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87화
미소 진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입술 끝이 파르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니 의외로 이따위 도발에 동요한다는 생각이 들어 더 보기가 싫어졌다. 한번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고 난 뒤 장죽을 꺼내 불을 붙이고 의자에 앉았다.
“다시 장죽을 피우시나 봅니다. 향이 좋은 엽초 잎이 있는데 드릴까요?”
다시 사근하게 말을 거는 귀비가 반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려다 우찬이 ‘아니’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에 걸음이 멈췄다.
“그대가 가져온 건 별로 피우고 싶지가 않아.”
“어째서 말입니까?”
“의심하는 몇 가지가 있는데 혐의가 다 풀릴 때까지는 그대를 멀리해 볼 참이거든.”
“그 말씀을 굳이 신첩에게 하시는 연유는……?”
“그러니 괜한 짓을 하고 싶거든 마음껏 해 보라고.”
“…….”
“꼬리는 길어야 밟기 쉬운 법이니까.”
적당히 익은 연잎의 연기를 장죽 밖으로 불어낸 뒤 우찬이 담담하게 말했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귀비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을 때는 미소가 지워진 채였다.
우찬은 한때 천명이라는 실체 없는 굴레에 속아 귀비와 이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던 짧은 순간을 미치도록 후회했다. 그깟 천명 따위 한 번 거스르면 그만인 것을. 그랬다면 이 밤, 제 앞에 서 있을 사람은 제대로 된 연이설이었을 텐데.
“신첩은 폐하께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사옵니다.”
“연이설이 있는 한은 그렇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네가.”
장죽이 탁자 위로 탁 내려치는 소리에 일순 귀비가 놀라 몸을 흠칫했다. 질끈 감겼다 떠지는 눈이 전처럼 고분고분하지만은 않았다.
“북방 오랑캐들에게 이설에 관한 정보를 흘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그를 죽여 내 명줄을 손에 쥐라 거든 것도 네가 한 짓이겠지?”
흔들림 없는 여인의 눈빛은 자신의 무고함을 침묵으로 소리쳤지만 이깟 잔재주에 넘어갈 우찬이 아니었다. 인정해주는 건 두둑한 배짱 거기까지다.
“무슨 증좌로 신첩을 그리 모질게 모함하십니까?”
억울한 기색 하나 없이 무던하게 되묻는 귀비가 제법 흥미롭긴 했다. 다른 황궁의 여인들 같았으면 벌써 이 대목에서 무릎이 바닥에 닿아 억울하다며 통곡하기 바빴을 것이다.
우찬은 마른 시선으로 귀비의 전신을 훑어보다 가볍게 던졌다.
“증좌는 없다.”
“…….”
“증좌까지 있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이리 가만 보고만 있지 않았겠지.”
이설을 북방의 벼랑 끝까지 몰아넣은 장본인이 귀비임이 틀림없다면 여기서 두 발로 걸어 나갈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이설을 비롯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민족의 습격까지. 이 사달들의 시발점이라 하면 단연 귀비의 등장이었다. 어렴풋하게 품었던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고 이설의 목숨까지 위협받게 된 이상 모른 척 풀어 주는 것도 이미 선을 넘어섰다.
증좌는 아직 없다. 무암궁에서 발견된 사내 둘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시체를 눈앞에 들이밀어 봤자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암살하기 위해 숨어들어 온 자객이 아니냐며 물어 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좀 더 주도면밀하게 감시해 보기는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연회가 시작되고 난 후쯤부터는 외출을 삼가라는 황명이 완전히 거두어지자 귀비는 황궁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지만 달리 수상쩍은 사람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귀비 첩지를 받기 전까지는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받지 않은 터라 일부러 무암궁까지 찾아가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출신 지역이 비슷한 우 미인이 이설 없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서너 번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지만 머무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수상한 사람이 드나드는 흔적은 없다. 가장 수상한 건 귀비다.
“폐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저 패기가 대체 어떻게 봐야 수상해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신첩은 그저 오늘 황명으로 시키신 일을 잘 치르고 왔다 말씀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그래서 기특하다는 내 칭찬이라도 기대하였느냐?”
“친해 내려 주신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겠지요.”
한마디 지는 법이 없는 귀비는 이내 여유를 되찾아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찬은 짧은 실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손만 휘이 저었다. 다시 집어 든 장죽을 길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내뱉자 뿌연 연기 사이로 귀비가 구부정하게 허리를 한 번 굽힌 뒤 뒤돌아 나간다. 거동을 도와주는 궁녀가 없어 혼자 뒤뚱뒤뚱 걷는 모양새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귀비가 사라지고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머릿결이 바람에 날렸다.
“……차라리 죽일까.”
흑영은 탁자에 다시 지도를 펼치다 우찬이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흠칫 놀랐다.
“섣부른 결정인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생각해 보고 있어. 차라리 저 흉악한 것을 죽이고 나면 일이 더 순조로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폐하 저분께서는,”
“저런 게 내 정인 따위일 리가 없다.”
“…….”
“네가 알 턱이 있겠냐마는.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내일 일이나 마무리하지.”
우찬에게 휘둘리기만 한 흑영은 무슨 말을 들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감추려 복면을 위로 올리고 펼친 지도를 각 자리에 정리했다.
우찬은 지도 위에 각각 표시된 지점들을 번갈아 보며 최종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흑영은 최소한의 휴식과 말의 상태를 고려했을 때 이르면 이틀 뒤 저녁쯤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라 말해 함께 따라나서는 호위군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받았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우찬은 어림없는 소리라며 조용히 코웃음이나 치고 말았다.
*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아침이 온 줄도 몰랐다. 어젯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떠벌리고 간 여인이 기침하셨냐며 어제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로 세숫물을 가져오고 나서야 아침인 줄 알았다.
잠시 기다리라며 여인을 밖에 세워 둔 이설은 대충 허리띠를 풀어 왼쪽 발등부터 발목 위를 칭칭 동여맨 뒤 포단 아래에 감췄다. 급한 대로 처치를 하며 깨닫기를, 더 이상 발목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조반은 지금 바로 준비할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창화군께서는,”
“쉿!”
세수를 마친 이설에게 마른 면포를 전해 주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검지를 입술에 댔다. 덩달아 놀란 이설이 얼굴을 닦다 말고 면포를 입을 막았다.
“여기서는 주인어른을 그리 부르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는 주인어른이나 작은 공자님이라 부르셔야 합니다.”
“아……, 예.”
창화군은 아무래도 왕족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이곳에 지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인어른이라 부르는 건 영 입에 붙지 않아 몇 번 곱씹어 보다 관두고 다시 물었다.
“그럼 작은 공자께서는 일어나셨습니까?”
“일찍이 볼일이 있으시다며 외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뭐라 불러 드려야 할지……, 주인어른께서는 마마라고 부르면 절대 안 된다고 하셔 가지고…….”
이미 여기 사람들은 정체를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말조심을 하는 여인에게 적당한 것으로 알아서 부르라 하니 ‘그럼 나리라고 부르겠습니다.’ 하고 허락을 구하듯 당차게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 테니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여기 이 인경을 울리시면 됩니다, 나리.”
여인이 한 뼘쯤 되는 종을 손에 쥐여 준 뒤 세숫물을 가지고 나갔다. 시험 삼아 살짝 흔들어 본 종소리는 맑고 청량했지만 어쩐지 귀가 따가울 만큼 커서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혼자 있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창화군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직면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차분히 생각을 하려던 차에 인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루 소의 마마!”
저리 부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문득 태평한 생각이 들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운 이설에게 팔랑거리는 가벼운 몸 하나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어? 하고 정신이 멍해진 틈을 타 양손이 덥석 붙잡혔다.
“소운……님께서 여기 갑자기, ……아!”
어제 잠깐 창화군이 전해 주고 간 얘기가 이제야 다시 생각났다. 늦은 밤부터 새벽 내내 다른 생각을 하느라 뒷전으로 밀려 있던 소운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급히 오고 있다는 얘기를 여태 잊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
이설은 소운이 제 앞에서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 게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제야 창화군 보다 더 낯익은 누군가를 만난 것이 반갑기도 하여 할 말을 잃었다. 평소답지 않게 쉴새 없이 말을 내뱉는 소운이 묻고 싶은 건 결국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지금 이설은 괜찮은 건지 이 두 가지였다.
연국의 아바마마가 편찮으시단 소식에 무리해서 연국을 가던 중 이민족으로 추정되는 이들에게 습격을 받아 도망쳤고, 도움을 구하러 양화성으로 향하던 길에 다행히 도국 병사들을 만나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얘기를 참 길게도 늘어놓았다.
이설은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말하려는데 점점 경악스럽게 변하는 소운의 얼굴을 마주하니 민망스럽기 그지없어 하릴없이 목 뒤만 사근사근 긁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절벽을 굴러 다리를 접질리신 것 같다고 들었는데요.”
자연히 두 사람의 시선이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 이설은 포단으로 덮어 둔 발목이 보이는 것도 불안해서 얼른 소운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여기 어깨에 화살을 맞긴 했습니다만 상처가 빨리 회복 중이라 합니다.”
당황한 마음에 옷을 끌어 내려 어깨를 보여 준 이설은 그제야 맨살이 보이는 게 조금 창피했지만 소운은 그런 생각일랑 하나도 없는지 내내 걱정스러운 얼굴만 보였다.