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0화
기억이 가물가물한 약초의 생김새를 어설프게 설명해 봐도 홍진댁은 제대로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며 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신 낡은 자개장을 뒤지더니 반 뼘쯤 타다 남은 향초를 가지고 이설 앞에 들이밀었다.
“이겁니다. 너무 깊이는 말고 살짝만 맡아 보세요.”
“이게 그 향초라고요? ……그러니까 저 풀을 먹고 이 향초 태운 냄새를 맡으면 중독 증상이 나타난다는 게 맞습니까?”
“예, 그렇다니까요.”
“중독 증상이 정확히 뭡니까?”
“보통은 정신을 잃고 픽 쓰러지기도 하고, 좀 건강하다 싶은 사람은 갑자기 졸립다며 잠이 들기도 합니다. 일어나면 정신도 약간 몽롱해지고 기운도 없어지고요. 그렇게 몸 안에 독성이 쌓이면 언젠가는 잠든 채로 일어나지 못하겠죠.”
“하.”
“나리는 참 궁금한 것도 많으시네. 그만 이리 주세요. 맨정신에 맡아 봐야 별 효과가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리가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저는 물론이고 여기 사람들 모두 목이 달아납니다.”
홍진댁이 향초를 냉큼 뺏어갔다. 종이에 겹겹이 싼 향초를 자개장에 다시 넣어 둔 뒤 돌아와서는 하던 얘기를 마저 했다. 이설은 반쯤 나가 버린 정신으로 허공에 시선을 댔다. 코를 대고 킁킁 맡았던 향초의 잔향에 넋이라도 홀린 것 같았다.
“그리고 달아난 일당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강성 쪽에 그런 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다고는 하는데 이미 수도로 도망간 거라면 이쪽에서는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겠죠.”
“그런 일이라니, 무슨 일 말입니까?”
“말 그대로 그런 일이죠. 돈 받고 이름을 지워 주거나 새겨 주는 일. 그딴 짓을 하는 놈들이 뭐 저들뿐이겠습니까? 회국이나 도국이나 아주 그것 때문에 나라가 흉흉합니다.”
“그럼 여기서 수도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회국보다 멀까요?”
“강성이요? 당연히 회국보다야 가깝죠. 말을 타면 넉넉잡아 사흘, 마차를 타면 닷새쯤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몸이 나으면 구경이나 다녀올 수 있을까 싶어 물었습니다. ……그나저나 슬슬 피곤해지는군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얻으려는 정보는 둘째치고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터지려는 감탄을, 불안한 표정을 숨기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홍진댁은 이설이 떡 몇 개 외에는 가져온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게 내심 서운했지만 가져가 맛있게 먹으라는 허락을 받고는 신이 나서 상을 물려 가지고 나갔다. 부를 때까지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에도 의심하거나 토 달지 않았다.
홍진댁이 자리를 비키자 이설은 우선 일어나 차갑게 식은 찻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한 잔으로는 모자라 잔을 직접 채워 마시기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방을 서성이다가 오른쪽 엉덩이가 아직 뻐근한 걸 깨달았다. 내내 누워 있기만 해서 느끼지 못했다.
아까 전 홍진댁이 자개함에 넣어 놓았던 향초를 도로 꺼냈다. 여러 겹으로 싸여 있던 종이를 걷어 내기도 전에 냄새가 진동을 했다. 깊이 들이마시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그 여인, 지금은 귀비가 되었을 그 여인이 건넨 수파에서 나던 냄새다.
어중간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홍진댁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던 저 풀을 데쳐 무친 찬을 우찬이 좋아했다. 그리고 귀비는 품에 넣은 수파에 냄새가 밸 정도로 저 향초를 자주 태웠다.
무암궁에서 몇 번씩 밤을 보내는 동안 우찬은 천천히 중독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개운하지 않은 몸 상태에 뭔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정확히 뭐 때문인 줄도 모르고, 그 어떤 증좌도 없이 아주 천천히. 그러다 평소처럼 잠이 든 다음 날, 영영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밤이 완전히 깊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반나절 정도. 갑자기 할 일이 두 배로 많아졌다.
*
“산책이요?”
환기를 시키느라 열어 놓았던 창문을 닫다 말고 창화군이 뒤를 돌아 물었다.
“방 안에만 계시려니 많이 답답하셨군요.”
“예. 담장 밖에 나가 구경도 하고, 찬바람도 적당히 쐬어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창화군은 벽면을 돌며 창문을 꼼꼼히 닫고 그 위로 발을 내렸다. 문을 열어 시립 중이던 홍진댁에게 방에 공기가 차니 불을 더 피우라는 말을 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종일 이설이 포단을 끼고 있는 걸 보고 방 안이 추워 그런 줄 착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해가 떨어져 곤란하니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근처 구경을 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럼 밖에서 달구경을 하는 것도 괜찮은데…….”
이설은 마음이 초조해져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다행히 창화군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거절은 여전히 단호했다.
“바람이 차서 지금은 안 됩니다. 금황제께서 오셨을 때 마마께서 고뿔이라도 걸리신다면 제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습니까?”
완강한 거절이지만 이설이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농을 섞어 말했다. 이설은 창화군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벌써부터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렇다고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 내내 죄책감이 시달리고 있었다.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창화군을 더 조를 수는 없었다. 좀 더 고집을 부려 본다면 담장 안쪽에서 산책 정도는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창화군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분명 어색한 제 태도를 의심받을 것이다.
아까 창에 머리를 내놓고 구경하는 동안 대충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은 파악해 두었다. 좀 헤매기는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다 꺼져 가는 향초를 끄고 새 향초에 불을 붙인 창화군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새 향초의 심지가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가 잠시간의 정적을 메웠다.
딴생각을 하던 이설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면서 옆으로 쏟아진 제 머리카락이 다시 잿빛 은회색으로 되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지 못한 작은 문제가 생겼다.
“금황제께서 이르면 내일 오후쯤에라도 도착하실 수 있다 하십니다.”
“예?”
갑자기 비명과 함께 놀란 이설이 소리를 지르자 밖에 있던 홍진댁이 묻지도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별일 아니라는 창화군의 말에도 의심 많은 눈을 거두지 못하고 떠밀리듯 밖으로 나갔다.
얼굴에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시체처럼 하얗게 질렸을 제 얼굴은 면경에 대 보지 않아도 알만했다. 삽시간에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창화군이 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
“폐하께서 일찍 도착하시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의미심장하게 묻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제 계획을 눈치라도 챈 것은 아닌지 겁을 먹었다가 이내 그럴 리가 없다며 괜한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저 방금의 반응이 너무 예상외의 것이라 의아한 마음에 물어보는 것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설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살랑살랑 고개를 저었다.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이마 아래로 쏟아졌다.
“이렇게 빨리 도착할 거리가 아니었는데 혹시나 무리해서 오고 계시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아아, 그렇긴 하지요.”
역시 창화군은 금세 의심을 거두고 수긍했다.
어차피 거사는 오늘 치를 것이기 때문에 내일 도착할 우찬이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을 우찬을 생각하면 그냥 마음이……,
“나리. 소운입니다. 긴히 전해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졌던 이설은 밖의 기별에 놀라 흠칫 몸을 떨었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접어 몸으로 가까이하는 행동이 무척 재빨랐다.
오후 내내 자리를 비웠던 소운은 이설을 보자마자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춥지는 않은지, 밥은 거르지 않고 다 먹었는지를 속사포처럼 물었다. 이설이 맹하게 얼빠진 대답을 하는 통에 창화군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소운은 마찬가지로 이설이 아프기라도 하면 우찬을 볼 면목이 없다는 말로 타박을 주었다.
이설은 여러 사람에게 같은 얘기를 듣는 게 싫어서 전할 물건이 뭐냐며 말을 돌렸다.
“마마께서 습격을 당하시기 전 금에서 보낸 서신이 이쪽으로 도착했습니다. 여기, ……폐하의 인장이 맞습니다. 서신을 전달한 사람도 제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소운이 금색 비단에 쌓인 서신을 건네며 덧붙여 말했다. 우찬이 왜 자신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기이하게 생각하다 일전에 금으로 돌아가는 기한을 늦춰 달라는 청에 대한 답신인 줄 깨달았다. 이제 와서 답신의 내용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우찬이 직접 내어 준 답신이라는 점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별 내용도 아니겠지만 혼자 읽고 싶은 마음에 서신을 베개 아래에 넣어 두었다. 마음을 알아챘는지 소운이나 창화군도 왜 지금 확인하지 않느냐며 부추기지 않았다.
밤이 더 깊어질수록 마음이 더 초조해졌다. 이설을 옆에 두고 대체로 둘이서 얘기를 나누던 소운과 창화군도 슬슬 일어날 기미를 보였다.
“저희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거든 언제든 밖에 사람을 보내십시오.”
“저, 창화군.”
“예, 마마.”
“생각해 보니 제대로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베푸신 이 은혜는 정말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난데없이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전하는 이설에게 창화군은 당황하며 한사코 손을 저었다. 금에서 자신이 받았던 환대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던 창화군은 실로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가만 두 사람을 보던 소운만 소리 없이 웃다가 창화군을 데리고 나갔다.
이설은 두 사람의 발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방 밖에 흐르는 정적을 확인하고서야 포단을 걷고 두 발로 섰다. 엉덩이가 뻐근한 것 말고는 그런대로 괜찮은 몸 상태였다.
일단 구석의 함을 뒤져 커다랗고 두꺼운 보자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낮에 봐 두었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너무 큰 소리가 들리면 홍진댁이 또 벌컥 문을 열까 봐 최대한 소리를 낮췄다.
다행히 어지간히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방 안에서 구할 수 있었다. 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까 홍진댁에게 부탁하여 준비해 두었다. 안감이 두툼한 겉옷은 물론 털신과 도국 지도까지. 날이 선 단도를 찾았을 때는 기쁘기까지 했다. 동시에 이런 건 쓸 일이 절대 없어야 할 텐데, 하고 바라며 품 안쪽에 넣었다.
챙길 건 모두 챙겼다. 걸리는 건 두 가지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눈에 띄는 이 머리 색을 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