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196)화 (196/300)

달의 황홀경

196화

“연이설도 알고 있나?”

“무엇을 말입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소운이 대꾸했다. 말은 저리해도 사실 우찬의 의중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귀비로 책봉한 여인을 내 정인이라 공표한 것을 말이다.”

일부러 제 입으로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더 더러웠다. 미세한 균열로 갈라지는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소운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알고 계십니다.”

“누가 말했지? 너, 아니면 창화군?”

“저희 둘 다 아닙니다. 산에서 도움을 받았다던 행상인들에게 들으셨거나 여기서 일하는 아랫것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신 모양입니다.”

“네가 일부러 말을 흘린 건 아니라는 얘기군.”

“신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마마께서 속상해하실 걸 뻔히 아는데요.”

억울하다는 얼굴로 소운이 울컥하는 목소리를 냈다. 우찬은 눈을 치켜뜨며 흘끔 위를 올려다봤다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마른 천으로 검의 긴 날을 스윽 닦아 내자 어제 발라 두었던 기름이 닦여 나왔다. 앞으로 쓸 일이 많을 것을 염두에 두고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하며 우찬은 소운의 말을 되짚어 보다 웃었다. 귀비를 정인으로 공표한 자신의 결정에 이설이 속상해한다는 말이 그저 우습게만 들렸다.

“그게 속상해서 내 뒤통수를 치고 내뺀 건가?”

혼잣말이 유독 컸지만 소운에게 대답하라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운은 자기가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뭐가 그리 속상했던 건지는 만나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덜렁 편지 한 장만 남겨 두고 떠난 이설의 속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일단 나라 전체를 폐쇄하고 오도 가도 못 하게 막아 두기는 했지만 도국은 금국 다음으로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다. 특정 지역이 아닌 전체를 들쑤시며 사람 한 명을 찾을 만큼 우찬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적어도 이설이 갈 만한 지역 일부분이라도 범위를 좁힐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대체 무슨 이유로 밤사이 황급히 도망을 가야 했던 걸까? 정인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이 분하고 속상해서 이렇게라도 자기 기분을 표출하고 싶었던 걸까. 차라리 이게 정답이었으면 좋겠다. 폐하의 정인이 아니게 된 것이 너무 서럽고 억울하여 달아났던 것이라고, 이리 말하며 엉엉 운다면 마음 졸이게 만들었던 지난 며칠을 모두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연히 속상하시겠죠. 폐하께서 특별히 여겨 주셨던 유일한 한 가지를 잃었다고 생각하실 테니까요.”

소운이 뒤늦게 냉담한 목소리로 딱 잘라 이설을 대변했다. 묘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자신을 꼭 꾸짖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태자를 혼낼 때처럼.

“유일한 한 가지?”

“마마께서 폐하의 하나뿐인 정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루 소의 마마는 오직 폐하의 손목에 새겨진 이름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있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다른 여인을 정인이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이제 황궁에서 마마의 자리는 어떻게 되시는 겁니까?”

“주제넘은 소리 하지 마. 어차피 연이설도 자신이,”

우찬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뒷말을 쓰게 삼켰다. 소운은 무슨 억하심정인지 속사포처럼 할 말을 쏟아 내고도 아직 못다 한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억지로 다물었다.

“……됐다.”

어차피 이설도 자기가 황제의 정인이라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불필요한 얘기였다. 이설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자신인 걸 아는데도 그게 썩 달갑지가 않았다.

“내 정인이든 아니든 연이설이 있어야 할 자리는 그대로야. 논할 가치조차 없다.”

“논할 가치조차 없는 걸 마마 혼자만 모르고 계시니 문제 아닙니까.”

소운이 답답하다는 듯 격양된 어투로 말했다.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오는 같잖은 위협에 버릇처럼 흑영이 둘 사이를 막아섰다. 소운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바라보자 무안한 듯 옆으로 물러서며 우찬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니까 지금, 연이설은 황궁에 자기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이라도 한다 이 말이냐? 그래서 내가 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한밤중에 도망을 친 거라고?”

하도 어이가 없어 실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도 소운은 짐짓 진지한 표정을 놓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마마의 입장을 단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다시 울컥 치솟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말하는 소운의 도가 지나치다 싶었다. 같은 걸 느꼈는지 흑영이 둘 사이를 끼어들며 소운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이만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만둬 봐. 저게 오늘 어디까지 기어오르나 보게.”

옅은 웃음기가 진 목소리로 우찬이 흑영을 말렸다. 소운이 손을 거칠게 털어 내자 흑영이 떨어져 나갔다.

“오매불망 폐하 한 분만 보고 그 지독한 황궁 생활도 버텨 내신 마마입니다. 더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 주셨어야 했습니다. 마마께서 폐하의 하나뿐인 정인이라서가 아니라 연심을 가진 상대에게는 응당 그렇게 해 주셨어야 합니다.”

가만히 소운의 얘기를 듣던 우찬이 일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매사가 무념하여 표정이랄 것도 거의 없는 흑영조차 눈빛에 동요를 일으키며 소운을 바라봤다. 소운은 자기 말에 한 치의 틀린 점도 없는 것처럼 완고했다.

“연심?”

“연모하고 은애하는 마음 말입니다.”

“네가 말하는 그 연심이 나의 것이냐?”

소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고집스러운 눈빛이 말하는 것은 긍정이었다.

두 사람이 허공에 시선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우찬은 지금껏 소운이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대들어 나서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 역할은 대개 차란이 해 오던 것이라서, 오랜만에 보는 소운이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쯤 해.”

가만 노려본다고 먼저 꼬리를 내릴 것 같지 않은 소운을 잘 알고 있는 흑영이 소운과 가까이 마주 서며 속삭였다. 흑영이 둘 사이를 막지 않았다고 해서 소운에게 검을 겨누는 일까지 가지는 않겠지만 곱게 돌려보내는 일도 없을 것 같다. 마땅한 이유도 없는데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한 충동을 소운에게 모두 쏟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완강하게 버티던 소운도 흑영이 팔을 잡아끄는 힘에는 당해 내지 못했다. 흑영이 잡아끄는 힘에 크게 휘청한 소운이 그제야 우찬에게 거둔 시선을 흑영에게 보냈다. 친우 관계에서나 볼 법한 어그러진 원망의 감정이 흑영에게 고스란히 닿았지만 흑영은 못 본 척 다시 팔을 잡아끌었다. 끌려나갈 것이라는 걸 직감한 소운이 마지막 발악처럼 언성을 높였다.

“폐하께서 부정하시는 그 마음이 마마께는 어떻게 전해지실지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신다면,”

마음이 급해진 흑영이 소운을 둘러메다시피 하여 방 밖으로 나갔다. 쿵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찾아온 정적에 멀찌감치 서 있던 호위군 두 사람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우찬의 눈치를 봤다. 우찬의 옆을 지킨 세월만큼 오래 동안 봐 왔던 소운이 저렇게 경우 없이 우찬에게 목소리를 높여 대드는 것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우찬은 두 사람이 나간 방문을 조용히 응시했다. 소운이 미처 끝내지 못한 문장의 끄트머리는 어떤 말로 마침표를 찍을지 알 수 없지만 대강의 의미는 알아들었다.

소운이 버릇없이 굴었던 것을 단죄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연심’이라는 두 음절이 귓가에 웅웅 맴돌았다.

한편 소운을 우악스럽게 끌고 나온 흑영은 방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야 소운을 놓아주었다. 입까지 틀어막힌 채로 끌려 나온 소운은 흑영이 멀찌감치 밀어내는 힘에 밀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가 일어났다. 흑영은 엉망진창이 된 꼴로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세우는 소운을 보자 딱한 마음이 들어 손을 내밀었다가 보기 좋게 무시만 당했다.

“됐어.”

야멸차게 대꾸한 소운이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냈다. 가만히 쳐다보던 흑영이 쪼그려 앉아 바짓단에 묻은 마른 낙엽을 대신 털어 내 주었다. 광대도 아니고 바짓단이 이리 벙벙한 옷을 입고 있는 친우가 우스워 혼자 피식 웃자 기분이 나빴는지 소운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흑영을 뚱하게 노려봤다.

“단소운 너.”

흑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의 손잡이 끝 방향을 소운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당분간 폐하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왜.”

“그러다 진짜 죽을 거 같으니까.”

“……비차란도 여태껏 살아 있는데 내가 왜.”

소운이 냉랭한 목소리로 낮게 지껄이자 흑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맨날 그러던 놈이 또 그러는 거랑 안 그러던 놈이 갑자기 그러는 거랑 타격이 다르지.”

흑영 딴에는 웃으라고 한 농담이었는데 소운은 콧방귀 한 번 뀌어 주지도 않고 바닥으로 눈을 흘겼다. 단소운 고집 센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왜 또 갑자기 우찬을 상대로 죽을 각오로 달려드는 건지 모르겠다.

“네가 이렇게 소란 떨지 않아도 폐하 심경은 충분히 어지러워.”

“왜 어지러운 줄을 아셔야지.”

“…….”

“자기 마음도 못 들여다보는 군주가 어떻게 만백성의 마음을 굽어살필 수 있겠어.”

단언컨대 같은 말이 차란에 입에서 나왔거든 흑영은 일말의 고민 없이 주먹부터 얼굴에 꽂아 넣은 뒤 검을 들이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지도 못한 소운이라서 흑영은 잠시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다가 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우찬이 온 뒤로 필요한 몇 명만 남기고 모두 쫓겨난 터라 어느 곳을 둘러봐도 사람 없이 한산했다.

소운을 어르고 달래 보려던 마음이 싹 사라진 흑영이 소운의 멱살을 쥐어 잡아 제 앞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까치발을 들어 간신히 키를 맞춘 소운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흑영을 노려봤다.

“왜? 너도 내가 틀린 말을 한 거 같아?”

“너 말조심,”

“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폐하를 보위하듯이 나도 내 나름의 방법으로 폐하를 보필해.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기만 하는 네 충심만 고결한 게 아니야.”

멱살을 붙잡은 손에 힘이 풀리는 걸 알아챈 소운이 두 손으로 흑영의 손을 잡아 옆으로 확 밀쳤다. 힘없이 밀려 나간 흑영이 심경 복잡한 눈으로 소운을 봤다. 받아칠 말은 많은데 입안에서 맴돌기만 할 뿐 섣불리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폐하의 혜안이 되겠다는 충성 서약으로 황궁에 들어왔어. 그래서 폐하께서 간과하고 지나치시는 것들을 알려 드릴 책임이 있어. 여태껏 잠자코 있었던 건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내 의무를 잊은 게 아니야.”

“…….”

“다음에 폐하를 뵙게 되면 나는 오늘 못다 한 말을 다시 올릴 거야. 폐하께서 스스로 깨달으실 때까지 나는 몇 번이든 그럴 수 있어. 그때도 내가 폐하께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면 날 끌어내든 칼로 베든 네 맘대로 해. 넌 폐하의 검이 되기 위해 충성 서약을 한 거잖아. 네 책임을 다해.”

“너는 진짜, ……대단하다.”

알고는 있었던 소운의 대쪽 같은 성격에 할 말을 잃은 흑영이 기가 찬 듯 헛웃음만 계속 뱉어냈다.

“우리는 각자 서 있는 자리의 목적이 다르니까.”

마지막까지도 봐주는 법이 없는 소운이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인사 한 번 없이 저벅저벅 마른 바닥을 밟고 모퉁이를 지나 모습을 감췄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마지막 말을 되뇌여 보다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혼자 남겨져 저 말을 곱씹었을 차란을 떠올려 보자 측은한 마음이 조금 일기는 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가는 감정일 뿐이었다. 요즘 들어 매일 하루가 너무 길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