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9화
구하는 걸어서 가기에는 멀다 했지만 골목길을 빠져나와 얼마 안 있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북적거리는 길을 지날 때마다 이설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구하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다.
두어 번 구하가 마차를 멈추고 길 가던 행인에게 당암 고개로 가는 길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이설은 그사이 누가 자신을 잡아가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괜한 걱정에 마차 한쪽을 손으로 꽉 쥐어 잡았다.
“다 온 것 같은데?”
한창 붐비는 거리를 지나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자 주위가 부쩍 한산해졌다. 조금 낡긴 했어도 대문 크기부터 남다른 가게 한 채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찾는 곳이 맞는지 물어볼 것도 없이 대문 안에서 사람들이 등에 커다란 목화솜 포단을 한 짐씩 이고 나왔다.
“뭐해, 안 내리고? 이제 와 짐꾼 노릇이라도 해 주길 기다리는 건 아니지?”
비웃듯 빈정거리는 구하의 말을 무시하고 이설이 마차 아래로 뛰어내렸다. 진작 챙겨 둔 봇짐은 등에 멘 하나로 충분했다.
“근데 말이야 형님. 형님은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안으로 들어서기 전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이설을 보고 구하가 뜬금없는 생색을 냈다. 이설은 대꾸도 안 했지만 구하는 이설이 제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밤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참았으니 형님이 지금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한 번에 자빠트려서 진정한 사내가 뭔지 알려 줬을 텐데.”
“…….”
“뭐, 지금이라도 궁금하면 알려 줄 수 있고. 난 진짜 형님 볼 때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게 정신을 못 차리겠거든. 형님도 아래가 허전해진 지 꽤 오래…….”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구하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분명한 조롱을 담아 언젠가 또 볼 일이 있으면 그때 보자며 작별 인사를 했다. 아마 마음에도 없는 말일 것이다.
혹여 다음에 두 사람이 또 보는 날이 있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도망치는 신세가 아닐 거고 구하도 자신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설은 더러운 모멸감을 위로했다. 정말이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을 악연이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젊은 사내가 쪼르르 달려와 살갑게 인사를 했다. 어떤 종류와 크기의 포단을 찾으시냐며 넉살 좋게 말을 건네기에 양씨나 임씨를 찾는다 했더니 퉁명스레 바뀐 태도로 ‘그건 왜요?’ 하고 되물었다.
“제가 예전에 신세 진 게 있어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볼일이 있으면 여기로 찾아오라고 하셨었는데, 계십니까?”
“작은 주인어른만 계시긴 한데…….”
“잠깐 뵐 수 있겠습니까? 제 이름은 진기연입니다.”
이설의 어딘가가 의심스럽기라도 한지 사내가 꽤 오래 고민을 하다 여기서 기다리라며 이설을 덩그러니 내버려 두고 사라졌다. 이설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장사판이 벌어진 앞마당 한복판에 한참을 멀뚱히 서 있었다.
괜히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아닌지 약간의 후회가 밀려올 무렵 멀리서 낯익은 사내가 허겁지겁 달려오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가까워진 사내가 임씨라는 걸 인지한 순간 서로 몸이 부딪히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너 임마!”
임씨가 자신을 꽉 끌어안고 몸을 흔들어 대는 통에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임씨는 뭐가 그리 반가운지 걸걸한 목소리와 온갖 험악한 말들로 이설을 반겼다. 난폭하긴 하지만 임씨 나름대로 표현하는 환대에 마음을 놓은 이설은 몸을 놓아줄 때까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아니 근데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는 왜 인사가 없어?”
끼어들 틈도 없이 할 말만 와다다다 쏟아 내던 임씨가 그제야 이설을 놓아주며 소리를 질렀다.
“안녕하셨어요. 그동안 무탈하셨지요, 아저씨?”
“무탈하다마다! 내가 진짜 너 때문에 아주……!”
이를 악문 임씨가 몸을 가까이 붙이며 잇새로 참기 힘든 듯 말을 흘려보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주변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다. 재빨리 눈을 굴려 주위에 사람이 많다는 걸 확인하고는 일단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이설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 있던 곳에서 안쪽으로 한참 들어가 구석진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임씨가 이설을 한 번 더 부둥켜안았다. 호리호리한 몸을 또 휘청거리는 이설에게 임씨는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며 쓴소리로 걱정을 한 뒤 자리에 앉혔다.
“내가 너한테 물어볼 게 아주 많은데 일단, 그때 양화성은 잘 들어갔고?”
“예.”
잘 들어갔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별문제가 없었으니 그런 셈이었다.
이설이 대답한 것과 동시에 나이 든 여종이 다과상을 내어 왔다. 단맛이 나는 주전부리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오랜만에 제대로 만든 먹을거리를 보니 조금 군침이 돌았다. 사람은 뼈가 빠지게 고생을 하면 입맛도 뚝 떨어진다는데 이 와중에 저게 먹고 싶은 걸 보니 아직 고생을 덜 했나 싶다.
임씨가 접시를 밀며 권하기에 조금씩 맛을 봤다. 그동안 임씨는 안부나 여기까지 오는 여정 등 대답하기 어렵지 않은 것들을 물었고 이설은 적당한 거짓말을 섞어 모나지 않은 선에서 무난하게 답했다.
그럭저럭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물으며 대화가 무르익어 가기가 한참. 임씨가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꺼내기 힘든 얘기를 하기 전 사람들이 으레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아는 이설은 슬그머니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저씨? 아니면 저한테 할 말이라도.”
“문제는 딱히 아니고. 거, 너 말이다, 기연아. 나랑 양씨랑 좀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게 좀…….”
여차하면 여기서 관아에 끌려가기라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도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그게 이곳일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 것이었는데 또 뭔가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임씨가 혹여 뒷일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겁이 덜컥 났다.
그러고 보니 방에 들어오기 전 이 앞에 이설을 세워 두고 임씨가 잠깐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그사이 아랫사람들을 시켜 관아에서 사람을 불러오기라도 했다면……?
“네가 준 비녀 말이다.”
“예?”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은 임씨가 상체를 숙여 이설에게 가까이 갖다 대며 목소리를 확 낮췄다. 임씨가 가까이 오자 반사적으로 자기 몸을 뒤로 확 빼고 멀리 떨어뜨리고 이설이 입을 벙긋 벌렸다.
“훔친 거 맞지?”
“…….”
“바른대로 말해. 우리가 뭐 이거 가지고 관아에 너를 잡아 바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그래 궁금해서.”
목소리는 작아졌지만 걸걸한 쇳소리 그대로, 임씨가 달래듯 물었다. 긴장이 탁 풀린 이설은 바짝 힘을 주고 있던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지며 몸이 의자 아래로 꺼졌다. 맥없이 풀어지는 얼굴 근육은 웃는 듯 우는 듯 이상한 표정을 만들었다. 매번 누가 이런 소리를 꺼낼 때마다 가슴이 쪼그라졌다 펴지기를 반복하니 오래 살기는 글렀구나 싶다.
“강성에 오자마자 그 비녀 팔겠다고 안 돌아다녀 본 곳이 없어. 근데 아무도 안 사겠대.”
“그럴 리가요. 그렇게 싸구려 비녀는 아닐 텐데.”
“어휴, 이 반푼이 생각하는 거 하고는.”
임씨가 말아 쥔 주먹으로 이설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았다. 갖다 댄 주먹으로 슬쩍 밀었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생전 처음 이런 취급을 당해 본 이설은 이게 나름대로의 충격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돈을 주고 사고팔 수준의 물건이 아니란다. 자기네들 가진 걸 다 팔아도 그 비녀는 살 수가 없대. 대체 이걸 어디서 구했냐며 도리어 나를 심문하더라. 애먹었어 아주.”
“아……. 그럼 제가 팔지도 못하는 비녀를 보답이랍시고 드린 거였네요. 죄송합니다. 지금도 달리 드릴 건 없지만 그래도,”
“아니 내가 지금 그런 얘기 하려는 게 아니잖아!”
죄스러운 마음에 이제 와 다른 거라도 드릴 게 없나 봇짐을 주섬주섬 풀었다. 따지고 보면 여기 안에 물건들도 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는 짓이 영 염치가 없기는 했다. 그래도 모르면 몰랐을 텐데 다시 찾아오기까지 해서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다.
보자기를 풀어 펼치는 이설을 말리며 임씨가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시도 때도 없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이설이 또 깜짝 놀라 발을 헛굴렸다.
“너 진짜 그 비녀 훔친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못 배우고 미천한 상놈이라도, 남의 물건 도둑질하는 그런 천것이랑은 상종을 안 한다고. 어?”
의외로 신념이 확고한 임씨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문득 이설은 임씨에게라면 제 처지를 사실대로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비밀을 품고 정체를 숨기며 도망 다니는 것에 점점 지쳐 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순간 그런 유혹이 일렁이기는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설령 임씨가 좋은 사람이라 이설의 사정을 알고도 도와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실을 알고 감당해야 할 마음의 무게까지 임씨에게 강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또 거짓말 하나가 늘었다.
“정말로 훔친 거 아닙니다. 사실 그 비녀는 저희 어머니께서 시집오실 때 받으신 폐물인데 가문이 몰락한 뒤부터 제가 내내 간직하던 것입니다.”
“가문이 몰락했다고?”
임씨가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말의 꼬리를 물었다.
“예. 선친께서는 연국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시던 분이셨는데 부패한 무리와 어울렸다는 누명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뒤 식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노비 신세가 되었고 건너건너 듣기로는 어머니께서도 얼마 전 하늘로,”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함부로 주면 어떡해!”
잠자코 얘기를 듣던 임씨가 전에 없이 큰소리를 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적당히 말이 될 법한 거짓말을 만들어 내던 이설이 놀라 움찔하는 사이 임씨가 품에서 겉싸개를 두른 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씩씩거리는 화난 얼굴로 이설을 노려보는 모습이 어지간히도 사나워 보였다.
“이 천하의 불효자 같으니라고! 그렇게 귀한 거였으면 죽을 때까지 잘 간직을 했어야지. 제정신이야?”
“두 분 덕분에 제가 살아서 양화성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귀하다 한들 제 목숨값보다 귀하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께서도 저를 탓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갈수록 거짓말이 능숙해진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며 이설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임씨는 제가 하는 말을 다 믿어 주는 눈치다. 아직 못마땅한 얼굴로 이설을 쏘아보기는 해도 그 입장까지 헤아리지 못한 건 아닌 듯했다.
“어쩐지 생긴 거며, 하는 짓 보니 천생 노비 같지가 않더라니. 귀한 집 자식이었구만.”
임씨는 혼잣말을 하며 잠깐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비녀를 이설에게로 밀었다.
“아무튼 알았으니까 이건 그냥 가져가. 남의 어머니 유품을 내가 가지고 있어서 뭐 해.”
“제 성의니 그냥 받아 주세요.”
“나나 양씨가 색시가 있냐, 딸자식이 있냐. 그렇다고 이걸 남한테 덜컥 줄 수도 없고. 사용할 사람도 없고, 팔지도 못하니 그냥 네가 도로 가져가. 옜다.”
“세공된 보석을 하나씩 떼어 팔아 보면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잘 간직해. 나한테 주는 것보다야 훨씬 값어치 있게 쓰일 때가 올 수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너 여기는 뭐 하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