치가 보여 짐 나르는 일이라도 도와주려 했지만, 임씨가 경을 치며 거절하는 바람에 종일 쭈뼛쭈뼛 손님들 사이를 서성였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임씨가 이설을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거서 뭐 해? 추운데 들어가 있지 않고.”
“그냥 좀 답답해서요.”
“그럼 저기 아래에 장 서는 데라도 가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고.”
답답하다는 듯 다가오는 임씨에게 이설은 어설프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도국에서 가장 크게 장이 들어서는 저잣거리라 하니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럴 처지도 아니고 정신도 없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사정 있는 얼굴로 이설이 웃기만 하자 임씨가 알 만하다는 듯 혀를 찼다.
“너 돈 한 푼 없지?”
“예?”
“하기야 돈 없이 장 서는 데 가서 뭐 하냐. 옛다, 이거 가져가서 뭐라도 하나 물고 구경 다녀.”
멱살을 당겨 잡은 임씨가 앞섬으로 돈주머니를 쑥 찔러 넣어주었다. 당황한 이설이 주머니를 도로 빼려고 했지만 임씨가 워낙 막무가내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기방이라도 데려가 줄까 했는데, 영 시간이 안 나. 이 장사는 이맘때가 제일 바쁘거든.”
“괜찮습니다. 돈은 정말, 정말 필요 없습니다.”
“혹시라도 혼자 기방에 가게 되거든 당암 고개 임씨 소개로 왔다고 하면 돼. 아주 기가 막히게 잘해 줄 거여.”
임씨는 이설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낄낄거리며 멀리 사라졌다. 겨울을 준비하는 손님이 한창 몰리는 시기에 양씨까지 자리를 비워 임씨는 매일 바빴다. 어제오늘 잠깐씩 마주쳐도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어 몇 마디 주고받기만 하다 이렇게 되기 일쑤였다. 남문의 빈민촌은 언제쯤에나 갈 수 있는지 묻고 싶은데 매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저잣거리에 나가신다고 가마꾼을 불러드리라던데, 지금 부를까요?”
임씨가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설의 시중을 도맡아 하는 시동이 종종 뛰어와 물었다. 앳된 얼굴에 키만 훌쩍 큰 아이는 흡사 유강이를 닮은 듯했지만, 그보다는 더 어른스럽고 말수가 적었다.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궁에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은 뒷전으로 밀어 놓을 때가 많다. 다들 잘 있겠지, 위안하는 동시에 그러기를 간절히 바랐다. 우찬은 현명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황제다. 이설이 달아난 이유와 책임을 비은궁 궁인들에게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시동 사내아이가 딱 잘라 대답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며 하는 대답이 농담 같지가 않아 이설이 별수 없이 가마꾼을 불러 달라 청했다.
혼자 가는 줄 알았는데 가마 옆을 졸졸 따라오는 시동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제법 돌아다니다 보니 같이 온 게 잘한 일인 듯했다.
도국은 연국이나 금국과는 또 달라 하면 안 되는 것투성이었다. 물건을 받기 전 값을 치르려는 이설을 보고 시동이 만류하며, 이 동네에서는 반드시 물건을 받아 확인 후 돈을 내야 하는 거라고 알려 주었다.
본래 살았던 곳들과 달라도 이리 다른가 싶었던 것은, 길을 걷던 중 여인들이 자연스레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이었다. 어디에 사냐는 둥, 이름이 뭐냐는 둥 잡다한 것을 물었다. 처음에는 기방의 기녀들이 호객 행위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시동 말로는 다들 버젓한 반가의 여식이란다. 시동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이설을 유난스럽게 여겼다.
“도련님은 얼굴이 고와 어디서든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데 뭘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별로 그렇지는…….”
“강성에서 그런 얼굴로 다니시려면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그런 얼굴이라는 게 어떤 얼굴인가?”
이설은 자기 얼굴에 대해 특별한 감상이랄 게 없었다. 사내치고 선이 고운 편이라는 것 말고는 길가에 흔한 사내들과 다를 바 없는데도 다들 이설을 보면 얼굴을 가지고 한마디씩 했다. 좋은 의미일 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눈치 깨나 없는 이설도 알 만한 조롱이었다.
그런 일을 자주 겪다 보니 이제는 남이 보는 제 얼굴이 자신이 볼 때와 다른가 하는 의문도 들기 시작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얼굴이라는 건 말 그대로 도련님 같은 얼굴인 거죠.”
시동 아이가 흘끗 이설을 쳐다보고는 여상히 대답했다. 제대로 된 의미를 캐물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 더는 묻지 않았다.
이설은 먼젓번 지나쳤던 가게에서 나무 꼬챙이에 끼어 팔던 떡을 오물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란히 걷는 시동이 유독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그러려니 싶었다.
좀 더 걷다 보니 종국에는 사내들까지 쫓아와 이설에게 이름을 묻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어느 기방에서 나왔느냐 물으며 시시덕거리는 무뢰배들까지 들러붙었다. 보다 못한 시동이 쓰개치마라도 사러 가자고 말한 걸 기겁을 하고 말렸다. 대신 근처에서 털모자를 머리에 덮어 썼다.
한결 나아진 상태로 허기를 채울 주막을 찾았다. 자리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탓에 비슷한 또래의 사내가 이미 앉아 있는 맞은편에 시동과 앉아야 했다.
“도국인이 아니신가?”
고개를 상에 처박고 뜨거운 국수를 후루룩 먹던 사내가 치켜뜬 눈으로 이설을 보며 대뜸 물었다.
“예 며칠 전에 국경을 넘어 왔습니다.”
“요즘 국경 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던데 운 참 좋아. 난 고향 집도 못 돌아가고 며칠째 여기 처박혀 있는데.”
사내가 대접을 들어 고기 육수를 후루룩 마신 뒤 던지듯 내려놓으며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했다. 대접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훤히 보이는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익숙했다. 그 이유를 알아챈 순간 이설이 방긋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연국에서 오셨군요?”
“용케 알아보네? 여기 사람들은 잘 구별 못 하던데.”
반가운 마음에 말이 먼저 불쑥 튀어나온 이설을 사내가 경계하듯 봤다. 괜히 아는 척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올 때쯤 옆에 뚱하니 앉아있던 시동이 말을 툭 뱉었다.
“엽초 냄새가 진동을 하니까요.”
시동이 턱짓으로 사내 옆에 봇짐을 가리켰다. 그 말을 들은 뒤에야 흐릿한 엽초 냄새가 느껴졌다. 연국에서 나는 엽초가 특산품으로 도국에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내는 시동의 말을 듣고서야 어린놈이 제법 똑똑하다며 멋쩍게 목 뒤를 벅벅 긁었다.
“연국으로 가는 국경은 아직도 모두 봉쇄되었습니까?”
“거의 그렇다고 봐야지. 이제는 군병이 아니고서는 넘기 힘들다고 하던데.”
“도국에 오신 건 언제입니까?”
“몰라 한 열흘 좀 안 됐지 싶어. 헌데 그건 왜 물어?”
“……가족이 연국에 살고 있는데 소식을 듣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혹시 아시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여기서는 연국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아서…….”
연초 따위를 파는 행상인이 연국 왕족의 소식까지 알 리가 있겠냐마는. 여기 와서 처음 만난 연국 사람이 전할 소식은 뭐라도 중요했다.
가족이 연국에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사내는 이설이 연국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이설을 보며 대답했다.
“요즘만큼 연국이 어수선할 때가 없었지. 금군이 온 산을 메운 것도 모자라 궁내 사정도 별로 좋지 않고.”
“궁내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자세히는 몰라. 듣자 하니 온갖 귀하고 좋은 약초는 전부 궁으로 들어가고 있다 하니 누가 크게 아픈가 보다 하는 거지.”
사내는 누가 크게 아프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는 듯 심드렁히 대답했다. 한 상에 앉아 있는 세 사람 중 이설만 그 대답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습격을 당한 이후 이민족에 대비하여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금군을 집결한 건지 아니면 이설이 달아난 뒤 연국에 책임을 묻기 위한 압박인지 지금으로써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약초들이 계속해서 궁으로 진상됐다는 것 역시 아직까지 아바마마께서 명을 달리 하신 건 아니라는 얘기다. 일단은 이 정도면 됐다.
“하기야 요즘 금에서 군사 안 보낸 나라가 어디 있겠어.”
혼자 술잔을 채우며 사내가 한탄스레 투덜거렸다.
“그나마 금군이라도 움직이니 이민족들도 슬슬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잖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최근 사나흘 간은 이민족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별 관심 없이 반응한 이설은 이제 막 나온 국수 그릇을 앞으로 당겨 젓가락을 들었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지만 계속 기운이 없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인 것 같아 억지로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근데 뭐 이제는 늦었지. 금황제가 이번에는 아주 칼을 제대로 뽑아 들었더라고.”
돌연 우찬의 얘기를 꺼낸 사내가 실실 웃음을 흘렸다. 이설은 막 들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내는 이설이 묻지 않아도 얘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역모에 가담한 이민족은 전부 흔적도 없이 쓸어 버리겠다고 공언을 했다더라고. 선대에서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토벌 전쟁을 자기 손으로 끝내 버린다나 어쩐다나. 하여간 아직까지 제 버릇 남 못 주고 약탈이나 일삼는 오랑캐들을 토벌해 준다는데 나 같은 사람이야 손해 볼 거 있나. 그러려니 하는 거지.”
“그런 것치고는 고향 집으로 못 돌아간다 불만이지 않으셨습니까?”
뒤늦게 나온 국수 그릇을 당기며 시동이 무심히 뱉어 물었다. 그러자 사내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 대뜸 ‘아, 그거는!’ 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오랑캐 사냥이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니 그러지. 듣자 하니 금황제의 후궁 하나가 황제의 이름을 훔쳐 달아났다 하더라고.”
“그 후궁, 댁네 나라에서 보낸 왕족 아닙니까?”
“혼례 치렀으면 이제 그 나라 사람이지. 연국이랑 인연 끊은 지 오래야 그 왕자는.”
짧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하니 아까 먹었던 떡이 도로 올라올 것 같다. 헛구역질을 하는 이설에게 시동이 물 잔을 쓱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