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4화
사흘을 꼬박 걸었다. 방을 뒤져 챙겨 나온 낡은 지도에 의지한 지 사흘째 되던 날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길목을 지나는 노파에게 길을 물으니 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끼며 잘못 와도 한참 잘못 왔다며 괜스레 타박을 주었다.
그러다 내내 얼이 빠져 있었던 데다가 몸도 지친 이설이 넋이 나가 울먹거리려고 하자 살살 달래 근처에 제집으로 데려와 밥을 먹였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 노파가 묻는 말에 준비해 두었던 대답을 차분히 늘어놓은 뒤 내일 새 지도를 구해 주겠다고 약속받았다. 이미 날이 저문 터라 하룻밤 잘 곳까지 제공 받고 그 대가로 비녀 하나를 주었다.
노파의 집 근처에서 운 좋게 머리카락 색을 바꿀 수 있는 풀을 구했다. 여태껏 벗어 본 적 없던 두툼한 털모자를 벗고 머리를 새로 감았다. 면경에 비춘 검은 머리카락의 모습이 무척 낯설어서 다행이었다.
“씻었어? 물이라도 데워 줄까 했는데 에이그, 뭐가 그리 급했어, 쯧.”
기척도 없이 노파가 이설이 방문을 벌컥 열었다. 허리띠를 매다 깜짝 놀라 펄쩍 뛰어오르며 앞섬을 가리자 노파가 ‘아 볼 것도 없어!’ 하고 쉰 소리를 꽥 질렀다.
“이거나 먹고 어여 자. 내일 장 열리면 지도는 하나 새로 구해 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르신.”
“불도 뜨끈하게 지폈으니까 그렇게 꽁꽁 싸매고 잘 필요 없어. 암만 곱상해도 사내는 사내인데 뭘 그렇게 조신하게 굴어?”
노파는 방문을 닫고도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하며 멀어졌다. 말은 괴팍하게 해도 가장 따뜻한 방을 내어 준 노파가 불쾌하지는 않았다.
이설은 슬슬 온기가 차기 시작하는 방 중간에 지도를 펼쳐 놓았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강성 근처 산어귀까지는 왔었어야 했는데 잘못 와도 한참을 잘못 왔다. 지도상의 거리로 가늠해 보니 다시 길을 되돌아가면 엿새는 족히 걸릴 길이다.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양화성을 떠나고 난 뒤부터는 주변을 경계할 일이 줄어들어서 다행이었다. 대문을 닫고 창화군의 거처를 떠난 직후부터 발자국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고개가 양옆으로 한 번씩 돌아갔다.
평소 양화성의 분위기를 알 수가 없어서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도국과 금국의 병사들이 곳곳에 즐비했다. 이설은 저 병사들이 자신을 찾기 위해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건 아닌지 불안에 떨며 걸음을 빨리했다.
사흘 만에야 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곳에 누웠다. 어제는 짚을 깔아 놓은 헛간에서 잤고 그제는 창고에 있던 나무 수레 위에서 잤다. 눈에 띌까 두려워 행상인이나 나그네들이 찾는 객사는 피했다.
노파가 가져다준 술떡은 그대로 싸서 봇짐에 넣었다. 오래 걸어 허기가 질 때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멀리 떠나는 일이 있거든 항상 아랫사람이 챙겨 주던 제 먹을거리를 손수 준비하고 챙긴다는 게 기특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감정이 복잡했다. 어두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라, 그냥 기특하다 여기기로 했다.
“집에 가고 싶다.”
있으나 마나 했던 희미한 등불도 꺼진 방에 눕자 혼잣말이 날숨처럼 흘러나왔다. 황궁의 제 침소는 불이 다 꺼져도 달빛이 아른거려 아슴푸레하게 시야가 밝았는데 여기는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자신에게 집이란 어디일까. 비은궁일까 아니면 연국의 궁일까. 연국에서 지냈던 궁은 이름도 없었다. 오래된 현판은 닳고 닳아 가운데 ‘경(傾:기울 경)’자 하나만 흐릿하게 보였다. 그래서 이설의 궁은 이름조차 ‘연이설의 궁’이었다.
사실 연국에 남겨 두고 온 궁은 이제 기억이 점차 흐릿해졌다. 이제 온전히 제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도 비은궁 하나밖에 안 남았다. 연국으로는 이제 영영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바마마가 더 걱정이었다. 자신에 관련한 좋지 못한 소식을 듣고 병세가 더 나빠지신 건 아닌지, 지금쯤 많이 화가 났을 우찬에게 해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이따금 불안감에 몸이 푹 젖었다.
마지막으로 자식 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뵙고자 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신 때문에 연국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당장은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웠다. 연국이 자신과의 관계를 끊고 먼저 등을 돌려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육체적 피로에 익숙하지 않은 몸은 따듯하게 데워지는 바닥에 녹아내리듯 흐물거린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던 생각들은 무겁게 가라앉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잠깐 선잠에 들었다 깬 줄 알았다. 도망친 날 이후로 항상 깊이 잠들지 못하고 중간중간 눈이 떠졌다. 이번에도 그런 줄로 알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밖이 너무 소란스러웠다. 생각해 보니 날이 너무 밝았다.
“여즉 자는 거야?”
이번에도 노파가 기척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이설 역시 똑같이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노파는 젊은 놈이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쳐 자기만 한다며 혀를 찼다.
“아, 이리 나와 봐. 내가 좋은 거 하나 물어 왔으니까.”
아직 비몽사몽 한 이설에게 노파가 의기양양하게 생색을 냈다. 이설은 잠이 덜 깨 꾸물거리며 일어나다가 노파가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어영부영 신을 꿰어 신었다. 황궁에서 야장의를 입은 채로 남들 앞에 나섰다가는 크게 한 소리를 들을 일이지만 평민들의 삶에서는 뭘 걸치든 일단 몸에 걸치기만 딱히 문제 될 게 없었다.
“젊은 놈이 왜 이렇게 굼떠? 빨리 좀 오라니까. 어디 그래 가지고 강성까지 갈 수나 있겠어?”
“아, 예. 근데 무슨 일로……?”
“그 삐쩍 마른 꼬락서니로 걸어서 강성은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강성이야. 애먼 사람 길바닥에서 송장 치우게 하지 말고 이거 타고 가. ……어이 강 가야. 어여 이리 와 봐.”
뭔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 얼떨떨하게 서 있기만 하는 이설에게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멀끔한 얼굴은 도국 사람답지 않게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체격이 유달리 컸다. 저 정도 키면 우찬과 마주 서도 눈높이가 비슷하지 않으려나.
우찬의 생각을 하지 말자고 그렇게 혼자 외고도 정신을 차려 보면 항상 우찬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한심하다. 노력이 무의미한 영역인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구하입니다.”
“예, 저는 진, ……진기연입니다.”
“뭘 그렇게 뻗대고 서 있어? 냉큼 저 가서 올라타 보지 않고.”
노파가 이설의 등을 밀어 재촉하며 담 너머를 가리켰다. 까치발을 들어 내다보니 말 두 필에 마차와 그 뒤로 수레가 연결되어 있었다. 일전에 임씨와 양씨가 끌고 다니던 것과 거의 비슷해 보였지만 훨씬 튼튼해 보였다. 그제야 노파가 하는 말이 대충 이해가 갔다.
“네 놈 지도 사 주려고 장에 갔는데 쌀집 강 가(家) 둘째 아들 저놈이 강성에 간다잖아. 빈 수레에 네 놈 하나 싣고 간다고 하늘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쌀 한 포대 사면서 슬쩍 부탁했지.”
“이렇게까지는 안 해 주셔도……. 어제저녁이며 떡이며 잠자리에 지도까지 제가 드린 것에 비해 빚을 너무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어르신.”
생각도 않고 우선 거절부터 하고 보는 이설에게 노파가 세상 물정 모른다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어제 답례로 받았던 비녀를 꺼내 도로 이설에게 들이밀었다.
“어제는 내가 날도 어둡고 하니 눈이 침침해서 제대로 못 보고 그냥 받은 거여. 이렇게 귀한 걸 쌀밥 한 그릇에 바꾸고 그러면 못 써. 철딱서니가 없는 거야 아니면 눈깔이 없는 거야. 도로 가져가.”
노파는 이설이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손에 우악스럽게 쥐여 주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이설은 이깟 낡은 비녀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가 들여다봤지만 알 턱이 없었다.
“강성까지 가신다고요?”
“그럴 생각이긴 한데…….”
“길을 잘못 들어 여기까지 오셨다 들었습니다. 마침 저도 강성에 보리쌀을 받으러 가는 길이니 같이 가시죠.”
사내가 수더분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노파에게는 생각도 하지 않고 괜찮다 사양했지만 곱씹어 보면 무척 좋은 제안이다. 걸어 이동하지 않아도 되고 말동무가 있다면 혼자 우찬을 생각하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었다. 당장 안 좋은 점을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저,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결국 사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잡일을 하며 거칠어진 투박한 손이 감겨 들어왔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데도 다시 우찬이 생각났다.
“뭘 꾸물거려! 얼른 짐 싸서 가지 않고.”
노파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깜짝 놀란 이설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짐이랄 것도 없는 물건들을 후다닥 챙기고 있는데 바닥에 뭔가 툭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둥글게 말린 보자기에 김이 모락모락 났다.
“가다 입 궁하면 먹어.”
“괜찮습니다, 어르신. 어제 주신 떡도 챙겨 놓았습니다.”
“어른이 주시면 그냥 받는 거지 뭐 그리 토를 달아? 그리고 너.”
고약한 표정으로 훈계하던 노파가 짐짓 매서운 표정을 하고 이설에게 삿대질을 했다. 주변을 살피고는 좀 전보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거짓부렁을 치는 게 아주 글러 먹었어. 영 소질이 없어 쯧쯧.”
이설은 봇짐을 등에 메다 말고 움직이는 걸 멈췄다. 노파의 신랄한 비난에 할 말을 잃었다.
“네놈은 그냥 말을 않는 게 최고다. 너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은 강성 눈 뜨고 코 베이기 십상이니까 조심 또 조심하고. 알아들어? ……곡괭이질도 한 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손으로 화전민은 무슨. 밥이라도 게걸스럽게 먹든가.”
얘기가 끝났다는 신호도 없이 노파가 문을 쾅 닫고 나갔다. 한바탕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정리해 보며 이설은 노파가 두고 간 보자기를 통째로 봇짐에 넣었다. 그러다 양손을 펼쳐 보니 노파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것도 같았다. 이런 손을 가지고서 화전민으로는 더 이상 먹고살기가 힘들어 강성에 있는 친척 어른 집에 일을 배우러 간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였다.
짐을 챙겨 나오니 사내가 아직 기다리고 있었다.
“짐은 그게 전부입니까? 수레에 실으시면 됩니다.”
“큰 짐이 아니니 제가 들고 타겠습니다.”
“네 뭐, 그러시든가요.”
사내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노파를 불렀다. ‘어르신 저 갑니다.’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사내 옆에서 이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여러모로 신세 지다 갑니다.’ 하고 인사했다. 노파는 나와 보지도 않고 부엌 쪽에서 뭐라 뭐라 소리만 질렀다. 사내는 원래 저런 분이시라며 어깨만 으쓱하고 이설과 마차에 올라탔다.
사내, 강구하는 말이 일단 많았다. 다짜고짜 나이를 묻기에 당황하여 진짜 나이를 알려 주었더니 몇 번이나 그게 진짜냐며 묻고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이설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이설은 누가 봐도 네댓 살은 많아 보이는 구하가 자신을 형님으로 부르는 게 영 껄끄러웠다. 연국에 두고 온 어린 동생들을 제외하고는 누군가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생소했다.
“강성에 있는 형님 네 친척 어른 집에 일을 배우러 가는 길이라고?”
구하는 이설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말을 짧게 했다.
“예 마침 일손도 모자라신다고 하셔서…….”
이설은 구하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이상해 여전히 말을 높였다.
“뭔 일을 하시는데?”
“행상 일을 하십니다. 주로 목화솜을 회국에서 들여오는 것 같습니다.”
“아아, 그거. 그거 좋지. 회국 목화솜이 여기서 꽤 돈벌이가 되거든. 강성까지 형님 잘 모셔다드리면 돌아갈 때는 나도 좋은 물건 싸게 하나 들여갈 수 있나?”
구하가 기대하는 눈치로 물었다. 내심 기대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그렇게 해 달라 은근한 압박을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노파를 처음 만났을 때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해 생각나는 대로 양씨와 임씨를 염두에 두고 거짓말했던 것이 후회됐다.
“예 한번 여쭤보겠습니다.”
“형님 덕분에 올겨울 아주 따뜻하겠어.”
호탕하게 웃으며 구하가 말의 속력을 높였다. 일단 강성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답례로 비녀를 팔아 목화솜 이불 정도는 사 줄 수 있었다. 엿새는 더 걸릴 거라고 생각한 시간을 나흘로 줄여 줬으니 비녀 한 개쯤의 값어치로는 충분하다. ……사실 비녀의 정확한 값어치가 헷갈리기 시작하기는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자꾸 또 우찬의 생각이 났다. 우찬을 떠올리게 할 만한 건덕지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 그랬다. 그래서 이설은 괜히 구하에게 말을 걸었다.
“강성은 달에 한 번씩 가신다고요?”
“달에 한 번일 때도 있고 두 번일 때도 있고. 근데 이번에 다녀오면 당분간 좀 쉬려고. 성문 경비 강화되면 우리 같은 행상인들은 일이 성가셔지거든.”
“어째서 말입니까?”
“성문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수레에 뭐 들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어디서 오는 건지 꼬치꼬치 캐묻고 기억나지도 않는 행적 읊어 보라고 사람 피를 말리거든. 그런다고 강화될 경비냐고 그게.”
괜히 짜증이 났는지 구하가 애꿎은 채찍을 말에게 휘둘렀다. 덜커덩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중심을 잡으며 이설은 할 말이 없어 여상히 웃기만 했다. 구하는 여전히 혼자 투덜거렸다.
“사람 하나 찾겠다고 참 별짓을 다 해. 덕분에 애먼 행상인들만 피해 보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