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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92)화 (192/300)

달의 황홀경

192화

황궁을 떠난 지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지도에 난 가장 빠른 길을 보고 정신없이 말을 내달리기만 했다. 잠을 잔 기억도 거의 없었다. 체력이 바닥난 말을 바꾸기 위해 두어 번 말에서 내려 간소하게 끼니를 때웠던 걸 빼고는 쉬지도 못했다.

함께 출발한 호위군 여섯 중 두 명이 낙오됐다. 어지간한 훈련으로 다져진 무인들도 버티기 힘든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뒤처지는 줄은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목적지였다. 성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느껴지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제대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나 빨리 도착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창화군 쪽에서 사람을 보내 놓지 않아 성문 앞에서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체되지는 않았다. 우찬은 앞길을 막는 자들을 누구랄 것 없이 모두 베었다. 금군소장이 우찬을 알아보고서야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타지 변방에서 황제를 맞닥뜨린 소장은 놀라 나자빠졌다. 창화군의 거처로 앞장서라는 말에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지만 말을 아끼고 길을 안내했다.

“여기가 도국 창화군의 거처입니다. ……안에 누구 있느냐.”

관사치고는 낡고 허름했다.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외풍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이설을 이딴 곳에서 요양하게 하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대문이 열리고 웬 사내가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거, 누구십니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실 예정이니 이만……, 아이쿠!”

그새를 참지 못하고 우찬이 대문을 발로 차 버리자 문이 활짝 열리며 사내가 뒤로 나동그라졌다. 다리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죽네 사네 우는소리를 하는 사내에게 우찬이 검을 겨눴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피가 검 끝에 모여 사내에게 뚝뚝 떨어졌다.

“어디에 있지?”

“예, 예? 아……, 아이구 나리 살려 주십시오! 쇤네는 죄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으리, 이히……!!”

바짝 날이 선 검의 끝이 사내의 턱을 찔렀다. 우찬은 당장 이곳에 이설이 있다는 걸 알고서도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힘 조절이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힘을 주어 사내의 턱에 검을 박고 비틀면 좀 나아질까 생각을 했다가 몸에 피 냄새가 배면 이설이 반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검을 거뒀다.

탁탁탁. 물기 없는 흙모래 위를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제법 놀랍다 싶은 얼굴을 만났다. 눈에 익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도국의 복식을 그대로 차려입은 소운이 서 있었다. 꽤 오랜만에 얼굴을 본 건 사실이었지만 인사를 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소운도 아마 그럴 기분은 아닐 것 같았다. 그 얼굴의 표정이, 죽음을 결심한 패전국의 장군처럼 희망이 없어 보였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확인 먼저 해 봐야겠다. 안에 있느냐?”

“일단,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운이 목소리를 떠는 것을 처음 봤다. 자기 손으로 쥔 인두로 손목을 지지고 우찬이 불같이 화를 냈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소운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덜덜 떨었다. 태연한 척 애쓰는 연기가 소용없었다.

우찬이 말없이 소운만 응시하고 있자 뒤에 있던 흑영이 가깝게 다가왔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다는 말에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활짝 열린 대문 밖에서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야 탄로 나든 말든 개의치 않았지만 굳이 이설이 여기 있다는 사실까지 밖에서 알게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안내해라.”

소운이 뒤를 돌아 빠르게 앞서 걸었다. 우찬은 칼을 검집에 넣지 않은 채로 그 뒤를 따랐는데, 그 길을 따라 검에서 흐른 피가 간격을 두고 뚝뚝 떨어져 땅에 자국을 남겼다.

곧 복도의 끝 방에서 멈춘 소운이 문을 열었다. 여인 하나가 그 앞으로 지키고 있다가 우찬을 보고 몸을 경직했다. 우찬의 얼굴을 보고 정체를 알아차린 게 아니라 검에 묻은 피나 풍채에 압도당한 것이었다. 소운이 턱짓으로 눈치를 몇 번 주자 도망치듯 급히 사라졌다.

“밖은 공기가 차니 안으로 드시지요.”

우찬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호위군 넷이 경계하며 따랐고 맨 마지막에 소운이 문을 닫고 들어왔다.

“곧 따뜻한 차를 내어올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운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찬은 방에 세간살이를 한번 훑어보고는 소운을 봤다.

“내가 지금 여기까지 한가롭게 차나 마시러 온 것 같으냐, 소운아.”

“……아닙니다.”

“긴 말 하기 싫다. 연이설은 어디에 있지?”

대답을 머뭇거리던 소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우찬이 동시에 검을 고쳐 잡았고 흑영은 언제라도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설 태세를 갖췄다.

“사라지셨습니다.”

강압에 못 이긴 절망 어린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잠시간 흐르는 정적을 일깨운 것은 우찬이 떨어뜨린 칼이 바닥에 요란하게 떨어지며 나는 소리였다. 그리고 흑영이 겨우 한숨 돌리며 뒤로 물러서자마자 우찬이 소운에게 달려들었다.

소운은 우찬에게 멱살이 잡힌 대로 뒷걸음질을 치다 그대로 벽에 등을 부딪쳤다. 더 이상 밀릴 곳이 없는데도 우찬은 소운을 벽 쪽으로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고통에 일그러진 신음 소리가 짓눌린 목을 비틀고 올라왔다.

“뭐가 어쩌고 어째? 다시 말해 봐.”

말은커녕 숨쉬기도 곤란해진 소운이 마른기침을 컥컥 토해 냈다. 금세 검붉게 색이 변한 얼굴로 몸부림을 치자 보다 못한 흑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하고 속삭이는 소리에 우찬은 짓누르던 목의 압박을 조금 풀어 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소운은 한참이나 거친 숨을 골랐다.

“마마께서 간밤에, ……갑자기 사라지셨습니다.”

“그 소식을 네가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내게 전해?”

“면목 없습니다.”

우찬이 쥐고 있던 소운의 멱살을 놓자 벽에 붙어 있던 몸이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하지만 우찬은 이번에는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탁자 쪽으로 세게 밀어 던졌다. 호위군 중 하나가 붙잡아 주지 않았다면 탁자 모서리에 부딪혀 크게 다칠 뻔했다.

“앉아.”

힘없이 늘어진 몸이 휘청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못 본 새 짧아진 머리가 헝클어져 얼굴을 가렸다.

“다시 묻겠다. 지금.”

우찬이 ‘지금’을 유독 강조하며 말에 쉼표를 찍었다.

“연이설은 어디에 있느냐.”

“……사람을 풀어 찾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행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짧은 순간 강한 파열음이 터진 것과 동시에 호위군이 우찬의 주변을 둘러막았다.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밖에 모여 있던 시종들이 창을 뚫고 방 안에서 날아온 의자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한쪽 벽의 창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든 우찬이 앞을 막아선 흑영을 밀쳤다.

소운은 우찬의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듯 꼿꼿하게 선 자세에서 시선만 아래로 내리깔았다.

“납치,”

우찬은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 자체가 용납할 수가 없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도 당한 것이냐.”

“납치는 아닐 겁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운이 즉답했다. 슬쩍 위로 올려 우찬을 마주하는 시선이 평상시 거의 모든 대화에서 그렇듯 확신에 차 있었다.

“저희도 처음에는 그런 줄 의심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리 확신해?”

당장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이민족의 본거지에서 사라진 이설이 당한 일로 가장 그럴듯한 사건이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그게 맞는다면 지금부터 이민족을 상대하는 금의 전략과 전력이 아주 달라질 것이다.

“어젯밤 마마께서 자기 발로 떠나시는 모습을 창화군이 직접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던 창화군을 먼저 만나 봐야겠군.”

“지금은 곤란합니다. 지금 의원에게 치료 중이십니다.”

“의원은 그대로 있으라고 해. 다시 필요할 테니까.”

소운에게는 더 들을 이야기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책임을 물으려면 창화군에게 하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이대로 계속해서 소운에게 얘기를 들었다가는 흑영이 말리기도 전에 소운에게 해를 입힐 것 같았다.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설의 행방도 묘연한 가운데 오래된 벗마저 자기 손으로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소운이 말했다.

“마마께서 창화군을 공격하셨습니다.”

“뭐?”

“밖으로 나가시려던 것을 막아서자 잿가루 같은 것을 뿌리셨다고 합니다. 창화군은 그대로 정신을 잃으셨고 깨어난 뒤에도 후유증으로 계속 치료받고 계십니다.”

우찬은 자리에 서서 소운의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소운의 말했던 것을 그대로 되감아 서너 번을 반복하고도 이해가 되지 않아 검 끝으로 소운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소운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젯밤 연이설이 제 발로 여기를 떠났다는 거잖아. 그 맹하고 어리숙한 게, 성치도 않은 몸으로 혼자, 남에게 해를 입히면서까지.”

“…….”

“이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본인 의지로 떠나신 건 확실합니다. 서랍에 넣어 두었던 비녀와 지도까지도 모두 챙겨가신 것 같습니다.”

점점 평정심을 되찾는 소운과는 달리 우찬은 다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출 길이 없었다.

연국에서 이설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한숨도 편히 자 본 적이 없었다. 마음을 온전히 한곳에 집중시켜 본 적도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이설이 아른거렸다. 성치도 않은 몸으로 추위에 떨며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을 모습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지친 적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설을 만나야겠다는 마음 말고는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설마 자기 발로 이곳을 떠날 것이란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냉담한 시선으로 소운을 내려다봤다.

“온다는 것을 연이설도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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