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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91)화 (191/300)

달의 황홀경

191화

당장 여기서는 머리 색을 감출 방법이 없었다. 머리를 가린 채 가능한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손을 쓰는 게 최선이다. 다행히 도국은 사내고 여인이고 할 것 없이 털이 두툼한 머리쓰개를 쓰는 경우가 많아 특별나게 눈에 띄는 일도 없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뿐인 금비녀는 도움을 받았던 임씨와 양씨에게 주고 나니 남은 게 없었다. 도망치기 급급하여 여기저기 흘리고 온 비녀며 노리개들이 이제 와 그리 아까울 수가 없다.

그때 탁자 위를 짚고 있던 양 손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과 오른쪽 한 개씩 나눠 낀 두 가락지가 등불에 아스라이 빛을 냈다. 물끄러미 두 가락지를 번갈아 보던 이설은 곧 고개를 털었다. 이걸 팔아 주머니를 채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못 할 짓이었다.

“어쩔 수 없지.”

빈손으로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어 결국 자개함에 안에 들어 있던 비녀 몇 개를 보따리에 던져 넣었다. 낮에 방을 둘러보다 찾은 것이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 껄끄러워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혈혈단신으로 쫓기던 자신에게 돈이 될 만한 게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창화군에게 몇 푼 꿔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팔아 봐야 큰돈이 될 것 같지는 않은 비녀까지 모두 챙긴 이설이 봇짐을 싸서 등에 맸다. 남들이 하는 것만 봤지 직접 몸에 봇짐을 매어 보기는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지만 적응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아, 서신.”

잊은 건 없는지 다시 방을 둘러보던 이설이 말소리를 냈다가 혼자 놀라 입을 꽉 틀어막았다.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이 정도로 인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홍진댁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이설은 아까 전 베개 밑에 숨겨 두었던 우찬의 답신을 꺼냈다. 오는 동안 별 고초를 다 겼었는지 서신이 무척 지저분했다.

하지만 그 더러워진 서신조차도 황송해 마지않으며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힘 있고 날렵한 글자들이 반듯하게 쓰여 있었다.

「너를 그리는 내 마음의 상심이 크니 너는 신속히 돌아오라. 허나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할 수 있거든 어느 때고 무사히 돌아만 오거라 설아.」

다섯 번쯤 곱씹어 읽었을 때 굵은 눈물방울이 종이 위로 뚝 떨어졌다. 글자 위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글자가 번질 뻔했다.

이설은 서신을 다시 곱게 접어 받았던 그대로 비단에 감쌌다. 그리고 봇짐을 풀어 안쪽 깊숙한 곳에 서신을 챙겨 넣고 다시 등에 걸쳐 맸다. 하지만 묵묵히 일련의 행동을 하는 데에도 눈물은 쉴 새 없이 쏟아져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꺽꺽거리며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밖에 누군가가 들을까 입을 막고 한참을 울었다.

체감상으로는 밤새워 운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이설은 서서히 잦아드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 닦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낮에 준비해 두었던 편지 두 개를 향초 아래 눈에 띄는 곳에 놓았다. 하나는 창화군에게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창화군이 우찬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이설은 창으로 다가가 발을 걷고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얼굴이 훅 끼쳐 들어오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기 밖에 누구 있습니까?”

인기척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리를 내보았다. 다행히 대답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설은 왼쪽 발에 단단히 묶여 있는 띠를 확인한 뒤 털신을 신었다. 턱이 낮은 창문을 훌쩍 뛰어넘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날이 밝았을 때 봐 두었던 길을 따라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경비를 서는 보초들이 왔다 갔다 맴돌기는 했지만 그리 삼엄한 경계는 아니었다. 기둥이나 돌조각 사이에 몸을 숨기면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찬 공기에 손이 시릴 정도인데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들킨다고 목이 달아나는 일이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도망을 쳐야만 했던 사정을 설명할 모습을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려 미칠 것 같았다. 우찬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그랬다.

다행히 관사가 그리 크지 않아 금세 대문을 찾았다. 단지 걸쇠가 단단히 잠겨 있는 게 흠이었다.

이미 주변은 너무 어두워 보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있는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도 인기척이 없기에 이설은 조심스레 대문으로 다가갔다.

커다란 나무 걸쇠는 생각만큼 쉽게 들리지 않아 안간힘을 쓰며 힘을 주었다. 그렇게 겨우 반쯤 들어 올린 순간 내내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거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

“어딜 가시려던 참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마마.”

누가 이 엄동설한에 얼음물을 냅다 부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서늘하게 한기가 서렸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소리도 지르지 못한다는 게 딱 이런 꼴인가 싶다.

걸쇠에서 손을 떼고 이설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희미한 등불을 든 창화군이 본 적 없이 냉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창화군이야 말로 이 밤중에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이설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잠이 오지 않아 바람을 쐬러 나가는 길에 마마께서 창문을 넘으시는 걸 봤습니다.”

“…….”

“안에만 계시는 게 답답하여 몰래 나오신 줄 알았습니다. 조용히 달구경이나 하고 들어가시라고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있었는데.”

“그런데요.”

“등에 맨 그 봇짐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건 달구경을 나갈 채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요목조목 따지고 드는 창화군은 침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설과 대치하고 있는 이 상황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설은 다른 사람도 아닌 창화군에게 들킬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 못해 무척 난감하였지만 못 벗어날 상황도 아니라 구태여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저 창화군에게 여태껏 미안한 짓을 해 놓고도 또 미안할 일을 만드는 게 내키지가 않았다.

“급한 볼일이 생겨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저나 단 공자와 함께 다녀오시지요.”

“아뇨. 이건 저 혼자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 마마를 지금 보내 드리면 당장 내일이라도 돌아올 수 있다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이설은 순간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냥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금황제께서 내일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마마를 뵙기 위해 밤낮으로 달려오고 계시는 그분을 이런 식으로 외면하실 작정이십니까?”

외면하기 위해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그 앞에 떳떳하게 서기 위해 만나는 것을 잠시 미루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가진 채로 차마 우찬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는 거라고, 썩어 곪아 터지기 직전인 자신의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었다.

순간 창화군이라면 모두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제 편 없는 이 상황에 좋은 조력자가 되어 주지 않을까.

하지만 몹쓸 짓이었다. 창화군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여 난감한 상황에 빠트리게 할 수는 없었다.

“머물던 곳에 남겨 놓은 글이 있으니 하나는 창화군께서 보시고 다른 하나는 폐하께 부탁드립니다.”

“마마! 무슨 사정이 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그만두십시오! 여긴 연국도, 금국도 아닙니다. 마마께서 위험해 처하실 일이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내 비록 궁에서만 자라 세상사에 무지한 건 맞지만 내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는 거고요. 큰일이 일어나도 다 제가 자처한 일이니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마마께서 제집에 계신 이상 저는 마마를 순순히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설을 말로는 설득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창화군이 잰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이설은 재빨리 품에 손을 넣어 단검을 빼 들었다. 칼끝이 정확히 창화군의 명치를 향했다. 창화군은 갑작스러운 이설의 행동에 당황하여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저를 찌르실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찌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 제가 많이 괴로울 테니 가까이 오지 마세요.”

창화군이 허탈하게 웃으며 천천히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갔다.

“아뇨. 마마께서는 절대 저를 찌르, 크흑……, 큽!”

창화군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이설은 황급히 칼을 거두고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숨을 참은 뒤 반대편 품에서 까슬한 재를 한 웅큼 집어 창화군의 앞에 뿌렸다. 예상치도 못한 공격을 받은 창화군은 시뻘게진 얼굴로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다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이나 기침을 하며 몸을 움찔거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축 늘어졌다.

허공에 흩뿌려졌던 재가 바닥에 다 가라앉고서야 이설은 천천히 소매를 내렸다. 바닥에는 정신을 잃은 창화군과 등불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설은 황급히 창화군의 코에 귀를 대 보았다. 다행히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홍진댁에게 부탁해 마른 약초 몇 개를 구해 두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향초에 태워 재를 모아 둔 것을 품에 넣어 놨다. 코로 흡입하면 기침이 심하게 나고 정량을 초과하면 곧바로 잠이 들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수면향을 피우는 것보다 효과가 뛰어나고 확실하지만 기침을 하는 것이 괴롭고 다음 날 부작용이 심각해서 널리 알려진 방법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사용하려고 준비해 둔 것은 아니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설은 바닥의 창화군을 제대로 눕히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이미 잠이 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 봐야 들릴 리가 없겠지만 몇 번이나 사과를 전했다. 내일 일어나면 차라리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싶기도 했다.

창화군이 기침을 요란하게 한 덕에 저기 멀리서 희미한 등불이 다가왔다. 창화군을 여기서 긴 밤 지새우게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이설은 다시 대문의 걸쇠를 힘껏 들어 올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간 뒤 문틈 사이로 보이는 창화군에게 다시 한번 사과하고 대문을 쿵 하고 세게 밀어 닫았다. 이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대문 앞으로 모여 창화군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낯선 곳의 캄캄한 밤은 그 어디로도 길이 나지 않은 것 같다. 이설은 종일 들여다보던 지도를 외워 이제는 보지 않고도 가야 하는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강성. 일단 강성을 향해 이설은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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