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8화
시시껄렁한 농담이라도 하는 것처럼 구하가 가볍게 웃었다.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이설이 재미없는지 턱 끝을 슬슬 문지르며 가볍게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내가 속은 줄 알았던 거야?”
“언제 알았어?”
이설이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감추며 물었다.
“처음 보자마자 알았지. 형님 걷는 거, 말하는 거, 먹는 거. 딱 봐도 막 자란 나 같은 아랫놈들 같지가 않더라고.”
몸가짐을 아예 신경 쓰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몸에 밴 궁의 예절들을 은연중에 보일까 언행 하나하나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도 티가 났다니 어차피 들킬 운명이었나 보다. 갑자기 맥이 탁 풀리니 어이없게도 헛웃음이 터졌다.
“처음부터 알았구나.”
뭣 하러 하루하루 시간 흐를 때마다 긴장을 한 건지.
이설은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염색을 하느라 사용했던 약초의 시큼한 냄새가 콧속으로 무겁게 흘러들었다. 이 역시 괜한 짓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별로 안 놀라네?”
“많이 놀란 참이야.”
“그럼 일단 울며 빌기라도 하는 게 순서 아냐, 형님?”
구하의 뜬금없는 소리에 이설이 느리게 감았다 뜬 눈을 치켜올렸다.
“여기 사방이 도국 병사들이야. 내 말 한마디면 형님이 관아에 끌려가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씀이지.”
아예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구하가 거만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을 너무 쉽게 믿은 건 자신의 책임이었다. 기댈 곳이 없다 보니 이렇게 실수를 했다며 혼자 자책하며 이설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태연히 대꾸했다.
“도국에서는 가짜 이름을 사용한 게 관아에 끌려갈 만큼 중대한 죄목인가 보지?”
“진짜 신분을 숨기는 이유에 따라 다르지.”
“이름만 가짜일 뿐, 난 그냥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이야. 호패가 없는 게 문제가 된다면, 당숙 어른께서 내 신원을 보장해 줄 수 있어.”
겨우 안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임씨, 양씨 두 사람에게 신원까지 보장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염치는 잠시 미뤄 놓았다. 구하가 정말 이대로 골목을 나가 도처에 널려 있는 병사라도 끌고 온다면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다 같이 한통속일 줄 누가 알고.”
“…….”
“그리고 지금 형님 이름이 가짜인 걸 문제 삼고 있는 게 아니잖아.”
구하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설이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줄 눈치가 아니었다.
이설은 가만히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 와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떠난 길이었지만 결국 원하던 대로 강성까지 닿게 된 것도 다 하늘의 뜻이라고 믿고 싶었다. 인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원하는 게 뭐야?”
숨죽여 고민하던 이설이 결국 자기 거짓말을 인정하듯 물었다.
“날 관아에 넘길 기회는 많았어. 그런데도 일부러 호패까지 위조해서 날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을 거잖아.”
“관아에 넘기지 않은 건 나도 내내 긴가민가했었거든. 근데 인제 와서 보니 그러길 백번 천번 잘했지 뭐야. 여기저기 형님을 찾는 사람이 많더라고.”
히죽거리는 얼굴 위로 드러나는 은근한 기대감을 보고서야 대충 구하의 의도를 알아챘다. 같이 있는 내내 떼돈이나 벌어 평생 놀고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투덜거리던 구하였다.
“이민족에 날 팔아넘기기로 했구나.”
자포자기한 듯 이설이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구하는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렇게 결정한 건 아니야.”
“…….”
“형님한테도 기회를 줘 볼까 해. 형님이 가진 패를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패?”
“형님은 나한테 뭘 해 줄 수 있는지.”
“……정확히는 얼마나 해 줄 수 있는지를 묻는 거지?”
구하는 이설이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나 그제와 다른 게 없어 보이는 얼굴인데 이제 와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한없이 졸렬해 보이는 표정은 입안에 쓴맛이 느껴질 정도로 역겨웠다. 궁 밖에서는 뭐든 조심해야 한다는 주 상궁의 당부는 아마 이런 일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주 상궁은 늘 이설이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큰일을 치를 것이라 염려했다.
이설은 조용히 구하를 노려봤다. 형님, 형님 하며 살뜰하게 챙기던 모습 뒤로는 이런 비열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람을 잘못 믿었다고 자책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수중에 돈이 될 만한 것은 양화성 관사에서 챙겨 나온 비녀가 전부였다. 모르긴 몰라도 구하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가치일 게 분명했다.
이설은 초조한 마음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불현듯 차갑게 닿는 가락지를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양손에 각각 태자가 준 금파 가락지와 우찬이 준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역시 도망친 왕자 나리께는 내가 얻을 게 없겠지?”
참을성이 부족한 구하가 이설의 손아귀를 움켜잡으며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왕자 나리라는 말을 보니 정확히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달리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이설은 할 수 있는 한 거칠게 팔을 당겨 구하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이거.”
구하의 손이 닿았던 손목에 더러운 거라도 묻은 양 툭툭 털어 낸 뒤 이설이 가락지 하나를 뺐다. 살이 빠진 까닭에 헐겁게 빠져나간 가락지를 망설임 없이 구하에게 건넸다. 하얀 손바닥 위 정교하게 세공된 옥색 가락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건 옥가락지잖아. 그렇지 않아도 내가 유심히 보기는 했는데 아무리 세공이 잘되어 봤자 옥은 옥이야. 이딴 건 팔아 봤자 돈이 안 된다고.”
이설의 손 위에 가락지를 낚아채듯 가져간 구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가락지 안쪽에 값비싼 보석이라도 박혀 있는지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별다른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같이 다닌 정을 봐서 내가 기회를 준 건데 참. 형님도 너무하시네.”
가락지를 손안에 굴리며 구하가 생색을 냈다. 이설은 남의 손에 들어간 옥가락지가 무척 낯설게 느껴져 일부러 시선을 떼고 구하를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네 말대로 난 지금 도망 중이라 가진 게 없어.”
“그럼 나도 어쩔 수가 없네.”
“그러니까 내 정보를 팔아.”
당장이라도 이설의 팔을 잡아끌어 관아로 향할 것 같은 구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구하가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정보?”
“그 가락지를 가지고 금국으로 가. 수도 주안으로 가면 비가랑 상단의 본가가 있을 거야. 거기서 상단의 막내아들 비차란을 찾아서 그 옥가락지를 보여 줘.”
“보여 주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건데?”
“나를 도국 밖으로 도망가게 해 주는 데 도움을 줬고 그 대가로 대금을 받으러 왔다고 해. 증좌는 이걸로 충분할 거야.”
이설의 제안이 아주 같잖은 소리만은 아니라는 듯 구하가 가락지를 눈여겨보았다. 이설은 이 방법이 과연 맞는 것인지 확신은 없었지만 당장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대로만 되어 준다면 우찬의 시선을 도국 바깥쪽으로 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설령 이설의 얕은수를 눈치챈다 해도 손해 볼 건 없다. 그렇게 되면 구하의 안전을 보장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와중에 구하의 생사까지 걱정해 줄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나더러 금에 거짓 정보를 흘리라는 거잖아. 그 대가로 돈을 받고.”
“맞아.”
“내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아?”
“여기서 날 이민족에 넘기는 것도 너무 위험한 거 너도 알잖아. 길목마다 도국 병사들이 있어. 네가 정말 나를 그쪽으로 넘기겠다면 나는 차라리 도국 병사들에게 자수하는 편을 택할 거야. 그리고 네가 이민족과 내통하는 첩자라고 진술하면 되겠네.”
자수라고 하니 뭔가 스스로 중죄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우찬이 자신을 찾고 있는 게 기정사실로 되었다면 대외적으로 알려진 그 이유는 무엇일까? 죄인을 좇는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구하에게 내민 제안은 이설로서는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었다. 선택지가 몇 개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자신이 가장 유리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길을 고르고 고른 게 저것들이었다. 만일 구하가 이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민족들에게 자신을 넘기기로 한다면 차라리 도국 병사들에게 붙잡혀 금군에게 이송되는 편이 나았다.
이민족들이 왜 여전히 자신을 쫓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붙잡힌 뒤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이설의 결론이었다. 아직 삶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우찬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나리인 줄 알았는데.”
“…….”
“생각만큼 순진하진 않잖아?”
이설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서도 구하는 여전히 건방지고 무례했다. 하지만 이설은 기분이 나쁜 한편 생각만큼 순진하진 않다는 말에 자신도 궁 밖 생활에 차츰 적응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핏 웃음이 났다.
“좋아.”
길게 고민해 볼 것도 없이 구하가 흔쾌한 척 대답했다.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던 옥가락지도 이제 쓸 만하다는 판단이 섰는지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자기 손가락에 끼워 넣어 보려다 크기가 작아 맞지 않자 쳇 소리를 내며 앞섶 주머니에 넣었다.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가락지의 존재를 확인까지 했다.
“근데 이걸로는 좀 부족하고 서신 한 장만 좀 써 줘.”
“무슨 서신?”
“내가 형님을 도국 밖까지 잘 모셔다드리고 대금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으로 한 장.”
생각보다 치밀한 구하가 봇짐을 뒤져 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붓과 먹을 준비하는 게 여의치 않아 짜증을 내는 구하를 기다렸다 한참 뒤 이설이 붓을 잡았다. 서신을 받는 이는 비차란으로, 구하에게 자신을 도와준 대가로 대금을 약조하였으니 대신 지불해 주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서신까지 받을 차란의 입장을 생각해 보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부디 차란에게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설이 쓴 서신을 소중히 접어 가락지와 같이 품에 넣은 구하가 능청스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좋은 거래였다며 흐뭇해하는 그 얼굴을 보며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았다.
“그럼 이만 형님 친척 어른이라는 그 양반들부터 찾으러 가 보실까?”
“됐어. 여기부터는 나 혼자 다닐 테니 이만 네 갈 길 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태연한 구하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 더는 꼴도 보기 싫은 구하를 내버려 두고 마차에서 내리려던 이설을, 구하가 급히 붙잡았다.
“말 참 서운하게 하시네. 목화솜 판다는 그 양반들, 당암 고개 사는 임씨랑 양씨 맞지?”
“…….”
“아까 호패 파러 갔을 때 슬쩍 물어봤거든. 강성에서 목화솜 파는 가게는 그 집 하나뿐이라 하더라고. 걸어가면 한참이야. 거기까지만 딱 데려다주고, 나는 내 갈 길 갈게. ……아, 나도 여기서 금의 수도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어. 허튼짓 안 할 테니까 걱정 말어.”
사람 좋은 척 웃는 구하가 하나도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보나 마나 혹시 이설을 놓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알아 놓았을 게 분명하다. 설령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여간 좋은 이유는 아니었을 거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다 수상하다.
맘 같아서는 달리는 마차에서라도 뛰어내려 혼자 가고 싶었지만 겨우 달래 놓은 구하가 언제 마음을 바꿔 계획을 변경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얌전히 구하 옆에 앉아 있는 이설이었지만 이미 불안으로 뒤엉킨 마음은 오갈 곳 없이 흔들렸다. 가락지가 사라진 손가락 한구석이 찬 바람이 불 때마다 괜히 휑하니 공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