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3화
소운이 대답을 회피하려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마른침을 삼켰다.
“알고 계셨습니다.”
작아진 목소리가, 어떤 불안한 마음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이르면 오늘이라도 도착하실 거라고 미리 알려 드렸습니다. 그래서 폐하께서……, 너무 무리해서 오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걱정?”
소운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무슨 의도로 덧붙인 말인 줄은 알겠지만 쓸데없는 사족이었다. 나를 걱정하던 당사자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살면서 가끔은 코웃음 나오는 황당한 일도 있었고 얼굴 찡그려지게 화가 나는 일도 있었다. 두 가지 감정이 함께 찾아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감정을 마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인가 그 날인가 싶다.
자신이 올 것을 알면서도 밤사이 급하게 떠난 이설에게 느껴지는 배신감은 자연히 이해할 수 있다. 이설은 그래서는 안 됐다.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리다 저를 보고 울며 반가워하고 금군의 호위를 받으며 금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리고 남은 평생 다시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감정은 양면이다. 치미는 분노와 배신감의 뒷면에는 당연한 것처럼 초조함이 따라붙었다.
귀비를 정인으로 공표하여 이민족의 눈을 돌렸다 해도 이설은 아직 자신의 후궁이었다. 사내고 여인이고 사람에게는 일절 눈길도 주지 않는 자신이 품에 끼고 도는 총비라고 한때 소문이 파다한 것도 알고 있다. 그토록 눈에 띄는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는 이설을 이민족은 물론 우찬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무언가 다칠까 봐 혹은 잃을까 봐 초조해지는 불안감. 이 원초적인 감정에 처음으로 직면했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이 나를 피해 밤사이 도망을 쳤다고?”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은 심연 아래로 꽉 눌러 감췄다. 이설이 감히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났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그럼 이제 분노만 다스리면 될 일이다.
마치 그 다른 이유를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소운을 가볍게 비웃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려는데 소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침상 옆에 협탁에서 각각 따로 곱게 접힌 종이 두 장을 가져왔다.
“정말 폐하를 피해 도망치셨다면 이런 걸 남겨 놓았을 리도 없습니다.”
“이게 무엇이냐. ……설마 이설이 남겨 두고 간 것이냐?”
“예. 하나는 창화군에게, 다른 하나는 폐하께,”
소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종이 두 장을 모두 낚아챘다. 둘 중 무엇이 자신에게 쓰인 것인지 확인도 해 보지 않고 무작정 하나를 먼저 펼쳐 보았다. 앞머리의 시작이 ‘창화군께’ 라는 편지다.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글자가 너무 익숙해서,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쓴 것이라는 의심도 들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은 특별한 게 없었다. 구해 주고 보살펴 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고 멋대로 가져간 물건들의 값을 합쳐 반드시 갚겠다는 내용이 반. 곤란한 상황에 휘말리게 해서 무척 미안하다는 내용이 반이다. 해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이 없는 걸로 보아 떠나기 전 창화군을 만나 해를 입혔던 것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미에는 황제에게 제 서신을 전해 달라 부탁하는 한 줄이 있었다.
창화군에게 썼던 편지는 그대로 발치 아래로 떨어뜨린 뒤 남은 종이를 펼쳤다. 같은 모양의 필체로 ‘성천자 봉황의 자손이시며 하늘 아래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금의 황제께 아뢰옵니다.’ 라고 정성 들여 쓴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
창화군과 비슷한 길이로 쓰여 있던 내용이지만 모두 읽어 내려가는 데에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났다. 다 읽은 뒤에도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나 곱씹어 읽은 뒤 처음 접혀 있던 그대로 접어 품에 넣었다.
“오해는 풀리셨습니까?”
소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득 지금 소운이 걱정하는 것이 이설의 안위인지 아니면 이설이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한 자신의 안위인지 궁금했다.
“사람을 풀어 지금 찾아보고 있다고?”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 우찬에게 소운은 먼저 했던 질문의 대답 듣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라지신 것을 알아챈 즉시 도국 병사들을 풀어 수색 중에 있습니다.”
“일을 소란스럽게 만드는군.”
“밤사이 멀리 도망치시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 가급적 다수의 인원으로 최대한 빨리 찾을 생각입니다.”
“병사들은 자신들이 누굴 찾고 있는지는 알고 있나?”
“병사들은 창화군 외가 쪽의 친척 동생을 찾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하는 서너 명을 제외하고는 마마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따위 머리 색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사람들이 정체를 모를 수가 없지.”
우찬을 혀를 차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그 점은 충분히 조심하실 겁니다. 처음 발견되셨을 때도 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인 상태이셨습니다. 감출 방법을 알고 계실 겁니다.”
“똑똑하다 칭찬을 해 줘야 할지.”
세상 물정은 아는 것도 없으면서 꼴에 도망친다 하니 되지도 않는 머리는 열심히 굴린 모양이다. 수만 인파와 섞여 있어도 단연 눈에 띌 머리카락을 감출 생각을 한 것을 보면.
“마마께서 정체만 들키지 않으신다면 당장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들키면.”
“…….”
“만에 하나 이설이 내 후궁이며 한때 정인이기도 했던 자라는 사실을 들킨다면, 그때는 위험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냐?”
“……폐하의 불안함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했던 신의 경솔한 실언이었습니다. 송구합니다.”
사사건건 말의 꼬투리를 잡는 성정은 아니다. 일부러 소운에게 무안을 주려는 의도도 없었다. 그저 소운이 했던 말이 정말로 귀에 거슬렸기 때문에 지적한 것뿐이었다. 이설에게 일어날 최악의 상황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치솟은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찬은 위로 확 치솟았던 오만 감정들의 폭발을 간신히 참아 냈다. 자신이 올 줄 알면서도 떠난 이설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도, 서서히 음습하는 불안과 초조도 당장의 해야 할 일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갑자기 호위군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순간적으로 경계심을 예민하게 세우니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맥 빠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창화군입니다.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찬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짧게 끄덕였다. 그러자 흑영이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없고 창화군 혼자 서 있었다. 몰골이 별로 좋지 않은 창화군을 흑영이 몸수색을 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터벅터벅 힘없이 걸어 들어오는 창화군이 적당한 지점에 서서 인사를 올리려는 찰나 우찬이 다가가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매가리가 없긴 해도 건장한 사내의 몸이 옆으로 멀리 밀려 날아가며 바닥에 툭 쓰러졌다.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호위군과 달리 놀란 소운이 일어나 창화군을 부축해 세웠다.
“붙잡았어야지.”
“…….”
“눈앞에서 도망치는 걸 놓쳐?”
“다 저의 불찰입니다.”
“당연하지. 네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모두 다 너의 불찰이다.”
“폐하!”
내내 침착하던 소운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창화군은 덤덤했다. 우찬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검을 고쳐 잡아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운이 창화군을 부축하며 자기 뒤로 보내려고 했지만 체격 차이가 현저했고 창화군도 소운 뒤에 숨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창화군이 소운의 팔을 잡고 옆으로 밀어냈다. 결연한 의지가 확고한 얼굴은 퉁퉁 부었고 터진 입가로 피가 고였다. 터진 입술은 방금 제가 만든 거라지만 부은 얼굴은 이설이 뿌렸다는 잿가루 때문일 것이다. 종일 잡초에 관한 서책만 들여다보더니 쓸 만한 몇 가지는 익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엉망이 된 창화군의 얼굴을 응시하던 우찬이 등을 돌렸다. 자리에 앉으니 창화군이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제 휘하의 병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마마를 찾겠습니다. 국경 밖으로 나가시지는 않았을 테니 수소문하면 소란 떨지 않고 시일 내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름만 왕족인 너 따위가 거느리는 병사들이라고 해봐야 양화성을 뒤지기도 모자라지.”
우찬이 조소하며 발끝으로 창화군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 일은 이미 소란스러워졌어. 이설이 연국에서 습격을 당한 뒤 사라졌다는 소문이 파다해. 더 이상 숨기는 게 무의미하다.”
“그럼 대대적으로 수색을 넓히겠습니다.”
창화군은 이설과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고 그 때문에 이 일에 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죽인다고 문제가 될 건 없겠지만 분이 풀리는 건 검에 목이 베이는 그 잠깐뿐이다. 그리고 죽이는 건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설을 찾는 것은 일각을 다투고 있다.
연이설을 되찾는 것 말고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자.
창화군의 말대로 이설이 양화성 밖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단히 대비하지 않고서는 북쪽 설산들을 지날 수 없다는 걸 몸소 알게 됐을 것이다.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갈 계획이라 하더라도 남쪽 국경을 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고로 이설은 분명 아직 도국에 있다. 도망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이 시점에 모습을 감추며 멀리 달아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양화성을 벗어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거다. 도국 전체를 봉쇄하고 수색권만 넓힌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네 왕에게 직접 전해. 국경을 봉쇄하고 모든 군의 병력을 동원해 금황제의 후궁이며 연의 왕자를 찾으라고. 무슨 수를 쓰든 상관없지만 연이설은 손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고.”
“도국의 입장을 대신하여 여쭙습니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금의 황명입니까?”
“그렇다.”
“만일 도국에서 이 황명을 거역한다면,”
“북방을 향하고 있는 금군의 창이 어디로 방향을 바꿀 수 있을지 묻는 건가?”
“……말씀 그대로 전하겠나이다.”
창화군이 물러가겠다 하기에 소운을 함께 내보냈다. 호위군 네 사람도 흑영만 남기고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혼자 남은 흑영은 우찬이 품에서 다시 이설의 편지를 꺼내 드는 것을 보고 천장 어디쯤에 몸을 숨겼다.
아직 빳빳한 새 종이를 다시 펼쳤다. 정갈한 글씨들을 몇 번이나 더 읽고 또 읽어 봐도 이설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찾아내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는 것들은 더 이상 눈에 담지 않기로 했다. 긴 글의 말미만이 우찬을 간신히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